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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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선사들의 안타까운 최후/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독살 당한 달마, 도적에 희생된 암두 선사
사회적 교단적 정치적 이유로 생사 좌우

사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전신(全身)사리가 사리중의 백미이다. 왜냐하면 온몸 그 자체가 사리이기 때문이다. 온몸 그 자체가 사리라는 말은 선사가 살아온 과정 그 자체가 모두 사리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운문 선사는 ‘날마다 좋은 날’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혹 이상적인 열반모습에만 고집한다면 이는 그 선사의 진면목을 보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달마 대사는 독살 당했다고 한다. 그것도 율종 승려인 광통 율사에 의해서. 율사가 어찌 살생을 할 수 있느냐고 정말 펄쩍 뛸 일이지만 그래도 그런 기록이 남아있다. 사실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는 당시 기득권 종파인 율종과 신흥종파 선종간의 알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달마가 마지막 관 속에 짚신사리 한 짝을 남겨두고서 표표히 자기의 본고향인 서역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뒷날 육조혜능 선사가 등장하여 당신을 다시금 살려놓았다.
서천 24조인 사자 존자는 정치권과의 갈등으로 희생된다. 모양은 법담의 형식이지만 내용은 취조 그자체이다.
계빈국의 왕이 칼을 빼들고 물었다
“스님께서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의 경지를 증득하였습니까?”
당연히 증득했다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그건 수행의 수준정도를 묻기 위한 물음은 물론 아니다.
“오온개공을 알았으면 생사를 여의었습니까?”
“여의었습니다.”
옳거니. 이제 제대로 걸려들었다. 바야흐로 본색을 드러낸다.
“스님의 머리를 베고자 하는데 주시겠습니까?”
어차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니 다른 말은 해봐야 소용없다.
“몸도 내 것이 아니거늘 머리를 아끼겠습니까?”
이 때 왕이 목을 치니 흰 젖이 한 길이나 뿜어 올랐다. 이런 왕에게 과보가 없을 리 없다. 그 자리에서 왕의 두 팔이 저절로 땅으로 떨어졌다.
암두전활(828~887) 선사는 사회적 불안이 원인이 되어 열반한 경우라 하겠다.
임종하던 그 해에 중원 땅에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갔다. 오직 선사만이 남아서 홀로 절을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적들이 절에 몰려왔다. 뭔가 가져가야 하는데 집채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갈게 없었다. 그래서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로 선사를 칼로 찔렀다.
태연한 얼굴로 앉아서 칼을 받았다. 동시에 큰소리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그 자리에서 열반했다. 그 때 그 소리가 수십리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오백년에 한 사람 날까말까 하는 고승도 이렇게 도적의 화를 입어야 하는게 중생계의 현실이다.
사회적 교단적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수행자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없다. 그럼에도 선사들은 늘 그 속에서도 항상 몸과 마음이 현실경계에 걸리지 않으려는 삶을 추구해왔다. 조계종 총무원장 인곡법장(仁谷法長) 대종사 역시 비록 지병인 심장장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마지막 법구(法軀)를 흔쾌히 생명나눔으로 회향하시어 만세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남겨놓으신 ‘바랑’은 입적하신 그 자리에서 전신사리가 되어 후학들에게 법을 설하고 있다. 먼훗날 누군가 다시 이 걸망을 지고서 천하를 만행하리라.

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는데(我有一鉢囊)
주둥이도 없고 또한 밑바닥도 없다(無口亦無底).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受受而不濫)
주어도 주어도 비워지지 않는구나(出出而不空). (법장 스님이 입적 전에 남긴 글귀)
2005-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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