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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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농사 잘못 지으면 추수해들일 게 없어
나 먼저 믿고 나 먼저 알고 나 먼저 깨달아야

우리는 인간이라는 고등 동물로 태어났습니다. 그럼 이 중세계에서 왜 우리가 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여러분한테 종종 말씀드렸다고 봅니다. 허나 우리가 열 번을 하고 백 번을 해도 그게 감지가 되지 않는다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믿을 수가 없고요. 이름만 그냥 ‘주인공’ 이렇게 부르면 되는 줄 알고 하시는 거죠.
우리가 불이 들어오게 코드를 꽂아야 할 텐데 똑바로 코드를 꽂느냐 못 꽂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똑바로 꽂아야만 불이 들어와서 한 방에서 같이 살고 있는 식구들도 다 환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코드를 제대로 꽂질 못하고 이름만 부르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인생이 길다고 생각을 하는데 반면에 짧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이 태어나면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부처님도 계신 거지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라는 얘기를 종종 해드렸죠. 그러나 그뿐입니까? 태어났다면 우리가 먹히고 먹고, 짐승들이나 곤충들이나, 또 인간 자체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모두가 정신을 뺏기고 정신을 뺏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정신을 뺏기고 잡아먹히고, 뺏기기만 하면 좋은데 잡아먹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껍데기가 훌렁 나자빠지죠. 이러한 문제들을 볼 때에 곤충에서부터, 짐승들로부터 인간까지 뭐가 다르냐는 겁니다. 모두 아주 극난하게 허우적거리고 살얼음판을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한생 나와서 우리가 이 공부를 안 하면 안 된다는 그 점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매여서 살고 있습니다. 고기들이 물속에서 바깥으로 나오면 죽듯이 우리도 역시 물주머니에 갇혀 있으면서 그 물주머니에서 서로 잡아먹고 서로 빼앗고 서로 이렇게 허우적거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도 그것을 아시고야 어찌 ‘이 물주머니에서 벗어나야만 너희가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느니라.’ 하고 말씀 안 하셨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생각해 볼 때에 한 치도 거저가 없고 에누리도 없고 자유도 없고, 이러면서도 극난하게 뺏기고 뺏고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한 번쯤 넓게 생각을 하고, 좀더 깊이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디로 지금 가고 있는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극난하게 헤매다가 한 철 나기 전에 알아야 할 이 문제를, 한 철이 나고 세세생생에 뒹굴면서도 아예 몰라서 그 물주머니를 벗어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먹고 사는 게 뭐길래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 몸속의 생명들을 위해서 먹어줘야 하고, 또는 내 몸뚱이가 집합소가 돼서 그 안에 따뜻하게 살게 해줘야 하고, 심부름도 해줘야 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몸뚱이가 나냐고 하신다면, 모두 내가 아닙니다. 가짜 나도 아니고 진짜 나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더불어 같이 사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불어 같이 산다, 더불어 같이 먹는다,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화 하고 돌아가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그대로 곤충 하나 빼놓지 않고 풀포기 하나 빼놓지 않는 그러한 한마음이 되게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기 몸뚱이 하나를 가지고도 혹성이라고 하고 우주라고도 할 수 있는, 은하계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그 몸뚱이 하나에 생명들이 헤아릴 수 없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 하나를 잘못 생각하면 전체 생명들이 그 생각을 따라서 잘못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내가 잘 생각을 한다면 전체가 따라서 잘 생각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머리를 만들어놓고 한생각이 대뇌를 통해서 중뇌에서, 소뇌도 있지만 중뇌에서 책정을 해서 사대(四大)로 통신을 하게 됩니다. 통신을 해서 모두 일체가, 공장 공장이 다 작용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우주의 한 덩어리라고도 볼 수 있고, 한 블랙홀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한 샛별 세계라고도 할 수 있고, 은하계라고도 할 수 있고, 위성이라고도 할 수 있고, 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몸체가 한생각에 의해서 모두 움죽거리게 돼 있습니다.
