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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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앉은 자리에서 자기 주처를 똑바로 보라

구속된 삶 속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가족이나 직장, 학교나 종교 같은 관계 속에서 그 틀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울고 웃고 속고 속이는 삶을 끊임없이 살아가야만 합니다. 스님, 꼭 그와 같은 구속되고 구차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만 하는지요? 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나라고 하시는 스님 말씀이 이러한 구속되어진 틀을 벗어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저의 생각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하도 배가 고프고 쓰러질 것 같으니까 어느 집에 가서 문을 두들기면서 구원을 청했답니다. 그랬는데 그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이 어떤 미친 놈이 와서 이러느냐!” 고 그러면서 발길로 차고는 문을 탁 잠그고 들어갔단 말입니다. 그렇게 발길에 차여서 그 사람이 나동그라졌는데, 생각을 해 보세요. 그랬을 때 자기를 발길로 찬 사람을 얼마나 원망을 하겠어요? 근데 그 사람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거예요. 자기가 여기 와서 문을 두들기지 않았더라면 저 사람이 나와서 나를 발길로 찰 일이 없지 않았겠느냐 하고요. 그럼 그 사람이 나쁜 게 아니죠. 바로 자기가 원인인 거예요.
그렇다면 부부지간으로 살아도 그런 건데 어떻게 해서 구속이 되나요? 자기도 모르게 생각을 하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를 태어나게 한 장본인이 누구냐는 얘기죠. 그 장본인이 다 하는 거죠. 그 장본인으로 하여금 내가 형성이 됐으니까 바로 나의 탓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남을 원망할 것도 없고, 왜 내가 발목이 잡혀서 이러나 하는 생각 할 것도 없다 이겁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창살 없는 감옥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안 하면 모든 게 허공과 같은데 말입니다. 이 우주천하가 다, 이 생명체가, 일체 유생 무생이 다 한꺼번에 돌아가는데, 거기에 나도 껴서 같이 돌아가고 있는데 어째서 내가 구속이냐 이거예요. 그건 생각으로서 구속을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구속되게 공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 몸뚱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를 볼 때도 몸뚱이로만 보거든요. 색으로만 본다 이 소립니다. 색으로만 보니까 그렇죠. 그 도리를 아는 사람은 항상 어디고 서로 도와가면서 살지 그렇게 안 살아요. 뭐 편견을 가지고 살지 않아요. 왜 그러냐. 모두가 나 아님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에요. 내 생명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아픔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자리 아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아주 평탄하게 살고 있어요. 항상 얘기하듯이, 물도 나요, 나의 생명이요, 흙도 나의 생명이요, 바람도 나의 생명이요, 공기도 나의 생명이요, 모든 일체 유생 무생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니 어찌 나 아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생각할 때 생각 내는 것도 그 근원지에서 나오는데, 하나의 근원지에서 나오는데 어찌 잘못됐다 잘했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당신은 잘 알면서 남한테 속임을 당합니까?’ 이러시겠죠. 그건 자기가 자기를 속이고 속임을 자기가 당하는 거지, 나를 속이는 게 아니다 이겁니다. 왜? 나는 속임을 받지 않기 때문이죠. ‘저 사람이 나를 속였지. 속일 거지.’ 벌써 앞의 생각에 척 봐서 ‘속일 거지’ 이런 생각을 한다면 나는 여직까지 공부한 게 헛한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걸 나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 속임을 받질 않아요. 그러니까 길을 지나가다 때림을 받았어도 손은 각각이지만 그 손도 바로 내 손이에요. 내가 나를 때린 거란 말입니다. 딴 사람이 나를 때린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아픔을 느끼지 않아요. 오히려 한번 때려 준 것이 감사하죠. 그렇기 때문에 말에 너무 치우치지도 말고, 색에 치우치지도 말고 모든 것을 나로만 생각해라 이겁니다, 각자. 자기 주처를 똑바로 알고 주처에다 모든 거를, 무거운 짐을, 망상을 다 몰락 놔 버려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없이는 하나도 없는 겁니다. 자기가 원인이요, 자기가 화두요, 자기가 근본이기 때문에 그 근본은 둘이 될 수가 없다 이겁니다. 그것을 알면 그 근본 자체도 없는 거다 이거예요. 