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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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사는 게 본래 놓고 그냥 가는 것!
자기 주인공밖에 없다고 진짜로 믿고 나가라!

마음의 능력을 개발하려면


스님께서는 우리 안에 광력·전력·자력·통신력이 충만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신통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느끼지도 못하고 보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광대무변한 마음의 능력를 개발해서 실천하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 가르침을 청합니다.

세계적으로 각 종교인들이 상대를 놓고 믿고 기도하게 만들고 상대를 놓고 신을 찾게 하는 고로 항상 우리는 노예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 볼 때 물주머니에서 오고 물주머니 어항 속에서 지금 살고 있다 이거예요. 그것을 벗어나야만이 우리는 자유스럽게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이 우주의 섭류를 전부 꿰뚫어서 우리가 알아야 하니까 이것은, 세상에 금덩어리를 태산같이 갖다 준다 하더라도 이것은 얻을 수가 없어요. 꼭 여러분의 마음, 마음으로서 그 굴레를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깐 현실로도 따져 보라구요. 우리가 공기를 떠나서는 살 수 없지요. 그러니깐 어항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공기가 없는 삼천대천세계 암흑이라도 들어갈 수 있고, 땅 속도 들어갈 수 있고 물 속도 들어갈 수 있고, 어디든지 통과가 안되는 데가 없어요. 그리고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듣고 자성의 심검으로서 모든 것을 다 자유롭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물질세계에서, 즉 말하자면 학술적인 과학이다, 과학자다 하더라도, 과학이 아주 발전이 됐다 하더라도 이 마음의 과학은 따라갈 수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마음이 빠른 걸로 말하자면 ‘가고 옴이 없다,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온다’ 이런 말이 있는 것은, 빛은 가다가도 잘못될 수가 있고 가다가도 막힐 수가 있고 가다가도 도로 올 수가 있고 이렇지만 이 마음의 빛이라는 건, 마음은 빛도 없고 색깔도 없으면서도 어디든지 멀고 가까운 게 없어요. 그렇게 훌륭하고 광대무변해요. 이 도리를 알려면 나부터 알아야 하고 내 몸 속에 있는 자생중생들부터 제도를 해야 내가 제도가 되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내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내가 혼자 먹지 않기 때문이에요. 혼자 생각하는 것도 없고 혼자 듣는 것도 없고, 혼자 일하는 것도 없고 혼자 먹는 것도 없잖아요.
생각해 봐요. 세포 하나하나의 생명체들이 모두 우글우글한데 내가 혼자 먹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사과 하나를 먹어도 모든 게 전체가 다 먹는 거지, 공식하는 거지 어떻게 내가 혼자 먹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듣는 것도 그렇고, 혼자 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공했다, 너는 공했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내 몸의 구조, 행을 하는데, 작용을 하고 사는데 이 원리부터 알아야 된다 이 얘기예요. ‘나는 이렇게 구조가 돼 있구나. 내가 혼자가 아니로구나. 수십 억의 내가 있구나.’ 그 도리를 알면 손가락, 내 몸뚱이가 손가락 하나라면 손가락 하나를 손가락 하나가 죽일 수는 없잖아요. 자기가 자기 죽일 수는 없는 거예요, 하여튼. 그러니까 외부적이나 내부적이나 모든 게 둘이 아니게 돌아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공이라고 그랬어요, `주인공!` 그래, 주인공이라고 그랬으니 그 주인공이라고 그러는 건 고정된 게 없이, 우리가 지금 걸어 올라오는데도 그 발자국을 짊어진 것도 없고 고정된 것도 없고, 그냥그냥 놓고 왔다 이거예요. 놓고 걸어 올라왔지요? 이 세상 살아나가는 것도 전부 놓고 그냥 가는 거예요. 우리가 걸음 걸어오듯이 말이에요. 본래 놓고 가는 거라구요, 지금 우리가. 본래 놓고 가는 건데 마음으로 ‘놔야 된다, 안 놔야 된다, 이거를 어떻게 놓느냐’ 이런 문제들이 결부되는 거예요. 본래는 놓고 가는 거예요. 고정된 게 하나나 있어요? 듣는 것도 고정된 게 없고 그냥 들으면 또 고다음에 딴 소리 들어야 하고 또 들어야 하고 또 들어야 하구, 연방 딴 소리 들어가면서 돌아가는 거죠. 딴 소리 해 가면서 돌아가고 딴 행동 하면서 돌아가는 거고, 먹는 것도 고정되게 먹는 거 없이 그저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돌아가고요.
그러니 어떤 것을 먹을 때 내가 먹었다 하며 어떤 것을 할 때 내가 했다고 하며 어떻게 움죽거렸을 때 내가 움죽거렸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이거예요. 내 몸뚱이 속에 내가 그렇게 많은데 내가 움죽거렸다고 할 수 있겠느냔 얘기예요.