‘한생각을 잘못한다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잘못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 몸속에 들어 있는 생명체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식이 돼서 악업ㆍ선업ㆍ영계성ㆍ윤회성 또는 인과성ㆍ세균성 이 모두가 한데 합쳐서 모두 살고 있고 운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말을 했죠. 오신통이 지금 시쳇말로 한다면 컴퓨터와 같다고요. 자동적인 컴퓨터에 자동적으로 입력이 된다고요.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거기 입력이 됨으로써 현실에 자꾸자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오는 자체를 가지고 자기 마음에서 나온다고 오산을 하고, 자꾸 그 마음에서 나온다고 속고 있습니다. 그건 의식 속에서 입력이 돼가지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할 때에, 여러분 각자가 생각할 때에 이거는 내가 이렇게 생각을 해서 잘되는 건가, 이거는 한 찰나에 모두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렇게 대해줘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면서도 그냥 행합니다. 그렇게 행하면 그대로 그 의식을 따라서 다시 차곡차곡 입력이 되니까 여기에서 큰 문제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인공! 너만이 모든 거를 해결할 수 있고, 너만이 화목하게 할 수 있고, 너만이 병을 낫게 할 수 있고, 네 몸뚱이를 건강하게 해서 끌고 갈 수도 있고,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해주는 것도 너뿐이다.’ 하고 모든 것을 거기 맡기고 해라. 그렇게 되면 그 컴퓨터에 입력된 게 과거에 입력된 것은 나오는 것이 없어지면서 새로 입력되는 게 들어가면서 새로 생각해서 넣은 것이 새로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여러분은 절에 가면 손을 꼽고 기도하고 빌고, 나한테 에너지를 달라고 하고, 잘 되게 해달라 그러고 병 낫게 해달라 그러고, 해달라고 그러는 데서 그만 공덕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광대해서 부처님 마음과 일체제불의 마음을 한데다 합쳐서 주인공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겁니다. 오히려 진리가 그러하니까 그대로 하시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그래서 마음공부를 안 한다면 정신계로부터 잃어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빈집이 되고, 빈집이 됨으로써 물질계에서만 허덕거리다가 그냥 죽어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허탈하게 지내도 상관이 없겠습니까? 한 번쯤 생각해볼 점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인간이 어떻게 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나가는데, 이 일체 만물이 어떻게 해서 움죽거리고, 어떻게 해서 서로 사랑을 하고 어떻게 해서 서로 이렇게 모두 눈에 보이지 않게 모두 살고 있나, 하다못해 돌 한 쪽까지도. 인생이 짧은 기간이지만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보고 넘어가야 할 일이 아닐까요?
다섯 가지 문제에 대해서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주인공한테 왜 ‘너’라고 하는가? 내가 ‘너’라고 했다고 말입니다. 또 감사재를 지내라고 했더니 이건 고사 지내는 것과 같은 게 아니냐? 또 이 잘못되는 게 아니냐? 이런 것을 질문해왔고요. 또 부산에서 설법할 때 부처님을, 부산에서는 모두 각각 집집마다 모신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 부처님을 각각 집집마다 모시는 게 어떠하냐고 질문이 들어왔고요, 또 병원에서 버림을 받은 사람들에게 한해서 방편상 내가 먹는 약을 줬습니다.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 한 식구들에게서 버림을 받았을 때에 그 강박감과 허탈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뭘로 채우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와서 급하게 닥치면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부터 종잡아서 가라앉혀놓고 관하게끔 만드는 것이 나의 본분이고 또 그 사람들이 80%는 나을 수 있는 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우리가 그러면 거꾸로 한번 해볼까요.
우리가 한 가정에서도 홍보를 해야 합니다. 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녀들한테나 부모들한테나 형제들한테나 말입니다, 그냥 살다가 갑작스럽게 별안간에 형제가 뭐 몹쓸 병에 걸렸다고 그냥 대번에 와서 하니 그 사람 자체가 그릇이 만들어져야 서로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전깃불을 들어오게 하려 해도 가설을 해놓고 전기가 들어오게 만드는 법인데 하물며 그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데 이것이 제삼자가 와서 얘기한다고 해서 그게 불이 들어오는 것이 가능할까요?