왜? 나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선 창조라고 그러지만 부처님 법에는 나툼이라고 하죠.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변해 가고 화하고 있고, 육신은 변모돼 가고 있고 그러니 어떤 거를 잡을 게 있나 이겁니다. 그리고 어떤 거를 내세울 게 있나 이겁니다. 일체가 다 공해서 나툼이라 이거죠.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육신도 생리적인 작용의 그림자인데도 불구하고, 이것도 껍데기거늘 거기다가 의지를 하고 그냥, 거기서 나올 줄 알고 그걸 붙들고 쩔쩔매고 10년 20년 썩느냐는 얘깁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치우쳐서 자리를 다투면서 찾아다니는 그런 껍데기들이 많은데, 자기 앉은 자리에서 자기 근본 주처를 똑바로 봐라, 지켜봐라 이겁니다. 좌선한다고 해서 앉아 있기만 해서 좌선이 아닙니다. 서나 앉으나, 자나 깨나, 똥을 누나, 먹으나 입으나 일거일동에 참선이란 말입니다. 시공이 없이 돌아가는 진리다 이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는 거죠.
기독교에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애 쓰는 자 내게로 오라. 모든 짐을 놔 버리고 편히 쉬어라. 또 편히 쉬게 해 주리라.’ 이러죠.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도 ‘몽땅 놔 버려라. 놔 버리면 네가 만들어 놓은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허덕이지 않으리라. 네 마음으로 짓고 네 마음으로 받는 것이니 그 마음조차 질 게 없는 것이니라. 바로 나툼이니라.’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각자 태어났을 때, 그 태어났을 때가 태초예요. 내가 태어나지 않고 태초라는 게 어디 있어요? 삼천 년이고 사천 년이고 오천 년이고 거슬리지 말라 이겁니다. 내가 오늘이라는 걸, 영원한 오늘이라는 걸 알라 이거예요. ‘영원한 나의 생명 주처는 항상 이렇게 여여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물이 흘러감도 아니고 흘러옴도 아니니라.’ 이겁니다. 시발점도 종점도 없이 여여하게 그냥 돌아갈 뿐이죠. 나투고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안다고 내세울 게 뭐 있으며, 말꼬리에 말꼬리가 붙어서 돌아가니 스스로 알고 공부해서 그 도리를 깨달으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데…

성불하지 않고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리고 인간이든 동물이든 우주인이든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는 없습니까? 이렇게 허무하고 지겨운 윤회 놀음을 애초에 왜 만들어 놓고 돌리고 돌려 결국은 다시 자신에 귀의하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뭐 열 마디 말, 백 마디 말 다 밀쳐 놓고 우리 생활하는 자체가 그대로 진리고 그 진리가 부처님 법이고 우리들의 법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어디서 온 거를 알아야 어디로 가는 것도 알 거 아니오? 죽어서 내가 어디로 갈 거 생각도 못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못하고 그냥 죽으면 회향이 어떻게 됩니까. 아무 데나 끌려가서, 아무 영혼들이 그냥 끌고 가는 데로 끌려가서 아무 모습으로나 태어날 테니 그거 어떻게 감당하렵니까.
그러니 이 마음공부 하는 분들은 이다음에 또 다시 태어나면 ‘이런 걸 하겠다’ 하는 그런 거라도 있어야 되겠죠. 우리가 지금 마음의 자각을 하는 데는, 자각을 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겠다는 그런 약조입니다, 그게. 그래 생사를 타파하고 모든 것을 타파하고 자유권을 얻어서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도 수만 수천이 자기가 될 수 있는, 색색가지로 될 수 있는, 지장으로도 화하고 관세음으로도 화하고 칠성으로도 화하고 산신으로도 화하고 해신으로도 화하고, 들신으로도 화하고 조왕신으로도 화하고 어느 거 아니 되는 거 없이 다 될 줄 알아야, 부처님 하나의 마음이 전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그러기 때문에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없으니까 그냥 부처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 무조건 자신의 근본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뭘 믿느냐. 자기 자불을 믿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무조건 믿으면서 어떤 사람이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감사히 생각하고, 또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어도 둘이 아니게 생각하고 모두 측은하게 보고 불쌍하게 보고 자기 생명으로 보고 자기 모습으로 보고, 이렇게 해서 사랑을 베풀면서 우리가 해 나갈 줄 알아야 우리가 요다음에 태어날 때도 그렇게 태어나죠. 이 세상에 다시 모르고 태어나지 않고 알게 태어나서 모르는 사람을 건져 줄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생기고 그런 능력이 생겨서 한생각이면 다 건질 수 있게끔 되죠.
