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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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데 목표를 둬야
자기 발밑에서 깨우쳐야 돼요!

여러분과 또 같이 한자리를 하게 됐습니다. 이제 그 더운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로 접어드는군요. 우리 마음자리는 항상 사철이 따로 없듯이, 공부하는 데도 서로 도반으로서 같이 열심히 해봅시다.
우리는 마음이라는 정신계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리만큼 그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자유를 누릴 수도 없거니와 벗어날 수도 없고, 한 생만 이렇게 곤고하게 사는 게 아니라 세세생생을 끝간 곳 없이 그렇게 살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왜 이렇게 공부해야만 되는지 한번 말씀드리죠.
여러분이 극락세계나 지옥세계를 따로따로 보지 마시고, 현 세상에서 잘 보시라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광대하고 묘한 문제들, 수라장 같은 세상, 우리가 모두 현실에서 보는 겁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미생물에서부터 수없는 생명들이 짝을 짓죠. 그 모든 생명들이, 인간까지 말입니다.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수억겁 광년을 거쳐서 이렇게 인간세계까지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과거 미래 현재가 없이 말입니다. 지금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걸 어떻게 대치를 하나요? 찰나찰나 닥쳐오는 문제들, 찰나찰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모두 그런 것을 어떻게 대치를 해야만 되며, 수없는 광년 겁을 지나오면서 누적된 문제들,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면서 착을 버리지 못한 채 또는 관습에 의해서 끄달리는 습이 그대로 남아서 누적돼서 돌아가는 이 모두를 어떻게 해야만 대치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부처님 마음과 더불어 같이 아시고 계시다면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어떻게 보면 광대하고 어떻게 보면 도깨비장난 같고 어떻게 보면 아수라장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아주 묘한 이치에 다다라 신비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들을 어떻게 합류화시켜서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며, 한 번 쳐다보고 웃고 한 번 내려다보고 건질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만약에 우리가 이 공부를 안 한다면 세세생생에 끝 간 데 없이 그렇게 굴러야만 합니다. 우리는 물주머니에서의 삶과 같습니다. 지금 바다 속에서 생명들이 물속에서만이 살 수 있도록 돼 있듯이 또 물속을 벗어나면 죽듯이, 우리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로 공기주머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겁니다. 벗어나야 어떻게 해보죠.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그렇게 수없이 찰나찰나 돌아가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우리가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낳은 부모만 육의 부모가 아니고 수억겁을 돌아오면서 걸어오면서 우리는 자식이 됐었고 부모가 됐었는데 어떻게 현재 육의 부모 하나만이 내 부모라고 하겠습니까? 둘이 아니라는 도리가 그래서 나온 겁니다. 부모도 둘이 아니요, 자식도 둘이 아니요, 나 자체도 둘이 아니요. 일체가 다 공(空)했다. 즉 말하자면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공했다. 그대로 여여하느니라. 그래서 우리가 그대로 여여한 줄을 안다면 이렇게 고생도 안 해요! 고생이라고 할 건 없지만 말입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듯이 ‘여여하다, 공했다.’ 이런 뜻은 여러분이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가고 오는 것, 만나는 것, 먹는 것, 이런 것 모두가 고정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대로 공했고 그대로 여여하다 이런 뜻이에요. 여러분은 이 도리를 납득을 못하겠지만 참나와 현재 나가 둘 아니게 통신이 된다면 그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물론 각 사찰에서도 그렇지만 될 수 있으면 모든 조상들이나 자식들이 또 죽은 영혼들이나 우리 산 사람 마음들이 은은히 모두 이 도리를 알아야 되겠기에 말입니다. 또 알아야만 공덕이 되겠죠. 공덕이 안되는 것은 내 정신계와 물질계가 합류화돼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공덕이 안된다는 뜻입니다, 합류화돼서 돌아간다면 공덕이 되죠. 즉 말하자면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 그대로, 우리가 그대로 공용을 하고 지금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알고 보면 용무를 그대로 하고 있고, 작용을 하는 겁니다. 한데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자기를 못났다고 생각하고,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자기를 아예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무시하는가 하면 잘났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라고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다시 한 번 하나하나를 정리해볼까 합니다.
