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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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부 13강 불이(不二)의 법(法), 그 입구(門)
야부의 시를 읽을 준비가 되셨나요. 이거 하나는 꼭 기억해 두셔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번 강의에 일러 드린 대로, “보디스바하,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젖 달라고 징징대지 마라. 진리조차도 그렇다”입니다.
다음을 읽어보겠습니다.
2. [如]如. 靜夜長天一月孤.
3. [是]是. 水不離波, 波是水. 鏡水塵風不到時, 應現無瑕照天地. 看看.
번역하자면,
2. “[如]여, 여(如)여. 고요한 밤, 길게 걸린 하늘에, 달 하나가 외롭도다.”
3. “[是]여, 시(是)여. 바다는 파도를 떠나 있지 않으니, 파도가 곧 바다이다. 먼지가 붙지 않고, 바람이 불지 않을 때, 거울과 바다는 응당 한점 흠 없이 천지를 비출 것이니, 보라, 보라.”
여기서 채용하고 있는 상징과 비유들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2. ‘고요’는 ‘시끄럽지 않다’는 뜻입니다. ‘밖을 향해 분주하게, 그리고 무엇을 달라고 시끌벅적 나대지 말라’는 뜻이고, ‘길게 걸려 있다’는, 하늘 저편 허공에 들어설 아파트 평수를 논하는 것이 우습듯, ‘구분과 차별이 지워졌다’는 뜻입니다. 제 1부에서, 구분과 차별이 인간의 관심과 욕망의 투사라는 말은 자주 했던 것같습니다.
‘외롭다’는 그 관심과 욕망으로부터의 탈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부연하자면 ‘홀로’란, 모든 인간적인 흔적이 지워진 곳, 자아(我)의 부당한 개입과 준동이 그친 곳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 특히 선시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외로운 달(孤月, 一月孤)’은 나로 하여 토막질되지 않은, 저 스스로 나와 더불어 완전한 세계를 가리킵니다.
3은 그 여시(如是) 세계의 실상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물이 곧 파도이고, 파도가 곧 물”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고요. <대승기신론>이, 그리고 원효의 소가 본격 논구하고 있듯이, 파도는 이를테면 인간의 심리정신적 에너지의 파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에너지는 각자의 심층적 무의식, 자연적 신체로부터 발원한 것이고, 그 바탕은 우주의 총체적 에너지 근원에 뿌리 닿아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누추하고 불만족스러운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일상적 에너지의 파도가 보다 근원적 심층의 자연과 분리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 짚어둘 것은 무의식의 심층에 관한 것인데요…. 유식이 표면적 육식(六識) 너머에 자아의식인 칠식(七識), 그 너머에 무의식에 해당하는 팔식(八識), 그리고 때로는 그 너머에 구식(九識)까지 있다는 얘기는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자아의식의 뿌리에 잡동사니 가득한 무의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융은 그보다 깊은 의식의 심저에 영원한 고요와 평안의 에너지 창고가 있다고 반발했습니다. 불교는 아마도 프로이트가 팔식(八識) 주변을 보았고, 융이 팔식의 심층, 혹은 구식의 정체를 간파했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요점은 이것입니다. 자아의 활동이 숨을 죽일수록, 우리는 우리 내부의 더 깊은 불성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합치’와 더불어 세계는 더 이상 자아의 투사, 혹은 그림자로서 드러나지 않고, 자신이 본래 갖고 있던 여여(如如)한 모습을 증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떠나지 않고, 바다가 물을 떠나지 않았다(水不離波, 波是水)”는 바로 그 ‘합치’의 경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경험하는 마음은, “먼지 없는 거울, 바람 그친 바다처럼 응당 한점 흠 없이 천지를 비출(應現無瑕照天地)” 것입니다. 거기가 반야바라밀입니다.
지금 야부는 밖의 유혹도 안의 충동도 없을 때, 즉 에고가 숨죽인 무아(無我)에서, 세계는 제 모습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때 나(我)는 어떤 모습이며, 무엇을 다시 들을(聞) 것입니까. 여기 한 두 마디 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我], 淨裸裸赤 沒可把. 我我. 認得分明成兩箇. 不動纖毫合本然. 知音自有松風和.
5. [聞]. 切忌隨他去. 猿啼嶺上, 鶴 林間. 斷雲風捲, 水激長湍. 最好晩秋霜午夜, 一聲新雁覺天寒.
4. “[我]라. 벌거벗고 깨끗하게 드러난 몸, 그러나 붙잡을 수는 없다. 아(我)여, 아(我)여. 그러나 이것이요 하면 둘로 갈라지니 조심할 것. 한 치 움직이지 않고 본시 본연(本然)에 합해 있다. 알아 듣는 자만이 시원한 솔바람 소리를 느끼리라.”
5. “[聞]이라, 제발 남 쫓아가지 마라. 원숭이는 봉우리 위에서 울고, 학은 숲 사이에서 우짖는다. 조각구름 바람이 말려가고, 물은 긴 여울로 치고 흐른다. 좋구나! 늦은 가을 서리 내리는 깊은 밤에, 새 기러기 한 마리 차가운 하늘을 울고 간다.”
4. 아(我): 여시(如是) 그 세계는 밖의 유혹이 멈추고, 안의 혼란이 그칠 때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아(我)는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입니다. 주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그것은 순수한 경험의 지속으로 드러날 뿐, 자신을 대상화할 아무런 표지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벌거벗고 깨끗한 몸(淨裸裸赤 )”입니다. 이 전체의 경험을 박제화하거나, 거기 이름을 붙이지 마십시오. 또 그 가치를 의심하거나 그 잔을 외면하려 하지도 마십시오. “이것이요 하면 둘로 갈라지니 조심해야 한다(認得分明成兩箇).”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생생한 ‘지금 이것(如是)’의 경험이 이루어야할 전부입니다. 보리사바하. 이 단순하고 심플한 삶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신성한 현재’를 온 마음으로 충분히 살기에 주력하십시오. 보리사바하, 그 불도(佛道)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치 움직이지 않고 본시 본연(本然)에 합해 있다네(不動纖毫合本然).” 그러니, 부디, 세상에 대고 불평하지 말고, 자신의 힘과 가치를 믿으십시오. 이 본지풍광(本地風光)의 소식에 깊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온갖 먼지바람에 텁텁한 도심의 공기를 떠나, “산림의 솔바람 소리를 달게 마실 수 있을 것입니다(知音自有松風和).”
5. 문(聞): 그럼, 이제 무엇을 ‘더’ 들을 것입니까. 이 모든 소식은 무슨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누가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밖의 소음과 내부의 허덕임을 그만 멈출 때, 그때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더라는 소식은 성찰과 명상으로 얻는 자기 지혜일뿐입니다. 책이나 설교는 그런 점에서 이 철저한 내면성을 다치기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점에서, 위대한 선지식 붓다의 목소리도 우리를 잘못 이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성철 스님도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돈오돈수(頓悟頓修)를 말씀하신게 아닌가,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닦는 것’이 아니고, ‘깨닫는 것’ 하나로 이미 완전해졌다는 소식을 알리려고 말입니다.
그 정문의 일침을 지금 야부는 읊고 있습니다. “제발 남 쫓아 가지 마라!(切忌隨他去)” 마군이도 쫓아가지 말고, 부처도 쫓아가지 마십시오. 그런데 좀 황당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혀를 쫓아 진리를 알겠다고 <금강경>을 펼쳤는데…. 지금 야부는 생뚱맞게, 이제 그만 되었으니, 책을 덮으라는 것이 아닙니까.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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