또 우리가 이 모습을 가지고 남을 구제하고 산다고 하는 것도 보살의 한 등 이차적인 문제죠. 또 삼차 중생으로서 아주 이런 걸 모르고 그냥 편안하게 사느냐, 남한테 악한 짓 안 하고 사느냐. 중생으로서의 그냥 삶을 산다는 것 이런 것이 삼차적으로 있겠죠. 근데 우리가 삼차적으로 사는 거는 좋은데 삼차적으로 살다가 보면 악한 것도 있고 선한 것도 있고 다시 선하게 살아도 악한 것이 거기에 또 끼어들어서 선한 것도 악하게 될 수가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길을 찾을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완전히 벗어났다 이런다면 우리의 몸과 같이 이렇게 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다니다가도, 얼른 쉽게 말해서 구제할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보기 좋게 그냥 화해서 건져 주고, 그리고 가다가 없어지면 또 고만입니다. 그러니까 이 혹성이고 저 혹성이고 따로 없죠. 그러니 만법을 공법으로서 그냥 이룩하느냐, 그냥 요것조것 따져서 놓느냐. 그러면 이 육신을 벗어나지 못하죠. 그럼으로써 정말 보살의 행적이란 여러분이 볼 수도 없거니와 몸을 가지고 이렇게 태어나서 본다 하더라도 그게 뭘 하는지 그것도 모를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니깐 여러분은 한 찰나에, 24시간 일했다고 그러는데 일한 게 아니라 한 찰나에 그런 보살이 있다면 벌써 딴 혹성에도 한 찰나에 오고 갈 수가 있는 거죠. 그러니깐 그걸 잘났다 못났다 얘기를 할 필요가 없죠.
그리고 여러분은 항상 ‘내가 즐거우면 다 즐겁게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사세요. 모두가 평등하게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해요. 살려면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고 남을 섭섭하게 하지 말고, 즉 말하자면 업신여기지도 말고 자기가 못났으면 자기가 못난 대로 똑같이 생각하라 이겁니다. 그러면 쉬울 거 아니에요. ‘나와 같이 이렇게 못났구나.’ 하고 말입니다. ‘전자에 못났을 때 나하고 똑같구나.’ 하고 이렇게 생각하면 아예 남을 얕보지도 않아지잖아요. 사실이 그러니까요. 알고 보면 기어다니는 벌레도 그게 벌레로만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사람도 사람으로만 생겨나는 게 아니거든요. 또는 이 집에서 살다가 저 집으로 가서 태어나고 저 집에 갔다 이 집으로 태어나고, 저 집에 갔다 저 딴 나라에 가서 태어나기도 하고 이러거든요.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에요, 모두가. 그래서 한번 생각을 잘하면 한 우물 안을 아주 깨끗이 정수를 만든다 이런 말이죠. 그러니까 그저 살기가 좀 어렵고 피곤하더라도 그렇게 잘 사세요.
식구들한테 욕하지 마시고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각자 잘하든 못하든 내 탓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하면 또 살기에도 편리하지만 요담에 재생이 될 때 참 갸륵하게 태어나실 거예요. 한 번 더 태어나서 공부 열심히 하신다면 그때 태어나지 않고도 이 세상을, 아니 우주 전체를 한 찰나에 돌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후의 문제에 대해서

제가 이 몸을 벗어 버리고 인간의 몸을 받지 못한다거나 인간의 몸을 받았다 하더라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온전한 상태가 아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많이 올라옵니다. 스님, 사후의 세계와 영적인 문제를 어떻게 대비를 하고 알아야 하는지요.