법당에 들어와서 벌써 부처님이 여러 분 모셔져 있으면 헷갈립니다. 조선시대 때에 스님네들을 탄압할 때에, 쌀 한 말만 갖다놓으면 도저히 스님네들이 그걸 가지고 공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산중에서 숨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산신각, 칠성각, 신중단 모두 여러 분들을 해놓아야만 대중들이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종교 탄압을 안 하죠? 그러니까 우리 마음을 개선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법당에 들어오면 만 불(萬佛)이 모셔져있다 할지라도, 일 불(一佛)로 봐야 됩니다. 이것은 부처님 마음의 한생각에 의해서 이름이 주어진 겁니다. 지장, 아미타, 아촉 또는 미륵, 관세음, 지신이나 주해신이나 주림신이나 모든 이름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겁니다. 부처님께서, 부처님 마음속에서 탄생한 천백억화신은 모습을 바꾸어가면서 천차만별의 여러분한테 다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응신이 돼서 나투어 주신다고요. 그것도 과거가 아니고 미래도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현실에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오신 것이 없기 때문에 가신 것도 없습니다. 그대로 영원하고 끊임이 없이 생과 사가 둘이 아니게 그대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불상을 모두 해놨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사찰에 가보시면 여러 가지로 놓여 있죠? 여러 부처님들이 말입니다. 그런 데에 사람의 마음이 헛갈려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도 여기 앉아계시면 천차만별로 다른 분들이 이렇게 같이 앉아 있죠? 그러나 모습은 다를지언정 어찌 마음이야 둘이겠느냐, 생명이야 둘이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 부처님들이 그렇게 계실지언정 내 마음은 항상 부처님한테 가면은 부처님의 마음과 더불어 공했으니, 거기에다가 일 배를 하든지 삼 배를 하든지 칠정례를 하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여유가 있는 대로, 급하면 급한 대로 일정례를 하고 급하지 않으면 칠정례를 하고, 더 급하지 않으면 삼천 번을 해도 좋습니다. 그건 자유죠. 자유스럽게 그렇게 여유가 있이 해야지, 만약에 마음이 급한데 꼭 삼천 배를 하랬다고 하고 하지 말랬다고 하지 않고, 일 배를 하란다고 일 배를 하고 쓱 돌아서서 나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한 대로이니까요! 에누리가 없는 거예요. 자기가 한 것만큼 나한테 오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또 많이 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지 마세요. 삼천 배가 한생각만 못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것을 잘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도 한마음이요, 칠성한테 가도 한마음이요, 지장을 찾아도 한마음이요, 관세음을 찾아도 한마음이요, 산신을 찾아도 한마음이요, 해신을 찾아도 한마음이요, 주림신을 찾아도 한마음이요, 지신을 찾아도 한마음이요, 모두가 한마음이니 마음은 체가 없어서 찰나찰나 들고 나는 데에 손색이 없다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도 가정에서 아버지가 됐다가 아내가 됐다가 또 형님이 됐다가 동생이 됐다가 사위가 됐다가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모습은 한 모습인데 그렇게 가지각색으로 찰나찰나 나투면서 그대로 행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과 같이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자유자재하시고 그렇게 나투시는 분이니까 겉모습만 보지 마라 이런 겁니다. 스님네들을 보고도 겉모습 고깃덩어리를 보지 말고 내 마음부터 알아야 그 마음을 알 수 있으니까 내 마음부터 아시라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부터 알라.’ 하는 것은 지금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거지 내가 없다면 상대가 없는 거라고 항시 말씀해드리죠. 그렇기 때문에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콩씨를 심어서 콩나무로 화했다면 콩씨를 어디 가 찾습니까? 네? 콩나무로 화했잖아요? 화한 콩나무는 여러분 몸이라고 볼 때에 콩나무에 콩씨가 또 붙었습니다. 그러면 콩나무에서 콩씨를 찾아야지 과거로 돌아가서 찾는다거나 미래로 돌아가서 찾는다거나 어디 두리번거리고 찾는다거나 이런다면 그것은 정작 얼마나 어리석은 일들입니까? 예를 들어서 수박도 그 콩씨와 다름없는 얘깁니다. 수박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관하고 화두를 삼아서 이거를 굴리다가 보면은 그 속에 씨가 들었는지, 맛이 어떤지 그걸 도무지 알 길이 없어요.