그래서 항상 지수화풍은 그대로 지수화풍이 한데 흡수돼서 생명체가 된 거니까, 지수화풍이 그렇게 바탕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내 몸뚱이가 돼 있기 때문에, 그 지수화풍을 바탕으로 돼서 있기 때문에 즉, 전력이 물이 없으면 통과가 되지 않아요. 전력을 쓸 수가 없지요. 그렇듯이 지수화풍이 이렇게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을 가지고 용도에 따라서 마음대로 작용을 할 수가 있으니까 자력, 즉 말하자면 광력 통신력 그 모두를 내가 자유스럽게 쓸 수 있다 이 소리예요.
그렇게 쓸 수 있기 때문에 오신통은 즉, 눈으로 보는 것, 마음 안의 눈으로 보는 것, 육안의 눈으로 보는 것이 둘이 아니다. 육안의 눈으로 보는 것도 마음 안의 눈이 있기 때문에 육안의 눈이 있는 거지, 마음의 눈이 없는데 어떻게 육안의 눈이 뚫어졌을까요? 그러니까 보는 것도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보면 벌써 마음으로 생각이 되지 않아요? 이거는 보는 순간 벌써 생각이 되고, 그러니까 순간순간 보게 되고 순간순간 듣게 되고 하는 것도 모두가 알게 되고 내가 어디서 나온 거를 알게 되고 즉, 어디서 와서 이런 걸 보고 들었다는 것도 미리미리 알게 되잖아요. 알았잖아요.
그래서 ‘오신통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런 것은 ‘보는 것, 아는 것, 가고 옴이 없이 마음이 가고 오는 것, 또 어디서 온 것인지 아는 것, 내가 듣는 것’ 이렇게 다섯 가지를 동시에 쓸 수 있는 거지, 개별적으로 하나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란 얘기예요. 밥을 하나 지어먹으려면 물도 있어야 하고 불도 있어야 하고 다 사람이 씻는 것도 있어야 하고 솥도 있어야 하고, 이렇게 가공이 돼야 밥을 해 먹죠. 그렇듯이 우리는 눈과 귀, 아는 것, 보는 것, 가고 오는 것 없이 모든 거를 동시에 쓰는 것이 오신통이다 이겁니다, 동시에. 저기서 꽹가리 소리가 나면 눈이 그쪽으로 가죠. 눈이 가는 데는 귀까지 가지 눈만 가는 게 아니잖아요.
아니, 남이 싸움을 하는 것을 보면 벌써 눈이 가서 보게 되고 귀가 가서 듣게 되고 동시에 벌써 누가 잘못한 거를 알게 되고 왜 싸웠는가를 판단하게 되고. 그렇게 판단하게 되니깐 그것이 바로 오신통이다 이거예요. 다섯 가지가 다 포괄돼서 알았다 이거예요. 안 그래요? 다섯 놈이 한데 합쳐져서 아는 거지 한 놈만 가서 안 게 아니거든요. 그건 안 게 아니에요. 다섯 놈이 한데 합쳐져서 안 거 아닙니까? 그러니깐 그놈이 바로 고정된 놈이 아니라 항상 바꿔 가면서 보고 듣고 보고 듣고 모두 판단하고, 그놈이 그냥 노냥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하고 가거든요, 지금. 그러니 ‘그놈이 고정됨이 없이 그렇게 돌아가니 그놈이 바로 공했구나. 공했으니깐, 그놈이 공했으니깐 없다.’라는 얘기가 나와요.
그런데 있는데 어찌 없게 되느냐. 너무 고정됨이 없이 찰나 찰나 화하면서 돌아가니까 어떤 거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이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간 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있으면서도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서도 내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 포괄적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나 하나가 돌아가는 게 아니라 모든 게 포괄적으로 돌아가서 그 포괄적으로 돌아가는 지혜로운 마음이, 둘 아닌 마음이 생기게 돼서 안에다가 모든 거를 ‘아, 이 내면의 모든 것들도 둘이 아닌데 나와 다른 게 있느냐, 둘이 아닌데.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도 둘이 아니요. 그러니까 너만이 할 수 있다.’ 하고 하나의 안테나한테 통신만 자꾸 넣으란 말이에요. 그러면 거기서 통신이 나와서 마음을 조절하고 주위 사람 마음 조절하고 또는 주위의 사람의 마음을 조절하니까 행동도 조절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로 이론으로 몸으로 이렇게 남을 다스리려고 그러면 안 된다 이겁니다. 이 마음속의 마음으로 다스리면서 바로 말로 유하게 대치해 나갈 수 있는 거, 그러니까 부드러운 말과 부드러운 행동으로 대치를 하면서 이 안에서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려야 된다 이거예요. 그것이 전부 마음 공부하는 재료다 이거예요. 그리고 실천이다 이거예요. 그렇게 하다 보면 내 혼은, 혼이 거기에 다 포함돼서 들어가서 그 심검이 되듯이. 심검이란 사람들을 건지고 살리는데 그 광력이 쳐들기만 해도 그냥 온 누리에 다 비칠 수 있다 그거거든요. 그 심검이라는 거, 심검으로 비유를 하자면 그렇단 얘기예요.
하물며 검을 만드는 데도 자기의 혼을 다 넣어서 심검을 만들어야 그 검이 그대로 써질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금방 툭 치기만 해도 부러지고 그 칼은 못 쓰는 칼이에요. 그렇듯이 우리는 이 공부를 해서 하늘을 받치고 굴릴 수 있어야 된다 이거예요. 이렇게 사람 한 번 나는 것도 천 년 만에 한 번 나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러니 꼭 그렇게 해야 돼요.