지금 현재 살아서도 영적 관계라는 것은 살아나가면서 습을 가지고 우리가 고정되게 나가기만 하면 그것은 걸려요. 그냥 거기서 차원이 멈춰 버린다니까요. 그러니까 이 진리가 멈춰 버리지 않고 찰나찰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면 그것을 거기에다가, 거기서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생각나고 행하고 말하고 했던 것을 다시 놓을 때는 걸리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사후의 문제라는 건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가 지금 현재에 알면 사후에도 그렇게, 즉 말하자면 눈멀고 귀머거리고 그렇지를 않으니까요. 현재에 알면 바로 미래에도 알 수 있는 거고, 만약에 어저께 모른 것이라면 오늘도 모를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후 일이라는 것은 오늘을 겸했다는 얘깁니다. 과거 일이 현재로 겸했기 때문에 미래도 그러하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억겁을 거쳐 오면서 억겁을 거쳐 온 것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 많은 억겁이 그렇게 쌓여 있는 게 아니고 많이 거쳐 오면서 축소됐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콩나무 얘기를 자주 하지만, 콩나무는 콩나무대로만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콩나무도 생명이 있고 마음이 있다면 ‘콩나무로 되기 싫다. 콩나무에서 좀더 화해서 다른 모습으로 돼 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콩나무라는 그 범위 내에서 벗어난 겁니다. 콩씨에서 벗어난 거죠. 우리도 인간에서 벗어난다면, 바로 ‘자신’으로서 벗어난다면 중생을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후나 또는 과거의 업보나 그런 것이 없다는 얘깁니다. 없는데 사람의 마음으로 지어서 그렇게 자꾸 만들어 놓는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자유스럽기 때문에 끄달리지 않는다는 문제죠. 그런데 만약에 이 도리를 모른다면 반드시 엊그저께 과거에 나를, 만약에 우리 부모들을 죽였다든가 또는 우리 집에 와서 도둑질을 해 갔다든가 또는 내가 어느 회사에 다니는데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우리 가족이 전부 죽는 게 됐다 이랬을 때 그 증오심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누적돼서 사후의 일로 벌어져요.
현실에도 너로 인해서 내가 망했다든가 너로 인해서 내 가족의 밥줄이 끊어졌다든가, 누가 내 돈을 떼어먹고 어디 가서 사는데 그 식구가 십 년이 되든 몇 년이 되든 고초를 받고 지낸다든가 이렇게 해서 얼크러진 이 문제를, 즉 말하자면 고정되게 내가 증오하고 있거나 그런다면 그것이 인제 사후 일로 벌어집니다. 현재에 내가 또 갚을 수도 있고요. 그놈을 징역을 시키지 않는다면 내가 그냥 물씬 아주 반쯤 죽여 놓고 저 죽고 나 죽는다 이렇게 또 벌어지는 수도 있고요. 그래 그렇게 벌어져서 만약에 물씬 두들겨 주고 맞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대로 거기서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자기도 고통스럽고 그 사람도 고통스럽게 되고 그걸로 인해서 네가 앙갚음했으니까 나도 앙갚음하겠다는 생각으로서 앙심을 품게 된다면, 그네 대의 가정, 즉 말하자면 자식들이나 거기에 딸린 모든 식구들이 원한을 품게 됩니다. 그러면 그 한 사람 때문에 몇 사람이 업보를 짓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받고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받고 얼크러지고 설크러지고 이런 것이 사후에 돌아오는 거죠. 현재에도 돌아올 뿐 아니라 사후에도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떠한 문제로 인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라의 국록을 먹는 사람인데, 어떤 사람이 말 한마디 임금 앞에서 잘못 해 가지고는 밥줄이 끊어졌다는 얘기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에 밥줄이 끊어진 거보다도 양반으로서의, 옛날에는 그런 것을 중시했죠. 