죽고 사는 그게 뭐 그렇게 겁납니까? 내일 죽은들 어떻고 오늘 죽은들 어떻고 모레 죽은들 어떻고 안 죽은들 어떻고, 뭐가 걱정입니까? 그냥 그대로 수박을 용기 있게 깨뜨려서 먹어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필요합니다. 또 그냥 속성으로 들어가야지 내가 이 세상에 난 게 화두인데 그 화두에다가 또 화두를 붙여서 찾는다면 얼마나 그게 미거한 짓입니까? 그래서 화두를 갖는다 하더라도 화두도 거기 놔야 됩니다. 화두 끊어질까봐 애를 쓰고 그런다면 10년, 20년 가도 도저히 자기가 자기를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도 공했기 때문에 찾을 게 없고 버릴 것도 없고 쥘 것도 없고 쥐지 않을 것도 없는 그런 공한, 바로 더불어 같이 살고 있는, 더불어 같이 먹고 있는, 내 육신 속의 생명들과 더불어 같이 살고 있는 이 통 속을 벗어나야 하겠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을 각 사찰에 모셔놨든 신중단을 모셔놨든, 하다못해 돌을 모셔놨든 상관할 것 없어요. 모두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부처다, 부처가 아니다.’ 하는 대로 가는 거니까요. 알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 만물만생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고 감사하지 않음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하물며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각자 찾으렵니까? 부처님이 어떻게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은, 배를 타려고 뱃사공한테 가면 뱃사공이 으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하나 사려고 공장에 갔다 한다면 그 공장 주인이 으뜸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치과에 엊그제 갔더니 정말 그 치과의 박사가 으뜸입디다! 그러니까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다 으뜸이에요.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지.’ 하는 그 말씀의 뜻을 모른다면 백문선이 헛문선이죠. 그러니 내가 부탁할 것은 어느 법당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모두 일 불(一佛)의 한생각으로써 한마음으로써 부처님한테 지극하게 내 한마음과 일체제불의 한마음을 다 한꺼번에 하나로 모아서 일 배를 올린다면 천 배 올린 것보다 수확이 좋다 이겁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처님한테 갔을 때에 어떻게 생각이 듭디까? 이 부처에도 놔야 하고 저 부처에도 놔야 하고, 요 부처에 놓지 않으면 자식이 어떻게 될까? 요 부처에 놓지 않으면 영감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또 재수가 좋지 않으면 어쩌나? 또 삼재가 들었으니 언짢으면 어쩌나? 이러한 까닭에 없는 살림에 몇 푼 가지고 가서 요기도 놓고 저기도 놓고 놓으려면, 어떤 때는 모자라서 그냥 나오고, 그러면 마음이 께름칙해서 나온다 이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인데, 한 부처님 앞에 그냥 고스란히 놓고 지극하고 정성스럽게 거기 계신 모든 분들을 한마음으로 모시면서 지극하게, 없으면 그렇게 하고 나오시고, 또 있으면 있는 대로 한마음으로써 놓으시고, 웬만하면 그 절에 주지스님을 찾아서 “모두를 위해 써 주십시오.” 하고 갖다놓는 겁니다. 왜냐? 그것은 거기 갖다놓으나 산 부처님한테 갖다놓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마음먹기 달린 겁니다.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갔는데 백만 원짜리를 사러 갔다면 백만 원을 꼭 줘야 삽니다. 오십 원짜리 사러 갔으면 오십 원짜리는 꼭 오십 원짜리를 줘야 합니다. 오십 원을 주면은 오십 원짜리밖에 안 줍니다. 그러니 그것은 돈을 스님한테 준 사이도 없고 부처님한테 갖다놓은 사이도 없는 겁니다. 그러면 또 가져간 사이도 없죠. 부처님이 준 사이도 없고 스님네들이 준 사이도 없죠. 그래서 준 사이도 없고 가져간 사이도 없는 겁니다. 그렇게 정확합니다. 이 뜻을 잘 알아서 행하시도록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또 두 번째로, 우리가 어느 법당에 가보면 인등을 많이 켜놓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에 수억겁을 걸어오면서 부모가 됐다 자식이 되고 자식이 됐다 부모가 된 그 사실의 겁을 어떻게 대치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인등을 해놨을 때 마음의 인등을 켠 거는 비바람이 아무리 쳐도 꺼지질 않지만 그냥 등에다 불 켜놓은 거는 비바람이 치면 꺼져요. 요새는 또 전기로 켜놓는 거니까 전력만 나가면 그냥 꺼지죠. 그런데 마음의 등불은 전력이 나갔든 비바람이 치든, 억수장마가 들든 물에 잠기든, 산 속으로 들어가든 그거는 상관없이 꺼지지 않는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의 정성이 있는 것이 인등이지 돈이나 몇 푼 스님한테 갖다 던져놓고 그것 켜달라고 쪽지나 붙여서 켜놓는 게 인등이 아닙니다. 그건 도깨비 등이지 인등이 아니에요. 그러니 여러분이 잘 생각하세요. 이렇게 말하면 어느 스님네들은 날 욕을 하겠지만 욕을 먹어도 할 수 없는 것이 뭐냐 하면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입니까? 정말 이거를 자세히 말을 하려면 길어서 끊어버리고 얘기하겠습니다. 요다음에 또 하죠.
