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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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보화 선사의 사문유관
영국이나 일본같은 나라들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군주’를 현재의 민주국가체제 속에서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구조를 보면서 그 나라의 역사적 정통성을 지켜가려는 국민적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대중부가 아무리 상좌부를 보고서 ‘소승’이라며 폄하해도 그 정통성의 우위는 부정될 수가 없다. 선종은 전등법계를 통하여 부처님으로부터 전해오는 법맥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공안 역시 교리사적 정통성을 담보하고 있다면 그 생명력은 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흔히 괴각으로 알려져 있는 보화(普化 ?~861) 선사의 ‘전신탈거(全身脫去)’ 공안을 보면서 부처님의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을 떠올렸다.
싯달타 태자시절에 카필라성의 동서남북 사문으로 나가면서 늙은 이, 병든 이, 죽은 이를 보고 마지막 북문에서 환한 표정과 당당한 걸음걸이의 수행자를 발견하고서 출가할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 그 줄거리다.
그 사문(四門)의 가르침은 보화 선사에게 그대로 이어져 한 차원 더 승화된다.
보화 선사가 어느 날 길거리에 나가 보는 사람마다 장삼을 해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심깊은 단월(절이나 스님에게 재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옷을 해줄 때마다 거절을 했다.
임제 선사가 그 의미를 눈치 채고서 원주를 시켜서 나무장삼 즉 관을 사오도록 하고는 보화 선사를 불렀다.
“내 그대를 위하여 나무 장삼을 마련해 두었네.”
그러자 보화 선사는 그것을 짊어지고 나가서 온 거리를 돌면서 외쳐댔다.
“임제 선사가 장삼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이제 동문으로 가서 열반하리라.”
성 안의 사람들이 따라가니 선사가 말했다.
“오늘은 가지 않겠다. 내일 남문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리라. ”
남문에서도 죽지않고, 또 그다음 날은 서문으로, 사흘을 이렇게 하니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후론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마지막 날 북문에서 혼자 성밖으로 나갔다. 관 속으로 들어가 길가는 행인에게 뚜껑에 못을 쳐주도록 부탁하였다. 이 진기한 사건은 삽시간에 말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얼마 후 누군가가 관을 열어보니 몸은 이미 빠져나가 버렸고 공중에서는 요령소리만이 은은하게 울릴 뿐이었다.
보화 선사가 동문을 나설 때 뒤따르는 사람들은 자기의 늙어감을 발견했어야 했다. 남문에서는 자기의 병들어감을, 서문에서는 자기가 죽어감을 알아차려야 했다. 그것도 모르고 남의 생로병사만 구경삼아 뒤쫓아 다니고 있으니 보화 선사는 맨 처음 나간 동문에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다.
목숨을 걸고서 가르쳤는데도 그걸 알아듣지 못하는 중생들의 눈 어두움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이 가르침은 ‘조주사문(趙州四門)’ 공안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조주 선사(778~897)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다. “어떤 것이 조주입니까?”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이니라.”
동문에서 서남북문을 모두 볼 수 있을 때, 또 서문에서 동남북문을 다 볼 수 있을 때, 그 동문 그리고 서문은 모두 무문(無門)이 된다. 남문 북문도 마찬가지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두 꼭 먹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문(四門)은 알고 보면 모두 무문(無門)인 것이다. 태어남 속에 이미 죽음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도리이기도 하다.
‘환란(換亂)시대’의 ‘공삼 선사’는 늘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외쳤고 또 이 말을 즐겨 휘호로 썼다. 이 이치를 정치적으로만 해석한 정통성과 안목 없는 나름대로의 견해였나 보다.
■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200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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