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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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 공덕 있느니라!
자식을 진짜로 사랑한다면 정신력을 길러줘야

제사를 지내는 까닭?


사람이 죽으면 살았을 때의 업식에 따라 차원과 갈 곳이 정해진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과의 도리를 믿는 불자로서 이미 갈 곳이 정해진 영혼에게 천도재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것도 인과법에 대한 역행이 아닐까요? 그리고 지금 같이 바쁜 시대에 너무 번잡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사는 반드시 지내야 되겠죠. 그런데 음식을 많이 차려 놓고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 된 도리를, 교훈과 은혜를 잊지 말아라 이거죠. 나는 그래서 재 지내는 신도님들더러 그렇게 음식을 하느라고 돈이 많이 드네 뭐 어쩌네 하고 찡찡거리고 ‘애들을 데리고 이걸 어떻게 차리나 뭐 어쩌나.’ 이렇게 성가시게 마음을 쓰지 마라. 그것은 조상님들도 싫어하시니 웃는 낯으로, 좋은 마음으로 아주 편리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도재를 지내는 것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부모님을 천도시키는데 부모가 전자에 살면서 그 의식과 관습을 그대로 가지고 갔기 때문에 세세생생에 끄달리는 거죠. 그런다면 그게 왜 끄달리느냐? 내 몸이 죽은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자기가 잘못해서 어떻게 됐다는 것도 모르고, 아주 캄캄합니다. 눈이 뜨이지도 못하고 귀가 뜨이질 못해서, 그 의식만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첫째, 내 몸속에 있는 인과로부터, 수없이 천차만별로 나오는 거기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두번째는 벌써 내 모습과 모든 것이 그전에 살아 있을 때처럼 있는 줄 알고 강을 못 건너갑니다. 예를 들어서 유(有)의 세계에서 무(無)의 세계로 건너가야 할 텐데 건너가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빠져 죽을까 봐, 체가 있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빠져 죽을까 봐 못 건너갑니다. 셋째, 불바퀴가 돌아가는데, 그 불바퀴 속을 넘어서야만 우리가 해방되는데, 그 불바퀴 속을 넘어서질 못하는 이유는 내 몸이 있는 줄 알고 타 버릴까 봐 못 들어가는 겁니다. 못 넘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의식이, 관습이 남아서 돌아가니까 강 주변에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죠. 예를 들어서 저 언덕을 넘어서야 할 텐데 넘어서지 못하고 그냥 배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천 년이 가도 그만이요 만 년이 가도 그만이다 이겁니다. 한생각이면 건너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거를 생시에 몰랐기 때문에 죽어서도 그렇게 모른단 얘깁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줄 알고 친척이나 아들이나 딸한테로 맴을 도는 거죠, 넘어가질 못하니까. 맴을 돌면서 자기는 산 것처럼 말을 하는데, 이쪽에서는 알아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니까 ‘왜 내가 말하는 거 듣지도 않고 나를 그렇게 무시하고 그러느냐?’ 이렇게 하면서 탓을 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먹을 것도 저희들만 먹고 나는 안 주는구나.’ 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니까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거지 부모가 자식을 해코지 한다 이런 게 없습니다. 부모 자식도, 사는 동안에 부모 자식이지 자식도 없고 부모도 없습니다. 왜냐. 죽으면 사대(四大)는 흩어지고 마음은 저 구름이,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서 이 도리를 알아야 사대가 무너지면 훨훨 그냥 여여할 텐데, 살아서 여여해야 죽어도 여여한데 그렇지 못하고선 그냥 발버둥일 치고 분기가 나고 그냥 여기 붙어서 분기가 나게 하고 저기 붙어서 분기가 나게 하고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또 하나는 자기 조상입니다. 자기가 과거에 살던 조상, 그것이 바로 영원한 자기 생명의 근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영혼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근본은 불성을 말하지만, 영혼이라는 것은 자기가 살던 습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천도를 시키면 활짝 문을 열어 주게 됩니다. 그런데 참 묘한 게 있죠. 스님마다 다르다는 얘깁니다. 천지를 다 간파하고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다 간파해서 정말 콧구멍 없는 소가 작용을 할 수 있는, 또 콧구멍 있는 소가 작용을 할 수 있는 그러한 모든 작용의 에너지가 광력을 이루듯이 그렇게만 된다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고 모두 이렇게만 산단 말입니다.