세 번째로, 지금 위패를 다 붙여놓습니다. 위패를 붙여놓는데 지금 시대에 그게 걸맞습니까? 또 우리가 고상치도 못한데다가, 조상님들을 모실 때 그것은 모셔서 비뚤게 매놓는 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미국에 부모들을 모셔다가 영어를 못하니까 그냥 방에다 가두어놓고는 그냥 자기네들만 돌아다니는 것과 같이, 조상들을 꼼짝 못하게 위패를 해서 붙여놓고선 그냥 자유스럽게 나고 들지 못하게끔 해놓는다 이겁니다. 그러니 어찌 조상을 나의 생명과 같이, 내가 또 조상이 되고 자식이 되고 하는데 거기다 꽁꽁 뭉쳐놓고선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지낼 때 부모를 모셔다가 대접하고서 그냥 또 자유스럽게 해드릴 수 있게끔 위패를 태워드리는 겁니다. 태워드릴 때도 물을 큰 그릇에다 떠다놓고 향 피워놓고 초 켜놓고 태워드리는 겁니다. 지금 자식들을 가두어놔도 죽겠느니 살겠느니 하고 비뚜로 나가고 야단들인데, 체가 없다고 조상들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즉 조상이고 조상이 즉 우리들이니까요. 그렇게 해놓는다면 그 조상들이 빨리빨리, 우리가 개선을 해서 빨리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진짜로 그거를 잘 생각을 해보셔야 됩니다. 또 천도를 시킬 때도 그렇습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도 그렇고요. 음식을 잘 차려서 이렇게 해놓는다면 ‘너는 언제나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고 쓰고 단 것을 먹어가면서 고생을 해라.’ 하고 묶어 놓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밥 한 그릇 가지고 이 세상 만물만생을 다 먹이고도 밥 한 그릇은 되남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짜고 달고, 맛이 없고 있는 것을 쭉 차려놓고선 자꾸 관습에 얽매이고 집착에 얽매이고 그러게끔 만들어서 오히려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치가 지금 너무도 많습니다.
선종이 많이 태어나야 될 텐데, 모르는 어리석은 악종이 많이 태어난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며,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우주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항상 그러죠. 과거 미래 현재를 한데 합쳐서 떡을 세 켜만 해놓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은 대로 일곱 켜를 해놓고, 많으면 아홉 켜를 해놓더라도 그저 세 켜만 해놓고 해도 되고, 또 세 켜를 못해 놓으면 한 켜만 해놔도 초, 향 그리고 큰 그릇에 물 떠서 상 옆에 하나 놓고, 너무 섭섭하걸랑 과일 세 가지를 한데 합쳐서 한 그릇에 놓고 지내면 벌써 조상들은 법당에 들어오면 어디부터 보는 줄 아십니까? 스님네들 마음부터 봅니다. 그러면 스님네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지내느냐 하면은, 아, 재(齋)비용은 얼마나 들어왔고, 얼마치를 흥정했고 얼마가 남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거기부터 들어옵니다. 거기 들어왔다가 위패로 돌아갑니다. 위패 옆에 꽃을 해놨다면 꽃에 응접하구요. 그렇게 자유스럽게 왔다가 자유스럽게 나퉈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보면 벌써 그 상이 덜 차려졌고 더 차려졌고 요런 것까지도 생각하게 되고 아주 복잡합니다.