또 한 가지는, 지금 우리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애들이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또는 나쁜 사람이 된다고 그러는데 나쁘게 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부모네가, 50%, 60%는 부모네한테 달렸다고 봅니다. 공부를 안 하는 것도, 취미가 없어지는 것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도 이거 부모가 상식적으로 챙겨줘야 할 문제들을 모두 못 챙겨주고 있는 것을 내가 아주 눈으로 선연하게 봅니다.
첫째는 애들이 공부를 할 때에 너무나 그 강박감이 어깨를 누르고 스트레스가 되고 떨리고 무겁고 이러니까 힘이 빠지고 의욕이 생기질 않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하는 애들도 피로회복제를 한 알씩 꼭 먹여야 되고, 종합비타민 하나씩은 꼭 먹여야 된다 이건 상식입니다. 몸뚱이는 어디까지나 심부름하는 집입니다. 집이 한군데 어디가 허술해지면 기울어집니다. 부인이 남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하고 남편이 부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건 서로 간에 다 그렇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주인공에 맡기고 마음으로써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지, 육신이 먼저 움죽거리면서 마음을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일체 만물이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돼서 통신이 되고 해서 살아나가는 거니까요.
우리가 마음으로 자식이다 부모다 이러는 걸 알기 때문에 가설이 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설이 됐으면 내 주인공에다가 모든 것을 일임하고 부드럽게 말해주고, 부드러운 행동으로써 부드럽게 다독거리고 대화를 해줄 수 있는 그런 부모가 돼야만이 아이들도 안도감을 갖고 진출할 수가 있는 겁니다, 떨리지도 않고 여여하게. 그런 건데 “야! 이….” 어떤 집은 “요놈의 새끼야! 너는 배울 시기에 배우지도 않고 만날 잠만 자고 놀러만 다니고 요놈의 새끼, 밥 바가지 차기 똑 참하다.” 요러고 훌쩍 돌아선다 이겁니다.
그런가 하면 “공부해! 공부해!” 하고선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얘길 해도 열 번 이상 들으면 싫증이 나고요, 아주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어져요.
여러분도 그때를 지내보셨으니깐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층 더 합니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을 자기 그릇에서만 생각할 게 아니라 한번 그 사람 그릇을 좇아가주는 것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하면 자식도 그렇게 따라갈 것이고, 부모가 그렇지 못하면 자식도 그렇지 못하게 따라갈 것입니다. 그게 자식이 아니라 즉, 자깁니다. 즉, 자기예요. 2세, 자기. 그런데 자기가 모자란다고 하면 뒤를 돌아다보고 앞을 내다보고 이끌어야 하는데, 자기는 돌아다보지 않고 그냥 걔 차원에서 그냥 막 내뜨린단 말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일가친척이라도 그렇고 친구라도 그렇고, 사업을 하면 직원이라도 그렇고, 또 공장을 하면 공장 직원이라도 그렇고, 자기가 하는 대로 그 차원에 따라서 모든 것을 이끌어줄 수 있는 이 마음, 한생각을 내는 데 잘 내게끔 이끌어주는 선배가 돼야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게 바로 홍보입니다. 가정으로부터 말입니다.
그렇게 한생각을 잘 내는 게 아주 중요하죠. 어떤 분이 공장을 하는데요, “스님!” “왜 그래요.” “공장에서 자꾸 일이 생깁니다.” “무슨 일이 생기는데?” “직원들이 손가락도 부러지고 손목도 다치고 일이 왜 그런지 이익이 남질 않고 자꾸 그런 데로 돈이 빠지고 도저히 이거를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이렇게 해보지 그래. 그 기계도 말이야, 새로 들여놓은 기계도 그렇고 모두가 한마음으로서 한 주인이 모든 것을 운영을 하는 거라고 한번 진짜로 믿고 생각해 봐.”