그런데 천도를 하게 되면 벌써 자기까지도 포함해서 들어갑니다. 산 사람 영혼까지도 포함해서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벌써, 자기가 천도를 하면 좀더 마음이 완화되고 자기가 지금 모든 걸 맡기고 돌아가니까 조상들의 마음도 한마음으로 맡기고 돌아가게 되는 거죠. 돌아가게 되는 그 마음이 활짝 열리니까 영가들도 마음속에 들어가 본다, 안 들어가 본다가 없이 탁 거기에 안치가 되니까 전부 알겠거든요. 아니까 그때서야 편안한 감을 가지고, 거기서 굴려 나가서 천도가 돼도 거기서 미리 알고 나갔기 때문에 아예 그냥 무와 유의 세상을 잘 알고 천도가 되는 거죠.
이렇게 해서 스님들이 염불할 때도 영가들은 상에 차려 놓은 것만 압니다. 왜냐? 스님네들이 이것을 이렇게 사다가 차려 놨다 하는 것를 알고 있기 때문에 영가들도 그것만 알고 갑니다. 그러나 천도를 시키는 스님이, 우주 전체를 섭렵하고 타파하여 탁 열고 할 때는 전부 이 세상의 모둠이 떡을 하나로 먹고선 천도가 되니까 이 세상에 나올 때 모두 먹여 살릴 수 있는 그런 장관이 되든가, 마음으로서 수천수만을 거느리고서 회사를 경영을 한다든가, 또는 자기 나라의 대통령이 된다든가, 딴 나라의 대통령이 된다든가 하는 결과가 거기에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상대성 원리의 작용이라는 것이 인연줄에 따라서 나쁘게 악으로 가느냐, 인연줄에 따라서 선으로 가느냐, 양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도시키는 스님네들도 이 도리를 알고, 지내는 사람도 이 도리를 알고 해야만이 삼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공덕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말이지 그런 마음으로 천도를 하신다면 세상에 묵은 빚을 갚을 수 있고 햇빛을 줄 수 있고, 너무나 자기를 밝게 볼 수 있고 밝게 뛸 수 있고 자유스럽게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공덕입니까!

왜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요.


올해 대학 시험을 치러야 하는 학생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을 때, 미생물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을 때 아무것도 없는 그런 상태로 그대로 있었으면 좋았을 건데, 왜 사람까지 진화를 해서 병도 들어야 되고 학교 가서 공부도 해야 되고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되는지 그게 알고 싶습니다.

그것도 생각을 가만히 해 보세요. 바람이 있고 흙먼지가 있고 물이 있고, 이건 스스로 자생으로서 그냥 생긴 거죠. 자연의 원리이면서 자연의 이치예요. 그렇게 생겨서 우리가 모아지고 모아지고 하다 보니깐 원기가 생긴 거죠. 그래서 생명체가 생기는 거죠. 그렇게 이날까지 진화돼서 이렇게 인간으로 제일 나중에 됐다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제일 나중에 돼서 살아가면서, 또 살다 보니깐 진화도 되고, 살다 보니깐 물리도 터지고, 살다 보니깐 모든 게 터져서, 지금 보세요. 얼마나 의학이나 과학이나 많이 방대해졌는지.