그러니 공부하는 스님네들한테 벌써 척 들어오면 삼계의, 삼세의 그 삼심이 일심으로써 그냥 광대하게 벌어진 것을 착 앎으로써 “허허!” 하고,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써 벗어나게 되는 건지 모릅니다. 스님의 마음에 들어오면 스님의 마음의 차원에 따라서 그 차원대로 알고, 또 차려놓은 것도 그렇게 뜻이 있으니까요. 그 둥근 안에 모두 들어서 천지가 다 내 천지이니까, 내 것 아님이 없으니 그 조상한테, 내 것 아님이 없고 내 자리 아님이 없고, 나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으니 어떤 것을 쳐야 되며 어떤 것이 될 때에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까지 조상들이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 벗어나게 되죠.
그런데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서 그런다면, 그 음식이 맛있고 맛없고 덜 차리고 더 차리고, 이런 데만 집착을 하고 온통 그냥 이집 저집 일가친척집으로 다니면서 살아있는 것처럼 내 말도 듣지도 않고, 내가 와도 본척만척하고 이런다고 사단이 벌어지죠. 그래서 죽은 집에 가서, 죽은 사람이 자기가 죽었다는 걸 인정 안 하고 산 걸로 생각을 하고, 거기 어정거리다가 일가친척이 오면 자기를 본체만체했다고 탁! 그냥 그럴 수가 있느냐고 떠다박지르면 그게 병나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은 이 마음공부를 필연적으로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생활 자체가 교재고 생활 자체가 바로 배울 수 있는 재료니까요. 이제 위패도, 재(齋) 지내는 것과 결부돼서 지금 얘기를 했습니다. 사람을 이익하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나셨지 해롭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나신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당시에 말씀하셨고, 말씀하신 게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지금까지도 그냥 여여하게 살아계시고, 죽는다 산다 하는 게 없이 그냥 계십니다. 그러니까 말씀하신 대로 그 뜻을 받아서, 우리가 심사숙고해서 생활 속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데에 목표를 둬야 되겠습니다.
간단하게 재 지내는 것 얘기해드렸죠? 천도재를 지내는데 억만금을 내놨다 하더라도 우리는 천도재를 그렇게 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차려놓고 하질 않아서 싫다 한다면 나는 “가져가라.” 이럽니다. 그러는데 그 재 지내는 것, 위패를 해놓는 것, 위패를 거기다 붙여놓고서 그러지 말고 지낼 때마다 위패를 접어서 하시라 이겁니다, 붙여놓지 마시라구요. 그러면 벗어나는 데 지장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공부를 아무리 하셨어도 그러한 마음을 갖는다면 나도 못 벗어나는데 조상을 어떻게 벗깁니까? 그러하니 그렇게 아시고요, 또 한 가지.
이거 이왕 얘기하는 끝에 얘기하죠. 방생을 할 때에, 나는 방생을 하는 걸 보면 이런 생각이 난다고 얘기했어요. 8ㆍ15 해방 되고 나서 수없는 사람들이 각지에서 몰려드는데, 차 위에 모두 빡빡하게 들어서서 타고 오죠. 그런데 그냥 가다가 이리로 떨어지고 저리로 떨어져서 머리가 깨지고 창자가 터져서 죽고 이렇게 하는데, 참 가관이에요. 차를 내려서도 자기 집 찾아가느라고 온통 서로들 헤매고 굶고서라도 그냥, 그 자기 집 찾아가느라고 기진맥진해서 쓰러져가면서 가는 모습들을 볼 때 그 처참한 것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고기를 잘 노는 것을 잡아다가 말입니다, 진흙에서 노는 미꾸라지를 잡았다면 맹물에다가 딱 담가놓습니다. 그러면 그게 온전할까요? 미꾸라지뿐이 아니라 거북이랑 뭐 고기랑 모두 잡아다 놓으면 잡는 데 죽고, 잡아다 놨을 때 죽고, 갖다가 물에 넣었을 때에 죽고, 찾아가다가 죽고, 허! 몇 마리나 살리는 겁니까, 그게? 살리는 겁니까, 그게? 오히려 고문하는 거지. 냉철하게 따져보십시오.