그리고 감사재라는 것은 화목재라고 생각하라, 화목재. 초하루나 보름에 떡을 해서는, 떡도 요즘은 맛이 없어요. 모두 먹을 게 많아서요. 그러니까 기증떡, 왜 저 보풀보풀한 거 있죠? 그런 걸로 한 서너 조각 큰 것 해서 그냥 물 한 그릇 떠놓고 향, 초 켜놓고선 그냥 그저 우리가 한마음으로서 기계 하나도 빠짐없이, 하다못해 사람의 마음도 하나도 빠지지 않고 한마음으로서 구성돼서 우리가 모두 제일로 ‘주인이 하는 거니까.’ 하고 감사재를 지내고 화목재를 지내고 화목하게 그 자리에 앉아서 같이 나누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이런다면, 껄죽껄죽했던 마음도 녹아지고 같이 화합이 됨으로써 운영이 잘돼 나갈 수 있단 말입니다, 내 일같이 하니까. 그리고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조금 넉넉히 베풀고 말입니다.
또 그 가운데 돈이 생기면, 없으면 없는 대로 없다는 것을 전부 알게 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조금 해서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을 좀 보태주고 이렇게 해나가 보라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3년이 됐는데 말입니다, 얼마나 많이 불어났는지 모릅니다. 단합이 돼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째서 고사입니까? 화목재지. 이것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의 마음이나 똑같아요. 하다못해 기계에도 생명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사람이나 말하고 그러는 줄 알지만 하다못해 풀포기도 말 안 하는 게 없어요. 그런데 하물며 공장 안에 기계가 돌아가고 그러는데, 또 사람이 출납을 하고 모두 가지각색으로 여러분이 다 분야마다 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때로는 정히 안 된다고 할 때 그런 걸 일러줍니다, 화목재로 지내라고. 그러니까 그 사람네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은 ‘아, 스님이 고사 지내란 말도 없더니 왜 저렇게 고사를 지내래나?’ 하는 겁니다, 이제.
얼마나 여러분이 뚝뚝하고, 얼마나 잔재미가 없고, 얼마나 화목을 도모하지 못하면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게 화목재지 어떻게 해서 고사가 됩니까? 하다못해 거기에다가 뭐 음료수라도 사다놓든지 맥주라도 한 잔 갖다놓고 같이 화합적인 얘기를 나누고 어떡하든지 같이 해보자고, 어떡하든지 같이 해서 같이 먹고 살자고 이렇게 화목하게 해나간다면 어느 누구가 그걸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그럴진댄 아마 귀신의 마음도 그래서 한마음이 돼줄 겁니다.
그러하니 이것은 말을 붙이기에 달려 있는데 붙이기에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해야만 됩니다. 우리가 크게 사업하는 사람이나 또 상업하는 사람이나 여러 사람을 데리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종업원이나 이런 사람들도 다 그렇습니다. 바깥에서만이 그런 게 아니라 안에서 가정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내가 한 해 농사를 잘못 지으면 추수해들일 게 없어요. 그렇듯이 내 자식들의 농사를 잘 지어야 추수를 해들일 게 있죠. 모두가, 여러분도 그렇고.
또 아까 약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마는 병원에서 버림받고 나온 사람들, 이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어린애가 병원에서 버림받은 것은 몸이나 머리나 이만큼씩 하게 모두 나와 있습니다. 그런 것은 속수무책이죠. 그러면 한 가정에, 여러분이 바꿔놓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한 가정에 그러한 사람이 있어서 그냥 식구가 자나 깨나 나가나 들어가나 걱정 근심이 떠나질 않는다면 얼마나 그게 불행한 가정입니까? 그 불행한 가정을 화목한 가정으로다가 즐거운 가정으로다 만들어줄 때에 어떠한 방편으로 해야만 그게 즐거운 가정이 되겠습니까? 나는 가정이 화목하게 될 수 있고, 슬기롭게 넘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면 어떠한 거든지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 그 약은 성한 사람이 먹어도 아무 탈 안 나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주 소박한 겁니다. 하지만 그것 가지고 80%는 병원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다 낫고 있습니다. 왜냐? 마음이, 저 스님이 저거는 특별히 날 줬으니까 ‘특별히 스님이 날 주셨으니까,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주신 거니까 나는 정녕코 나을 수 있다.’ 하는 마음이 생긴단 말입니다. 그 마음이 고치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방편을 안 쓸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대로 우리가 병원에서 버림 안 받은 사람들은 병원에 다니면서 고치게끔 해주고 또 ‘병원에 나는 안 가겠다. 마음 공부를 하면서 내가 이걸 재료로 삼겠다.’ 하는 사람은 그대로 또 밀어주고, 자유를 억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랬던 거지, 내가 무슨 그것을…. 내 속을 알지도 못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즉시 앉아서 고치시도록 하세요.