그러나 우리가 최초에 내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모른다면 모두가 아주 귀한 과학자가 됐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학자가 아니죠. 남의 생명을 우습게 생각하고 남의 일을 모두 우습게 생각하고 깔보는 유가 많고 아상과 아만이 많아서 돌아보질 못해요. 지금 왜 스님은 이 말을 하시나 이러겠지만,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왜 사람으로 태어났느냐. 이것은 많은 고초를 겪어 온, 곤충으로부터 이렇게 인간까지 올라오면서 수만 년, 아니 헤아릴 수도 없는 그 세월을 이렇게 오면서 우리가 그 숫자가 없이 얼마나 많은 광년을 거쳐 왔나. 숫자가 없겠지만, 숫자가 지금도 없이 가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곤충이 너무 성하고 악이 너무 독이 많으면 그냥 멸하게 하거든요. 어떻게 돌아가든지 죽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 중에도 인간이 이렇게 물리가 터지고 이 중세계를 벗어나게 되거든요. 중세계를 벗어난다 하는 건 아까 내가 얘기했죠. 우리가 곤충으로부터 살아온, 인간까지 된 거는 인간도, 즉 말하자면 곤충의 주머니예요, 이게. 곤충의 주머니. 그런데 독의 곤충의 주머니냐, 선의 곤충의 주머니냐 이것에 따라서 곤충의 주머니가 벗어지고 곤충의 주머니를 더 만들고 이러는 거죠. 만약에 그러한 문제가 없었다면 우린 이 산하대지가 전부 새카만, 그냥 뭐라고 그럴까?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게 되겠죠. 하지만 그것이 또 불에서도 살고, 캄캄한 데도 살고 모두 사는 게 있기 때문에 어디선가 또 생기겠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요.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거니까 이 공부를 어서어서 해서 벗어나는 데만 노력해라 이러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정을 베풀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버리라는 것도 아니고, 살면서 항상 그렇게 베풀면서 정신계의 자기를 꼭 붙잡고 물질계의 자기는 정신계의 자기를 믿고 오직 거기다 맡기고 길을 걸어라 이거죠. 어쩔 수 없잖아요, 이왕지사 태어났으니. 여러분이 태어났으니까 상대도 있고 종교도 있고 뭐,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도 있지 학생이 없다면 뭐가 있겠어요? 그래, 이유를 모두 대면, 이게 말을 하자면 그것이 얼마나 긴 말인지 몰라요. 사람이 왜 태어났느냐. 이 말을 하자면 오늘 하루 종일 해도 못다 하고 내일까지 해도 못다 하고 모레까지 해도 못다 해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왔든 인연이 있으니깐 나왔겠죠. 나왔으니깐 나부터 알아야지 내가 없는데 어떻게 상대가 있고 종교가 있느냔 얘기예요. 그러니깐 부처님께서 아주 사대 성인들께서 간략하게 ‘네 나무는 네 뿌릴 믿어야 공덕이 있느니라.’ 아주 간략하게, ‘딴 나무에서 네 나무에다 에너지를 보내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네 뿌리에서만이 네 싹을 돕는다.’ 이거 간략하게 가르쳤어요.
그러니까 모두가, 우리가 지금 절에서 공양 올린다 하는 것도 이게 전부 가르치는 도의 길입니다. 말은 그렇게하면서 그 뜻이 뭔지 몰라서 걱정이죠. 꽃공양 이러는데, 어떻게 이 세상이 벌어질 때에 꽃만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나무도 생기고 전부 생기고 난 뒤에 그것이 생겨 가지고 진화돼서 자꾸자꾸 형성돼서 그게 진화됐으니깐 무척 오래 있다가 인간이 나온 거죠. 그 기간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그걸 벗어나려면 모두가 공해서 공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려야, 한마음으로서 공심으로서 공양을 올려야 공덕이 되지, 공심이 아니고 그냥 갖다가 삐쭉, 이거를 올릴 때는 딴 생각 없어요. 벌써 머리에 떠오르는 게 내 아들 내 남편, 무슨 일 이런 게 생기지, 그냥 꽃 공양을 올린다는 거는 생각지도 않아요. 그냥 갖다 놓으면서 말입니다. 아니, 그러니 이게 적응이 됩니까. 이게 공덕으로 적응이 되느냐구요.
이 마음도 그래요. 벌써 쌀을 갖다 놓고 초를 켜고 그럴 때 촛불을 켜는 게, 내 마음의 불을 켜고 나면 내 몸이 타서 깎아지는 듯한 그 애처로운 마음으로서, 공심으로서 공양을 올려야, 부처님께서 공심인데 내가 공심이 아니면 어떻게 맞아 들어가겠어요? 그래서 공심으로서 공양을 올릴 때에 촛불을 하나를 켜도 내 마음이 간절한 마음이 돼서 그 촛농이 떨어지는 대로 내 몸이 깎아진다는 것을, 그것을 다 놔 버리면서 그렇게 가는데, 그래서 공양이라고 하는 거죠. 발우공양도 공양이라고 그러죠?
