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야” 소리 친다고 입이 타겠느냐
저번 강의가 읽을 만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집데스크는 늘 왜 또 엉뚱한 얘기를 끼워넣어 연재의 흐름을 끊고 수미상관을 다치느냐고 볼이 멥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게 그렇지 않다고, “이것이 곧 금강경이 고구정녕 전하려는 소식”이라고 강변합니다. 여러 독자제현들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오늘은 그 변명의 증거를 하나 대 드릴까 합니다.
“불교란 대체 무엇입니까.” 혜능은 <금강경> 구결 1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佛者, 梵語. 唐言覺也. 覺義有二. 一者外覺, 觀諸法空. 二者內覺, 知心空寂, 不被六塵所染. 外不見人之過惡, 內不被邪迷所惑. 故名曰覺. 覺卽佛也.”
번역하자면 이렇습니다. “불(佛)이란 범어이다. 중국어로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깨달음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세상의 진실을 통찰하는 외각(外覺)과 자기내부의 실제를 통찰하는 내각(內覺)이 그것이다.
외각이란 제법(諸法)이 공(空)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말하고, 내각이란 마음의 실상이 공적(空寂)하다는 것을 아는 것인데, 이 두 깨달음이 육진(六塵)의 오염을 막는다. 무슨 말인가. 그는 더 이상 신체의 감각에 현혹되거나 마음의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밖으로는 사람들의 실수와 악행을 보지 않고, 안으로는 삿된 미혹의 침범을 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고, 그것을 성취한 사람이 바로 붓다이다.”
불교는 무엇을 깨닫는가
깨달음이 어디 하늘에서 갑자기 열리는 것이겠습니까. 혜능은 지나가던 스님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에 마음이 열렸다고 합니다. 그가 그것을 깨닫기 위해 무슨 특별한 준비를 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그의 천성이었지요. 이 마음의 비밀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삶의 또 다른 이면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늘 열려 있는 진실 아닐까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세상이 내가 보는 대로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자기 마음이 “자기 욕망의 투사로 인한 편견으로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 않나요.
그 어렴풋한 진실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꾸어나가자는 것이 불교의 근본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현저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밖으로 사람들의 실수와 악행을 덜 기억하고 곱씹는다(外不見人之過惡)”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 주었는지보다, 이웃과 자연으로부터 받은 신세를 더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불법(佛法)은 습성화된 채권자의 의식을 중지하는 혁명적 에포케(epoche)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간화선의 최종 목적이라는 언필칭 ‘궁극적 깨달음’처럼, 천만 높거나 위태롭지 않고, 아주 낮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숨쉬고 있습니다. 그 원리를 책 속에서 찾을 일이 아니라, 생활 주변에서, 일상의 삶을 통해 실천하는 일이 귀하고 또 귀한 일입니다.
혜능의 <육조단경>은 경전을 외기만 할 뿐, 그것을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증거하려 하지 않는 것을 무엇보다 경계합니다. 그는 이 타성을 부수기 위해 극약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 즉 “책 속에는 길이 없다”는 파천황의 선언입니다. 그는 불교사의 교판까지 이 목적을 위해 변조(?)합니다. 혹시 <단경>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학인이 물었습니다. “소승과 대승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혜능의 돈교가 최상승이라 하는데, 그것과 대승의 차이는 또 무엇입니까.” 우리는 소승이 남방불교에서 성했고, 교단의 규율과 경전의 권위에 보수적이었으며, 개인적 구원을 목표로 하는데 비해, 대승은 북방에서 성했고, 교단의 규율과 교리의 해석에 유연했으며, 개인보다 이웃과 전체를 구원하려는 보살도의 열망에 불탔다는, 그런 교과서적 설명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혜능 보살은 이런 구분을 일거에 우스갯거리로 만들어버리고 이런 설명을 덧붙입니다. “껄, 그렇지 않고 내가 보기에는 이렇다. 경전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이 소승(小乘)이고, 경전에 담긴 이치 한 두 자락을 안 사람이 중승(中乘)이며, 그 통찰에 따라 살겠다는 사람이 대승(大乘)의 사람이다. 그럼 최상승(最上乘)은? 그것은 그렇게 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게 누구이고 어떤 사람입니까. 혜능 스님도 더 이상 묻지 말고 스스로 찾으라 했으니, 우선 입을 다뭅니다.
상징과 비약으로 불법을 말하다
오늘은 <금강경> 오가해의 빛나는 보석인 야부도천(冶父道川)의 찬가(頌) 한 자락을 읽어드릴까 합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가끔 야부도천의 촌철살인의 시를 불각시의 얼음처럼 등 뒤에 넣어드리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혜능은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차근차근 쉽게, 어찌했든 알아듣도록 인내심을 갖고 친절을 베풀지만, 지금 살필 야부도천은 청중들이 알아듣고 말고에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는 당대의 최고 수준들을 향해 시를 읊었습니다.
시는 본시 산문과는 달리 설득보다는 표현을 위해 마련된 형식 아닙니까. 이 점에서도 혜능의 설교적 산문과 야부의 충격적 시가 스트라이킹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1장의 첫대목에 대한 야부의 찬가는 상징과 비약으로 난무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이 현란한 붓끝을 제대로 다 따라잡지 못합니다. 어디 ‘그의 금강경’을 한번 들어보기로 합시다.
1. [如是]. 古人道, 喚作如如, 早是變了也. 且道, 變向甚 處去. . 不得亂走. 畢竟作
生. 道火不曾燒 口.
2. [如]如. 靜夜長天一月孤.
3. [是]是. 水不離波, 波是水. 鏡水塵風不到時, 應現無瑕照天地. 看看.
4. [我]. 淨裸裸, 赤 , 沒可把. 我我. 認得分明成兩箇. 不動纖毫合本然. 知音自有松風和.
5. [聞]. 切忌隨他去. 猿啼嶺上, 鶴 林間, 斷雲風捲, 水激長湍. 最好晩秋霜午夜, 一聲新雁覺天寒.
6. [一] 相隨來也. 一一, 破二成三從此出, 乾坤混沌未分前, 以是一生參學畢.
7. [時]. 如魚飮水, 冷暖自知. 時時. 淸風明月鎭相隨. 桃紅李白薔薇紫. 問著東君自不知.
8. [佛] 無面目說是非漢. 小名悉達, 長號釋迦. 度人無數, 攝伏群邪. 若言他是佛, 自己 成魔. 只把一枝無孔笛, 爲君吹起大平歌.
9. [在]. 客來須看也. 不得放過, 隨後便打. 獨坐一爐香, 金文誦兩行. 可憐車馬客, 門外任他忙.
번호와 꺽쇠는 제가 임의로 붙인 것입니다. 야부노인은 맨 첫머리에 경전의 글자를 놓고, 거기 자기식의 격외의 해설을 던져놓는 방식을 택합니다. 한문에 익숙하지 않겠지만, 이 암호를 그냥 한번 일별하시기 바랍니다. 번역과 해설은 다음 회에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