또 부처님 모시는 거요. 부산에서 질문이 들어왔고 재차 이런 말이 있는데요, 일본에는 부처님을 집에다 모시고도 정열적으로 거기다가 무슨 기도를 하거나 그런 법이 없어요. 왜냐하면 밥 먹을 때 밥을 거기다가 먼저 떠놨다가 그냥 내려다가 먹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한국에서는 그렇질 않습니다. 그냥 모셔놨다 하면 향 초 켜고 그냥 온통 저녁이면 앉아서들 기도를 하느라고 모두 그냥 거기에 매달린단 말입니다. 그럼 뭐가 되느냐 하면 사불(邪佛)이 돼요.
사불이 되면 첫째는 부모가 그렇게 하던 거를 자손들이 안 하면 아예 그냥 좋지 못한 현상이 벌어지게 돼 있죠, 사불이기 때문에. 또 둘째는 그것이 사불이 되기 때문에 그저 이럭하다가 조금만 안 해도 문제가 일어나고 세번째는 내가 항상 거기에 의존을 하고 지냈기 때문에 공덕이라는 건 맛볼래야 볼 수도 없고 자기 깨우친다는 거는 말도 해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구니 소굴을 만드는 거죠. 자기도 마구니가 되고, 또 부처님도 사불을 만드는 거고 세세생생에 이거는 좋은 일이 못 되죠.
그런데 모신다고들 하니 지금 가정에서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며 살기가 얼마나 급급하고 어려운데, 그래서 애들하고 대화할 사이가 없는 집들도 많은데, 하물며 그거를 놓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야만 되겠느냐 이런 말이죠. 이 몸뚱이가, 지금 모든 생명을 살리고 있는 집합소인 이 몸뚱이가 바로 내 부처가 아닐까요. 이 부처님 속의 마음이 ‘일체제불의 마음’ 그 노래 부르시죠? 그 노래 부르시다 보면 마음이 어떠십니까? 그게 그대로 법입니다. 왜 우리는 현명하게 살지를 못할까요? 왜 우리는 부처님께서 ‘너희는 너 먼저 믿고 너 먼저 알고 너 먼저 깨우쳐야 이 세상의 섭리를, 우주의 섭리를 다 알 수 있느니라. 병풍 둘러치듯 한 이 진리를 완벽하게 알 수 있느니라. 그래야만이 너희가 물주머니에서 벗어나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느니라, 세세생생을 그것도. 짧은 한 생을 보내면서 이 도리를 배우느라고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한 생 동안에 이것을 배워서 만약에 익히고 깨달으면 세세생생에 그대로 자유인이니라. 내 고깃덩어리를 믿지 말고 네 마음부터 알아야 내 마음을 네가 둘 아니게 알 수 있느니라.’ 이랬으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두 우리가 이 도리, 정신계의 마음 도리를 배우지 않는다면 마음을 발전시킬 수가 없고 이 버튼을 누를 때는 정신계고, 누르기 전에 이렇게 갖다가 대기 전에는 물질계예요. 그래서 정신계에서 갖다가 누르면 물질계로 (전구를 가리키시며) 나오죠, 이렇게 불이 보이게끔. 그 차이예요, 정신계와 물질계가. 여러분이 집을 짓겠다고 생각하고 설계를 떠가지고야 집이 올라가지 그대로 집이 올라갑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 한생각을, 꿈을 꾸더라도 한생각을 잘 하세요.