사람을 그렇게 해보십시오. 사람도 그렇게 했죠. 일제시대 때에 징용으로 끌려가고 탄광으로 끌려가서 그렇게 했었죠! 다른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왕지사 선덕을 쌓고 방생을 하려면, 지금 부모 없이 사는 애들도 많고, 또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사는 사람도 많고, 지금 먹는 게 흔한데도 먹지 못하고 흔치 못하게 사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다만 한푼이라도 구제를 한다면 그것이 바로 공덕이 아닐까요? 그러고 방생을 하려면 차라리, 스님네들도 천차만별입니다. 스님네들도 사찰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괜찮은데, 사찰을 가지고 있지 않은 분들은 곤궁합니다. 한번 그것도 생각해 보시면 어떻습니까? 사찰에 주지로 계신 분을 갖다 주는 것보다도, 오히려 주지로 안 계신 분, 그냥 여기저기 다니며 공부하는 분들을 위해서 좀 생각해볼 수 있는 그 생각 말입니다. 그것이 공덕이 되지 않을까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각해보면, 그르고 옳은 것을 전부 저절로 알게 돼 있어요. 그런데 사람으로 고등동물로 태어났어도 그르고 옳은 것을 모른다면, 부처님이 아무리 가르쳐도 그건 소용없는 일이죠. 이날까지 부처님이 가르쳐 오시는데도 불구하고, 이 모습 저 모습 보인다고 해서 부처님이 아니라고 보지 마세요! 한국에도 역대에 일컫는 부처님들이 많이 나셨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많고요. 모습만 각각이면은 죄 각각이라고 보지 마세요. 모두가 한 부처 한 제자예요. 여러분까지도 말이에요. 일거수일투족이 다 그러하니까, 여러분의 삶이 아니었더라면 종교도 없고 상대도 없고 상대성의 원리도 없고 다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올 때 형성시킨 장본인 선장을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여북하면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들의 몸뚱이는 허허바다에 띄워놓은 배와 같느니라. 그리고 그 몸뚱이 속에 들은 생명들은 중생으로 비유했느니라.” 몸속에 중생들이 잔뜩 탔죠? 지금 여러분 오장육부 속에 얼마나 많은 중생들이 꽉 탔습니까? 비바람이 치고 그저 파도가 치고 이런다고 해서, 그 마음들 의식들이 다 제가끔 그냥 벌렁벌렁 뛴다면 배는 뒤집히게 돼 있죠! 여러분은 그냥 쓰러지게 돼 있어요.
만날 우리 남편 잘되게 하고 우리 자식 나가지 않고 공부 잘하게 하고 이러고만 있을 겁니까? 그대로 실천해야죠. 나가든지 들어오든지 좋은 말 하고 따뜻하게 행동을 해줘서 집에 들어오고 싶게 만들어주고, 안으로 맡겨놔야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거기까지도 불이 들어와서 스스로 들어오게 만들어야지, 강제로 욕을 하고 그 말이 씨가 돼서 오히려 자식들이 활발치 못하게 살게 만드는 부모의 영향력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모릅니다. 남편과 아내도 그렇고 부모와 자식도 그렇습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부모가 아무리 나쁘다 하더라도 자식을 잘되게 하는 마음으로서 얘기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 세상엔 그렇지 않다고 구박이나 주고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좀 융통성 있고 지혜롭다면 “아버지 어머니가 그저 잘되라고 하시는 그 말씀 깊이깊이 새기겠습니다.” 한다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자기가 그렇게 말해서 자식이 잘된 줄 알고 기뻐서 살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관(觀)하는 도리를 가르쳐드리는 것도 돈이 드니 못 합니까, 무슨 노력이 드니 못합니까? 자기를 자기가 믿고 찾는데 뭐가 원통해서 못합니까?
그렇게 자녀들과 부모들을 다 그렇게 이끌어준다면, 승천을 하지 말래도 승천을 하게 돼 있어요. 벌써 죽기 사흘 전에 턱 하니 그리로 자동적으로 가게 돼 있어요. 지금 여러분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요. 숙명통 타심통 신족통 또 천안통 천이통 컴퓨터에서 여러분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다 거기에 입력이 됩니다. 입력이 된다면 입력대로에 나오죠. 그래서 입력이 그렇게 돼 있는데다가 입력을 다시 한다면 바로 누진으로 벗어나요.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벗어나게 해야 되지 않겠어요?
내가 말이 좀 더듬거리고 좀 안됐다 하더라도, 배운 여러분은 잘 듣고 행하고 진실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별거 아닌 것 가지고도 천지를 획득할 수가 있고, 규모가 큰 것을 향해서 간다고 해서 크게 깨우치는 게 아니에요. 자기 발밑에서 깨우쳐야 돼요!
200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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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