무슨 낯으로 조상을 만나 뵐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서 아주 그 집을 증오하고 이렇게 했는데, 어느 날은 그 아들이 말입니다, 원수를 갚는다고 그러면서, 하도 아버지가 방에서 나오시지를 않고 고통스러워하고 그러니깐 그냥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그 집에 들어가서 죽였지 않습니까. 그러니 또 그 집에서 원수를 갚는다고 하다가 그만 미수에 그치고 말았는데, 그 뒤에 방에만 계시던 아버지가 마음으로 무척 닦으셨던 모양입니다. 그 후에 머리가 허옇게 다 돼 가지고서는 하시는 말씀이 “얘야. 네가 그렇게 한 까닭에 원수는 원수대로 갚지도 못하고, 그게 갚아서 갚아지는 일이 아니니라. 그렇게 네가 했기 때문에, 요다음에 삼 대를 내려가서 손자로 태어나는 내 손자가 그렇게 또 죽게 됐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하면 면하겠습니까.” 하니까 그걸 풀려면 이제 앞으로 그러한 일은 말고 그 집에 가서 매일같이 아침 문안을 드리면서 전자에 그런 모든 것을 그저 잘못했노라고, 항상 하루 한 번씩 가서 사과를 하되 백 일을 하라고 그러더랍니다. 백 일을 해야 그것이 녹는다고 하더랍니다. 그 사람 마음이 녹아야 그게 업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래 마음이 중요한 겁니다.
그런 얘기도 있지 않습니까. 9대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9대조에서 손자가 그러한 문제로 인해서 죽을 테니까 이 함을 끄르지 말고 9대조 며느리한테 전달해 달라고요. 거기 다 써 있을 테니까 그것을 꼭, 만약에 살인으로 몰려서 죽게 되걸랑 이 함을 그 고을 원한테 갖다가 주되 이 봉한 것을 끄르지 말고 갖다 바쳐라. 그러면 살 길이 생긴다.” 했더랍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돌고 도는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 지금 살아나가는 것도 고정된 관념으로서의 생각도 고정된 행도 고정되게 보는 것도 듣는 것도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찰나찰나 우리는 사는 거지 고정되게 그냥 뭐, 백 년을 살았다 하더라도 백 년 산 게 없습니다. 여직껏 걸어다니셨다 할지라도 걸어 다닌 그 자취가 남아 있습니까?
우리 살림살이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짓는 것, 그것은 자기를 리드해 가지고 가는 자연 컴퓨터가 있습니다. 잠재의식이죠. 그 잠재해 있던 자체가 바로, 자기 한 것을 일기장에 써 놓듯이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하나하나 돌아가면서 받게 돼 있거든요. 잘했으면 잘한 대로 못했으면 못한 대로요. 그러니 사후를 우리가 지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죠.


숨 쉬게 하는 놈에 대해서

스님께서는 보고 듣고 말하고 살아가게 하는 자가 바로 주인공이니 그 놈을 항상 지켜보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본다 듣는다 말한다 살아간다 하는 것은 나의 의식적인 작용이 동반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잠을 자거나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순간에도 끊임없이 숨 쉬게 하고 맥박을 뛰게 하는 이놈의 의미는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우리 지금 한 몸뚱이가 살아나가는 것도 생명과 마음내는 거와 육신의 삼합이 한데 합쳐져서 지금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돌아가고 있는 거는 우리가 지금 움죽거리고 살고 있는 게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돌아가는 것이 숨 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숨 쉬는 것이 자도 숨을 쉬고 깨서 다닐 때도 숨을 쉬지 않습니까.
