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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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황룡 선사는 불난 집에 그대로 머물다/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불과 십오륙 여년 전만 해도 당우 한 채에 아궁이는 여러개였다. 장작이 벌겋게 타고 있는 해질 무렵의 아궁이는 넉넉함 그 자체다. 동시에 그 불은 경계 대상의 1순위다. 야순(夜巡) 소임자들은 해가 지면 두부장수처럼 종을 흔들며 경내를 도는데 그때 가장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 아궁이 불이었다. 아궁이 크기와 숫자는 그 절 살림살이와 규모의 척도이기도 했다. 대중이 함께 머무는 큰방 아궁이가 얼마나 컸던지 ‘지게채 장작을 지고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어느 절에서나 들을 수 있는 흔한 이야기였다. 조금 더 격조 있는 말로는 ‘우리 절 방구들은 얼마나 잘 놓았는지 한번 불을 때면 한철 내내 따뜻했다’는 것이다. 야무진 살림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나저나 목조건물인 사찰은 불이 가장 큰 재난이다. 고암상언(1899~1988) 선사 영결식날 대중들이 모두 다비장으로 가버려 절을 비운 사이에 물 끓이는 가마솥이 걸려있던 아궁이 불이 밖으로 넘어 나왔던 모양이다. 다행히도 남아있던 눈 밝은 학인에 의해 발견돼 부랴부랴 곁에 있던 수각의 물을 부어 끌 수 있어 큰 화재로 번지지는 않았다. 하마터면 가야산 양쪽에서 동시에 불을 피울 뻔 했다.
임제종의 황룡혜남(1002~1069) 선사는 불 때문에 낭패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여산 귀종사에 머물 때 일이다. 어느 날 밤 절에 불이 나서 대중이 야단이었다. 그런데 선사는 평소와 다름없이 미동도 않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있었다. 옆에 있던 스님이 선사의 팔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면서 불길 피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런데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꾸짖었다. 화광삼매를 깨뜨린 것은 물론 사찰 주인으로서 이 집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을 정면으로 거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선사의 속뜻을 알아차린 그 스님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이후 스님께서는 스승 석상자명(986~1040) 선사의 큰 법을 누구에게 맡기겠습니까?”
이 말에 할 수 없이 천천히 옷을 고쳐 입고 일어서니 불길은 이미 자리밑까지 와 있었다. 불을 피한 것은 내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법(禪法)이 끊어질 것을 염려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세간 법은 그게 아니었다. 이 일로 인해 관가에 불려가 고초를 치르게 된다.
두 달 뒤 풀려났는데 수염과 머리카락도 깎지 않고 뼈와 가죽만이 앙상한 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마중을 나왔던 사제가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멘 채 말했다.
“총림의 주지인 사형께서 어쩌다가 이렇게 형색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까?”
그러자 황룡 선사는 단호하게 호령했다.
“이 속된 놈아!”
사제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서 사형에게 절을 올렸다. 혜명(慧命)때문에 신명(身命)을 유지하고 있을 뿐인데 그것도 모르고 체면만을 살피는 사제에게 한 할(喝)을 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궁이나 법당이나 다비장이나 불(火)만 있으면 모두가 화광삼매처가 된다.
부안 월명암에는 선을 넘어버린 부목처사가 아궁이의 벌건 숯불 앞에 있는 것을 보고 발로 차서 그 안으로 처넣고는 아궁이 문을 닫아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소설 〈만다라〉에서는 죽은 지산 스님을 그의 도반 법운 스님이 함께 정진하던 토굴 방에 앉혀놓고 집과 함께 태워 그를 다비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각각 수업료(?)의 차이는 있어도 그 메시지는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태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한암 선사는 한국전쟁 때 오대산 상원사 법당을 ‘작전상’ 태우려는 군인들의 시도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러자 선사는 대웅전 안에서 목숨을 걸고서 일체 동요 없는 좌선삼매로써 그들을 감화시킨 덕분에 법당을 구해낼 수 있었다. 화마(火魔)를 지키는 것도 선정(禪定)의 힘인 것이다.
200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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