왜 공양이라고 그랬느냐. 스님네들만 앉아서 먹는 게 아니잖아요. 스님네들도 곤충의 바가지예요. 중생들의, 즉 말하자면 주머니들이에요. 주머니가 그 주머니 구녘 뚫린 데로 그것을 넣어요. 주머니 구녘 뚫린 데로 넣는다구요. 거기서들 제가끔들 모두 먹습니다. 그러고 자라고요. 그러면 어떻게 자라느냐. 사람 하는 행동 따라서 의식도 다 거기에 따라서 가거든요. 먹기 싫어도 ‘주는 대로 먹어!’ 그러고선 넣어 준단 말입니다. 살기 위해서 그냥 살아가니까, 살아가니깐 살기 위해서라는 것도 없고 그냥 살았으니깐 살기 위해서 우린 먹는 거죠. 그런데 그게 주머니라는 걸 몰라요, 모두. 곤충의 주머니라는 걸 하나도 납득을 못해요. 그래 그 구녘 뚫린 데다가 넣어 주는데 어떻게 내가 먹는 겁니까? 이 주머니가 먹는 겁니까? 이 주머니 속의 곤충들이 먹는 거지. 그러게 악의 독이 있는 곤충의 주머니냐, 독이 없는 곤충의 주머니냐 여기에 따라서 또 많은 문제가 생기죠. 독이 있는 주머니에서는 독성이 생산이 되는 거고 독이 없는 주머니에서는 독성 있는 데 잡아먹히고 이러더라도 선의가 발생되는 거고 그런 거죠.
우리 인간만 그런 게 아니에요. 옛날에 인간이 아주 적었을 때는 어디 가면, 하다못해 까마귀들이나 벌들, 개미들, 박쥐 그런 것들도 사람만 만났다 하면 금새 와 하고 덤비면 금새 없어졌답니다. 그것도 그 박쥐는 박쥐대로 먹고서는 그래도 뼈다귀는 남기니까. 껍데기는 남기고 그러니깐 뭐 딴 것들이 먹고 이렇게 하지만, 개미라는 것은 뼈다귀 속에까지 들어가서 다 먹어치워요. 이게 곤충의 주머니예요. 이 곤충의 주머니에서 한번 벌어졌다 하면 정말, 그래서 요즘 내가 이렇게 말을 하죠. ‘정신계에서 정신을 뺏어먹고 사는 거니깐 정신을 뺏기지 않으려면 정신계의 내 주인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 이런 거요. 정신을 뺏어먹고 정신을 뺏기고 이렇게, 육이 있는 거는 육을 뺏어먹고 죽이고 살지만 사람들은 정신을 뺏기고, 정신을 뺏기곤 그때서는 껍데기만 왔다 갔다 하다가 그냥 스러지는 거죠. 이게 현실이에요. 옛날 얘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우리의 곤충의 주머니를 다 벗어 버리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 생각 자체를 그대로 놓고 가야 한다. 그대로 남을 섭섭지 않게 해야 한다. 말을 항상 조심해서 해야 한다. 말, 똑같은 말이라도 말을 성을 내고 하면은 이쪽도 감촉이 좋지를 않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도 저거 하면 곤충은 빨리 진화되지 않죠. 그래서 이것이 빨리빨리 되려면, 그렇게 해야 둘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죠.
이 마음공부 하는 분들은 반 이상이 벌써 다 줄고 어떤 분들은 반이 줄고 어떤 분들은 삼분의 이가 줄고, 그냥 요만큼 남고 다 줄어 버리고 없고 이런 분들도 많아요. 이것은 누가 일러 줘서 아는 게 아니라 벌써 통하거든요. 감촉으로 다, 다 통해요. 악성은 악성대로 통하고 선의면 선의대로 통하는데 악성은 악성대로 왜 선의로다가 이끄느냐. 독을 빼면 선의가 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독성을 빼기 위해서 이런 것을 하면 독성이 다 없어지면서 99%가 부처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에 이 중세계를 떠나게 된다 이런 거죠.
