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과 불교는 왜 언어를 미워할까
야부의 글은 명문이지만, 그만큼 읽기가 까다롭습니다. 오늘은 맨 첫 구절 여시아문의 여시(如是)를 읊은 대목부터 보겠습니다.
원문
1. [如是]. 古人道, 喚作如如, 早是變了也. 且道, 變向甚 處去. . 不得亂走. 畢竟作
生. 道火不曾燒 口.
2. [如] 如. 靜夜長天一月孤.
3. [是] 是. 水不離波, 波是水. 鏡水塵風不到時, 應現無瑕照天地. 看看.
번역
보이는 대로 대강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1. <如是>. 옛 사람이 말했다. 여여(如如)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일은 변질되었다. 말해 보라. 대체 어디가 변질된 곳인가. 엑! 어지러이 쫓아 다니지 마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불이야!”라고 말한다고 어디 입을 태워먹던가.
2. <如>여, 여(如)여. 고요한 밤 길게 걸린 하늘에, 달 하나가 외롭도다.
3. <是>여, 시(是)여. 바다는 파도를 떠나 있지 않으니, 파도가 곧 바다이다. 거울같은 맑은 물에 먼지바람 불지 않을때, 그때 한점 흠 없이 천지를 비출 것이니, 보라, 보라.
해석과 부연
1. 미리 하나 짚어두고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금강경>의 맨 첫 줄이자 현대불교신문사의 출판사 이름이기도 한 여시아문(如是我聞)을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다”라고 새깁니다. 당연한 얘기를 왜 또 꺼내느냐고 핀잔을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혜능도 여시(如是)를 “이와 같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는 선사들도 있습니다. 선가는 여시(如是)가 앞으로 이어질 붓다의 말씀이 아니라, 진리 바로 그 당체(當體)의 성격과 내용을 일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요. “붓다의 말씀이 곧 진리 아니냐”고 말입니다. 결국은 그렇습니다마는, 그러나 여기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야부는 여시(如是)를 이어질 <금강경>의 내용이 아니라 세계의 실상인 여여(如如), 나아가서 <대승기신론>의 진여(眞如)와 같은 말로 보고 있습니다. 그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함허는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시(如是)에 대한 옛사람들의 해석은 다기다양하다. 지금 야부노인은 여(如)를 유무(有無)가 불이(不二)라는 뜻으로 새기고, 또 시(是)는 그 여(如)에 시비(是非)가 없다는 뜻으로 읽었다.” 그렇습니다. 야부에게 여시(如是)는 이어지는 <금강경>의 말씀이 아니라 유무와 시비가 무색한 법계(法界)의 실상,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언해가 보통과는 달리,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가 아니라, “이와 같음을 내 듣자오니”라고 새긴 것도 저간의 곡절을 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를 염두에 두고서야 야부의 불가사의한 수수께끼같은 시구를 읽을 수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이 그렇듯이 진여체는 언설로도 그릴 수 없고, 생각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어떤 언설도 실패하고 미끄러지고 맙니다. 그래서 지금 야부는 “이미 여여(如如)니 하고 말하는 순간, 이미 진리를 향한 과녁으로부터 십만 팔천리 멀어졌다”라고 질러놓는 것입니다.
뭐, 이런 투의 말은 익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독자들은 불교가, 특히 대승과 선이 왜 그토록 진리를 말하는 언어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그것 좀 속시원히 가르쳐 주지 않고, 왜 자꾸만 감추는 거지!”라고 안타까와 하는 사람, “괜히 말로 할 수 있는 것을 신비화해서 사람 입을 막으려는 수작이야”라고 비난하는 사람들, 그리고 “말로 할 수 없다면서 왜 저토록 말이 많아!”라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불교의 언어혐오증(lingua-phobia)을 나름대로 변명해 보겠습니다. 이 전략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 1부에서 제가 쓴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계실 줄 압니다. 자아(我相)는 자기 욕망으로 객관적 세계의 자장을 뒤튼다는 것을…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이렇게 에고(ego)가 뒤틀어 놓은 세상의 본래 모습을 되찾고자 한다는 것을… 그때 세계는 화평해 지고, 수행자는 가장 무서운 괴물인 자기자신으로부터 자유를 찾는다는 것을….
장자 제물론의 한 구절
언어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자아의 충실한 도구이고 노예입니다. 이 점을 통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자(莊子)는 인간의 언어는 바람소리와는 달리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있고 목적하고 있는 점에서 자유로울 수도 객관적일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 2편 ‘제물론(齊物論)’의 일절을 들어봅시다.
“무릇 말이란 바람에 울리는 소리와는 다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있다. 의도에서 발한 말은 편견의 소산이므로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진정한 의미의 말은 있는 것일까. 그 말은 불가능한 환상인가. 그렇다면 우리들의 말은 새의 짹짹거림과 어디가 다른가. 둘 사이에 정녕 구분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 길(道)은 어디에 가려져 참과 거짓이 있게 되었고 말(言)은 어디에 가려져 옳고 그름이 있게 되었나. 어디에 간들 길이 아닌 곳이 있으며 어디에 있은들 말이 못설 자리가 있으리오만, 길은 우리의 협소한 이해로 하여 가려졌고, 말은 우리의 부화(浮華)한 요설로 하여 가려졌다.”
말이란 저번 강의를 패러디하자면, 채권을 적어놓는 장부이고, 빚을 받아내기 위해 보내는 집달리 혹은 해결사같은 것입니다. 채무는 보이지 않고, 해결사들은 목표물의 인정사정을 보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 수십억년의 부당한 관행에 제동을 걸려고 합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이 말은 즉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적어놓은 채권은 없으며, 세상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는 뜻입니다. 붓다도 오직 자신이 서 있을 땅 한뙈기의 자리만 임시로 누릴 수 있다 했습니다.
언어는 세계를 자아화하는 도구입니다. 즉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도와 욕망에 맞도록 요구하는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요구가 많고 불만이 많은 사람이 말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 그래서 말은 늘 위태롭습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말이 적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불교는 자신을 위해서는 말을 적게 하라고, 궁극적으로는 말을 아예 꺼내지도 말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언(默言) 수행의 근본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늘 일깨웁니다. 보디스바하, 모든 것이 ‘거기 이미’ 이루어져 있노라고… 거기 더 보태고 뺄 것이 없다고. 이미 모든 것이 충분히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무엇을 더 달라고 징징대는 소리가 밉살스럽고 안타까웠던지 야부의 목소리는 좀 퉁명스럽습니다. “있는 그대로(如如)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이미 일은 변질되었다.” 저는 이 개구즉착(開口卽錯)의 법문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너는 아무것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진리조차도 그렇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여러분은 야부가 시에서 채용하고 있는 달과 거울, 그리고 먼지가 무엇을 비유하고 있는지를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