옛날에 이성계 얘기 했죠? 꿈 꾼 얘기 말입니다. 꿈이 아무리 나쁘게 생각이 돌아가더라도 ‘허허! 이거는 나를 공부시키느라고, 이렇게 감사할 수가 있나. 아하! 이게 모두 거기서 하는 일이니 잘 되게 잘 돌아가게 할 양으로 이렇게 가르치는구나.’ 하고 이렇게 마음을 돌려서 탁 거기다 놓으면 구정물이 나오다가도 새 물로 바꿔서 나올 거예요, 아마. 이건 그림자 같고 빛보다 더 빠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는 이것저것을 막 바꿀 수 있지만은 물질적으로는 이것저것을 막 바꿀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나오기 전에 바꿔서 나오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여튼 여러분이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우리가 앞으로 남들도 홍보를 해서 이 어려운 문제를 대응할 수 있는 그런 진로를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여러분도 한 분 한 분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어려운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만이 어려운 게 아닙니다. 마음 가난한 사람, 부잔데도 가난한 사람 또 정말 돈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모두 그렇게 하세요. 나도 여러분을 위해서 여북하면 몸을 뒤틀고 못 쓰는 사람 또 단전을 하다가 잘못되어서 가정 파탄이 나고 모두 못 살게 된 사람들을 위해서 한 집이라도 알게 하면 좋은 일인데, 정말이지 이 공부를 여러분이 하면서 얼마나 좋게 사는지 나는 그거 생각만 하면 흐뭇하고 또 내려다보면 ‘아휴, 모두 나 예전에 모를 때 모습이구나. 저렇게 모자라게 사는구나!’ 하고 씁쓸하게 침을 삼키죠.
하여튼 그저 하치못하다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실천에 옮기면서 생활 자체가 그대로 우리가 공부할 수 있는 재료니까, 모든 것은 당신이 있길래 세상이 있고 상대성 원리가 생긴 거니까 모든 것은 당신에게서 나오는 것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고 그래야 입력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면서 새 입력이 들어가면서 새로이 살 길이 생기는 거죠.
부처님께서는 말입니다, 때에 따라 곤충도 됐다 짐승도 됐다가 작부도 됐다가, 남자도 됐다 여자도 됐다, 아이도 됐다가 어른도 됐다 늙은이도 됐다가 별게 다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여여하시고 걸림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름을 부처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도 이름은 이름일 뿐입니다. 이름은 이름일 뿐이에요. 너라고 한들, 부처라고 한들,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들, 지장이라고 한들, 이름은 이름일 뿐인데 내가 그렇게 말해드리는 것은 자기 중심 주는 자기하고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살던 자기이기 때문에, 이것이 밀접하기 때문에, 너라고 하는 게 더 정답고 더 밀접하게 들어가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긍정적인 진실이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너라고 한다고, 왜 이런 게 있죠. 자식이 귀하면 손주가 귀하고 귀엽고 그러면 “어휴, 요놈의 자식.” 그러고서 궁둥이를 쳐주는 수도 있죠. 그게 욕입니까? 그건 욕이 아닙니다. 또 “아! 이 문둥이 같은 놈의 새끼! 왜 이제 왔어?” 하고 그럴 때 그것이 욕입니까? 욕 아닙니다. 이름이 욕일뿐이지 그 속에는 뜨거운 정열이 포함된 이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얼마나 치열하게 믿고 얼마나 밀접하게 만들기 위해서 ‘너만이, 너만이 할 수 있다.’ 하고 이렇게 하라고 했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그게, 그게 못된 이름입니까? 아주 깔보고 그냥 뭉개는 이름입니까?
자기하고 둘이 아닌 그걸 만들기 위해서 그냥 ‘너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 할 때에 문제는 달라지죠. 그거를 알게 되면, 포함해서 알아지게 되면 그때 가서는, 때에 따라서는 참 크나큰, 정열적이고도 크나큰, 뭐 어떻게 갚을 수가 없으리만큼 될 때에, 자기 마음이 스스로서 존경이 되고 스스로서 알게 되고 스스로서 행하게 될 때에 ‘아하! 이것은 부처님이라고 해도 내 몸뚱이 전체가 네 것이지 내 것이 하나도 없구나! 내가 사는 것도 없고 내가 하는 것도 없고, 내가 말하는 것도 없고 내가 보는 것도 없고, 내가 듣는 것도 없구나! 그러니 내가 나라고 할 게 하나도 없구나! 어, 그러니까 당신 거야.’ 이렇게 되겠죠.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4년 11월 20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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