지금 질문한 학생처럼 왜 태어나게 돼서 이런지 모르겠다고 그 얼마나, 지금 아주 학생들도 죽어나는 판국이죠. 세상이 이러니까 세상대로 따라가려니까 얼마나 고초가 많아요. 우리 살 때만 하더라도 펄쩍펄쩍 뛰고 편안하게 살았는데 말이에요.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여러분, 사람으로 치지 마시고 곤충의 주머니로 치시고 항상 ‘그 곤충 주머니나 곤충이나 둘이 아니고, 우리도 이런데 모두 딴 사람들도 다 둘이 아니겠지.’ 하고 모두가 둘이 아니라고 생각을 할 때에, 바로 믿어지는 게 있어야만이, 믿어지는 그 방망이 하나면 온 우주를 때려잡고도 남음이 있어요. 이 방망이요! 주인공이라는 자기 뿌리인 불성 말이에요! 이거면 이 세상을 다 잡고도 남음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세요.
아버지로서의 삶이 옳은지요?


스님, 제가 지금 나이가 52살입니다. 사실 대학교 다닐 때까지는 자기 자신의 생활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애기 낳고 하다 보니까 그때부터 나의 생활로 생각되는데, 저의 과거를 생각한다면 과거는 저의 부모로 생각되고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게 현재로 생각될 것 같으면 저희 자식이 미래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게 옳은지 안 옳은지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이렇게 살다 보니까 자식들의 즐거움이 저의 즐거움보다 더 좋은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것도 자식들을 위해서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옳은 건지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아, 그거야 사실이죠. 사람이 사는 데서, 아버지이니까요! 이 세상에 모든 회사의 중역으로 있는 사람은 중역이기 때문에 직원을 다스려야 한다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죠? 또 댁도 아버지가 됐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기 전하고 아버지가 돼 가지고는 다릅니다. 아버지가 됐기 때문에 자식들한테 사랑을 베풀 수 있고 더러운 것도 볼 수 있고 망나니 같은 것도 볼 수 있는 거지, 그렇게 너그러움이 있는 거지, 만약에 장가들기 전에 다른 사람들 자식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본인이 아버지가 됐기 때문에 자식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어머니나 아버지가 돼서 자식들을 사랑하고 내 생명보다도 더 귀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니라! 그러니 그 마음을, 개개인이 다 곤충에 이르기까지 그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엔 부처의 마음을 모두 갖춰 가지고 있느니라.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은 찰나찰나 나투면서 아니 되시는 게 없기 때문에 하얀 물에다가 모두 비유를 하고 바다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그저 내 자식, 내 재산, 요런 것만 아는 것을, 개별적인 어떠한 그릇에서만 얘기고, 부처님께서는 삼라대천세계의 모든 생명들을 다 내가 될 수가 있고 내가 행할 수가 있고 나로 나투면서 이끌어 주시는, 즉 말하자면 보현신, 관세음보살, 일체 보살이 다, 각각의 보살이 다 될 수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또 각계각층 중생들이 다 될 수가 있으니까 부처인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니까 아버지의 책임을 다 하시라고 이러는 데서,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말로 행으로, 또는 무엇을 살 돈을 잘 주거나 옷을 잘 입히거나 잘 먹이거나 이래서 그 사람이 제대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사랑을 하는 것은 정신력을 길러 주는 것이고 보배를 찾게 하는 것이 전 세계, 전 우주를 맡겨 주는 것과 다름없는 겁니다. 물질적인 재산 물려주는 것보다도 더 좋은 거죠.
