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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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부10강 로마의 노예 현자 에픽테토스의 불교 강의
미국의 어느 경영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채무자와 채권자의 차이를 아는 사람?” 각양 각색의 답이 쏟아졌습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채권자이고, 돈을 빌려간 사람이 채무자라는 교과서적 답안에서부터, “돈이란 본시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 것”이라는 한국학생의 금언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교수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채권자가 채무자보다 기억력이 좋다는 거지!”

수양산의 그늘
이번 추석에 시골 바닷가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사촌 장형은 수협의 조합장을 오래 지낸 후, 지금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횟집을 차려 노후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집안의 장손으로 물려받은 재산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그야말로 맨 주먹 하나로 일어선 사람으로 저는, 방학때마다 사람을 만나고 일을 처리하는 그 생생한 노하우를 듣다가 밤이 깊어가는 줄을 모르고 듣던 기억이 여직 생생합니다.
제가 한번 사고를 친 적도 있습니다. 대학 초년, 집 앞에 대놓은 남의 오토바이를 분유따개(?)로 시동을 걸고, 기어도 제대로 넣을 줄 모르면서 운전을 했는데, 글쎄 어느새 보니 파출소 앞에서 푸득 덜컹거리고 있었습니다. 순경이 놀라 면허를 보자고 했고, 나는 불퉁스럽게 뻗댔습니다. “아니, 이 시골바닥에서 누가 면허 따서 오토바이 끌고 다녀요?”
파출소 안으로 끌려들어간 나는 묻는 말에 대답도 않고,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고 신문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화가 뻗친 순경은 나를 경찰서로 송치하겠다고 전화통을 붙들었는데, 그때 형이 배트맨처럼 달려와 저를 유치장행에서 빼내 주었습니다.
저는 늘 그 형이 있어 든든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힘과 위로를 어찌 말로 하겠습니까. 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아래 동생들, 사촌들, 먼 친척들까지 그 수양산 그늘 아래 더위를 피하고, 지친 다리를 쉬었을 것입니다. 다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거기 가서 하소연하고 도움을 구했으니까요. 집안의 대소사는 늘 장형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내려가니 분위기가 좀 달라져 있었습니다. 장형은 공직을 놓고 벌써 칠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고, 한번 큰 수술을 겪기도 해서 예전의 풍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기세는 여전했는데, 동생 친척들이 예전처럼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했습니다. 집안 일 하나를 아직 금전적으로 다 못 처리한 일이 있는데, 그것을 급하지도 않은데 대놓고 독촉하더란 것이었습니다.

돈이 아니라 존중이 문제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 그게 어디 돈문제이겠습니까. 저는 떠나 살고 있지만 가끔 차례나 제사로 형제 친척들이 모일 때, 형님은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제사의 차례나 절차같은 사소한 일에도 고집을 양보하는 법이 없고, 정치적 문제나 사회적 이슈에 대해 동생들의 의견은 대놓고 무시하는 편입니다. 형님 눈에는 아직 물정 모르는 철부지들로 보일지 모르지만, 또 아직 세상을 형님처럼 부대껴 보지 않은 숙맥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들 어엿하게 가정을 이루고 사업을 하고 자신의 견해를 일구어 가진 어른들입니다. 형님이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았던 탓에,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자 형님은 자신의 채권을 주장했습니다. “그게 뭐 큰일 대수라고 그래... 그동안 내가 저들한테 해 준 것이 얼만데...” 놀라운 기억력이었습니다. 언제 어떤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를 둘러싼 정황이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누굴 만났으며, 그때 무슨 말이 오갔는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떻게 수습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소상히 세세한 수치까지 들려주었습니다. 잠깐 들렀다 몇 군데 들러가려던 계획이 장형 이야기에 또 두 시간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장형은 하소연 끝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나나 저들 형수가 제사 모신 것만도 40년이야. 어디 내 조상만이냐. 그 비용만 해도 집을 사고 남았을 거다. 그리고 그 땅 내가 아니었으면 진즉 수용되어 흔적없이 사라졌을 것인데… 그 프리미엄도 인정 안 해준단 말이냐.” 나는 웃으며, 앞의 그 채권자와 채무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중 만난 여러 형님들도 할 말이 많았습니다. 그 많은 선거를 치르면서 밤잠을 자지 않고 사람들 만나고 다니고, 또 막걸리 잔에 주머니 턴 것이 수월찮은데, 고맙다 수고했다는 소리도 변변히 들어보지 못하고 살았다는 푸념부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런 저런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설사 그렇다고 해도, 장형이 은퇴하고 지금 사정이 어려운 형편에, 그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너무 하지 않으냐”고 말해 주었습니다.

엔키리디온의 불교적 잠언
서로 엇갈리는 이 계산법(相)을 어떻게 풀어야할까요.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장부에는 적혀 있지 않은 숫자들의 대차대조표입니다. 이 참에 말인데, 기억하십시오.
장부에 있는 액수도 잘 관리해야 하지만,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숫자로 적혀 있자 않은 장부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관리해야 합니다.
장부에 아무 숫자도 적혀 있지 않은데, 각자 자기 눈에는 차변의 채권란에 글자들이 떠올라 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적혀 있지 않은 대변의 채무란에 부채가 수두룩 빽빽하다는 것을… 그것을 읽는 눈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자면 다들 앞만 바라보지 말고 뒤를 돌아볼 일입니다. 우리가 그 존재로 하여 받은 혜택들, 하늘과 바람과 물뿐만 아니라, 거기 있어서 힘과 위로가 되었던 사람과 사건들을 떠올리고 재삼 기억하는 연습을 해 봅시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천둥 속의 먹구름이 울고, 버스의 기사가 온 몸의 근육과 시선을 집중하여 자신을 소모한다는 것을 가끔은 떠올려 봅시다.
형님들, 한 때는 한 자리에 둘러앉아 바가지에 담긴 보리밥을 나누어먹었고, 쌕쌕이 비행기 총탄소리에 형의 손에 이끌려 물 속으로 숨었으며, 대학에 합격한 막내 동생을 위해 반지 목걸이를 팔자고 내놓던 형제들이 아닙니까.
로마의 노예 현자 에픽테토스가 우리 집안에 있을 분란의 조짐을 미리 알고 있었나 봅니다. 그의 어록 <엔키리디온>에는 이런 잠언이 실려 있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한쪽으로 보면 해결되지 않는 것이 다른 쪽을 보면 쉽게 해결됩니다. 예를 들어 형이 그대에게 부당한 짓을 했다고 합시다. 형의 부당한 행동에만 집착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때는 다른 면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즉, 그가 나와 피를 나누고 함께 자란 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일은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세상사 생각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화해는 사물의 뒷면을 보면서 시작되고, 지혜는 그도 저도 분별(分別)하지 않는데서 자랍니다. 그러니 장부의 채무란도 좀 보고 삽시다. 제일 좋은 일은 장부를 들여다 보지 않는 것입니다마는…
(참, 아는 척을 하자면 불교는 앞의 관용의 정신을 의타기성, 그리고 나중의 그 위대한 방임을 원성실성이라고 부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200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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