숨 쉬는 것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죠. 그러면 이렇게 살면서 자면서도 깨서도 언제나 숨 안 쉬어 본 일이 없는데 그게 참선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진리고.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잠시잠깐 자고 깨는 것뿐이에요. 항상 숨은 쉬고 있습니다. 우주의 그 모든 일체 만물과 더불어 만생이 그냥 호흡을 같이 하면서 돌아갑니다. 잠잔다고 해서 숨 안 쉬고 자는 분 보셨습니까. 그렇게 끊어트리지 않고 끊어지지 않는 숨 쉼과 마찬가지로 진리가 그렇게 끊어지지 않고 돌아가거든요. 항시도 끊어지지 않는 그 숨 쉬게 하는 그놈이 바로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근원으로 하여금 내가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것이 쉬지 않고 돌아가니까, 우리 생활이 바로 이렇게 움죽거리게 되고 말을 하게 되고 이러니까 모두가 포함해서 원형을 이룬다 이겁니다. 그러면 과거도 원형 속에 있는 거고, 미래도 바로 원형 속에 있는 겁니다. 공 속에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과거 미래 현재가 바로 이 공 속에, 현재 우리가 생각하기에 달렸다 이겁니다.
생각을 크게 넓게 걸리지 않게 한다면, 모든 것은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다 다시 놓자. 믿고 놓자. 그리고 물러서지 말자. 마음이 물러서지 않는다면 공한 진리에 모든 탐욕과 창살 없는 감옥과 모든 애착이 몽땅 끊어지게 돼 있습니다. 끄달리지 않게 되자 나는 훨훨 마음의 창살을 벗어나는 겁니다. 벗어나게 되면 그때는 우주의 섭리와 인간의 살림살이에 적합하게, 모든 게 공해서 돌아가는 거를 진실로 알게 되고 내 한생각이라면 그냥 ‘저 사람을 구해 줘야지.’ 하는 생각이 문득 납니다. 그것 생각난 것도 거기서 생각난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몽땅 들리는 겁니다, 몽땅. 그 힘이. 그렇기 때문에 다양하게, 내가 아픈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을 했다면 그대로 보이지 않는 약이 그리로 갈 것이고, 또 가난해서 불쌍해서 생각을 해 줬다면 바로 보이지 않는 데서 바로 그 가난을, 그 업보를 면해 주니까, 그게 없어지니까 바로 가난함을 없애죠. 그러니까 그게 보이지 않는 데서 마음으로 하는 무주상 보시인 것입니다. 마음으로 한생각 냈기 때문에 한생각이 거기에 융합이 되고 통틀어 그 힘이 한데 가하게 되자 그건 들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 말로만 이렇게 할 게 아니라 실험을 통해서 여러분이 생활하시면서 실험을 통해서 지켜보세요. 실험해 보시고 체험하고 지켜보고 또 한번 바퀴에, 차 운전을 배웠는데 만약에 양면에 심봉이 끼어 있지 않았으면 차를 끌고 갈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차 운전을 배웠어도 한번 해 보고, 내가 실천을 해 보고 또 경험하고 체험하고 이러면서 자기의 마음을 크게 만들고 자꾸 해 봐야, 경험이 돼야 자기가 늠름해지고 그것을 잡아도 떨리지 않지, 그걸 안 해 보면 떨리고 안 해 보면 영 안 해집니다. 겁나서 못해요. 그러니까 항상 숙달이 돼야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이렇게 숨 쉬는 게 바로 그냥 그대로 내가 항상 참선하고 있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숨이 끊어진 사이는 없으니까 숨 쉬고 있는 것이 진리요, 길이요, 바로 부처님 법인 것이죠. 이 몸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숨은 쉬고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지금 그걸 비유한 건데 숨 쉬는 건 하나도 끊어지지 않는데 잠을 자도 그냥 몸만 자고 잠깐 자고 일어나는 거 같은 거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근본은 그대로 영원히 살아 있는데 몸만 없어졌다가 다시 모습을 갈아 가지고 다시 나올 뿐이지 죽고 사는 것은 없다. 본래 살아났다고 하는 게 없기 때문에 본래 죽을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때에 따라서는 생활하는 데서 자기가 차를 타고 오고 가고,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장사를 하든지 어쩌든지 자기가 한번 지켜보는 그런 사람이 돼 줬으면 좋겠어요. 자기 분야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런다면 상대도 좋고 나도 좋고, 나는 체험을 하게 되는 거죠. 만약에 그것을 나쁘게 체험을 하려도 나쁘게 되지 않고, 좋게 체험을 하려도 좋은 것이고, 그러니까 결국은 부처님법이라는 게 그렇게 묘한 것입니다.
200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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