그래서 내가 항상 이렇게 말을 하죠. 여러분은 가정에서 부부지간에 사랑이 없고 어떠한 문제가 있거든 그대로 부드럽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부드럽게 하면서 거기다가 다 맡기면 서로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남편이다 부인이다 하는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바로 거기까지 불이 들어오게 돼 있다. 그래서 모든 망하게 하는 나쁜 습성을 고칠 수 있게끔 돼 있으니까 그렇게 하라. 또 자식도 몸을 잡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말로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무조건 잘해 줘서 되는 것도 아니다. 단 하나 그 업식 모든 것을 녹여 주면 스스로 밝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인공에 둘 아니게, 너와 나와 둘이 아닌데 거기서만 부드럽게 행하고, 아주 정말 보배스런 인간으로서 자유인이 되게끔 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풍족한 사람이 되고, 모 안 나는 사람이 되게 하고, 자비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이렇게 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거기에서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뿌리를 싱싱하게 키워 주고 보배를 찾게 해 주는 것이 원칙이죠. 그건 거짓이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연방 해 보세요. 나가서 뭐 어떻게 하고 그러더라도 절대로 욕하고 때리고, 또 부부지간도 그렇고 다 그래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시고, 저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저 속에 들은 업보가 바로 그러는 거니까, 의식들이 그러는 거니까, ‘주인공! 그 뿌리는 나하고 둘이 아니야. 그러니까 주인공만이 그걸 해결할 수 있다.’ 즉 말하자면 뿌리만이 싹을 푸르게 살게 할 수 있다 이 소리죠. 그러니 그렇게 해 주고 겉으로는 부드럽게, 진짜로요. 진짜 진실로서 그렇게 해 주고 한다면 정말 고(苦)의 테두리에서 몰락 벗어날 겁니다. 정말입니다. 그리고 착한 자식이 되고 화목을 가져오고 질서를 문란치 않게 할 수 있고 아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안 자면서 공부하려면…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을 체득하고자 하는 마음은 가득하나 세속에 살아가는 저희들은 낮에는 직업전선에 나가야 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공부 좀 하려고 그러면 자꾸 잠이 와서 안되고 또 친구들하고 술 한 잔 먹다 보면 잠이 더 오고 그러는데, 잠을 좀 안 자면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으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술을 먹으면 정신이 흐려지니까 생각이 올팡갈팡 해지죠. 그렇기 때문에 불가에서 술을 먹지 마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술을 그렇게 많이 먹어서 좋은 건 아니라는 얘기죠. 약주로만 드시지 술로 잡숫진 마세요. 부부지간이나 부모자식지간이나 모든 걸 거기다가 ‘둘 아닌데’ 하고 맡겨 놓을 수 있고,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세우신다면 바로 이심전심으로 통한단 말입니다. 다 통하게 돼 있어요. 정말입니다.
어떤 집에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아주 앙숙이랍니다. 아예 보려고 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한두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도리에서 ‘어휴! 아버지 마음도 내 마음과 둘이 아닌데, 내 뿌리하고 아버지 뿌리하고 둘이 아닌데 그저 아버지가 사랑을 베풀게 당신만이 할 수 있다.’ 하고 항상 그렇게 했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요, 딱 껴안고 ‘이제는 너하고 나하고 둘이 이렇게 살자’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무슨 일을 하는 아들이 그냥 망해 가지고 아주 들어앉아 있는 사람인데 “인제 너도 살아야지.” 하고 반을 뚝 떼어서 주더랍니다.
어때요? 이렇게 모두 자비를 베풀게끔 스스로 이렇게 돼야겠죠? 스스로 부처를 만드는 거고, 스스로 보배를 만드는 것이고, 스스로 자유인을 만드는 거지, 어떻게 그냥 입으로 말을 해가지고 그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이것 보세요. 막 그냥 말을 악착같이 하면요, ‘어휴! 내 저 사람만 만나면 지겨워.’ 그러니까 달아나가요. 달아나가게 돼 있다구요. 부부지간이고 부모자식지간이고 다 그래요. 그러니까 좋다 좋다 해야 그저 따뜻한 데로 고이죠. 추울 때는 따뜻한 데로 고이고 더운 때는 시원한 데로 고이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 여러분, 그렇게 불편스럽게 사시지 마시고 편안하고 즐겁게 사세요. 마음이 답답하게 나오거든 ‘답답하게 하는 것도 너니까 답답지 않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다시 바꿔서 대치해서 즐겁게 사세요. 즐겁지 못하면요, 마음이 즐겁지 못하면 얼굴 빛깔까지도 밝지 못하게 살게 됩니다.
2005-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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