태아의 성 감별에 대해서


요즘은 과학기술이 발전을 해 가지고 뱃속에 있는 태아의 성을 감별을 해서 남자애들을 많이 태어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남자애들만 많이 태어나게 하면 나중에 그 아이들이 커서 성 비율이 맞지도 않을 것이고, 어떻게 보면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잘못된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예전에 한때 중국에서도 그런 예가 있었습니다. 남자를 낳아야 된다 하는 생각에서 여자들을 낳으면 엎어 놓는 그런 예가 많았답니다, 예전에 어른들 말 들으면요. 그랬는데 그 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여자가 상당히 없었습니다. 그 고통이란 말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없었던 그 여자들하고, 지금 시대에 여자가 귀하다 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 줄 아십니까? 남자들은 난폭해지고 외려 망가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거는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의 근원이라고 봅니다. 여자가 땅이라고 봅니다. 일체 만물만생을 다 소생시키고 키우는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아버지인 남자는 위에서 따뜻하게 태양을 주고 또는 물을 주고 바람도 주고 다 주지마는 이것을 서로 본래 땅에서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땅 밑창도 역시 하늘이 될 수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아니라 만민의 어머니라고 할 수도 있죠. 땅이, 흙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게 공중에 있기 때문에 밑에서도 위에서도 그것은 얼마든지 받을 수가 있고, 우리 인간의 마음의 등불이 있듯이 태양보다 외려 마음의 근본이, 태양의 근본이 마음의 근본이라는 그 말과 똑같이 우리는 아래 위에서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만물을 소생시키고 기를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지금 가만히 상황을 보세요.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애들 기를 때는 주접이 들지 않게 기르지만, 어머니가 없고 아버지가 기를 때는 애들 망가지기가 십중팔구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딴 어머니를 얻어도 올바르게 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잘 자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걸 감수하고 다 자라 가지고선 어느 때에 가면 ‘아, 이렇구나.’ 하고 그 응어리를 풀고 이해하면서 사는 거지 다 자라기 이전에는 참 그게 어렵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약에 여자가 앞으로 말입니다, 여자가 아주 적다면 앞으로 큰 문제라고 볼 수 있고 또는 여자가 위력이 아주 높은 경지에 오른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때는 남자가 구걸을 하러 다녀도 툭툭 튕겨야 할 지경이 돌아오겠죠. 지금 여자들이 천대받듯이 말입니다. 똑똑해도 여자들이 그냥 지금 많으니까, 앞으로는 점점점점 여자가 적어 들어가서 그렇게 할 이치도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참 어려운 문제죠. 그래서 양면이 다 갖추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똑같이. 너무 이쪽이 많아도 안 되고 이쪽이 적어도 안 되고 항상 고루 갖추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위기의 상황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자기가 당장 죽을 병에 걸렸을 때는 뭐라도 잡으려고 하는 그런 습성이 있는데요. 제 주변에도 암에 걸려서 병원에서는 내놓은 사람인데, 타 종교의 어느 기도처에서 기도를 해서 나았다는 그런 얘기가 있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참 절실하게 거기 매달려서 병이 일단 낫게 되면 그 사람은 거기에 정신없이 끌려가거든요. 그렇듯 자연히 끌려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저희들이 중심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병이 나거나 병자가 생기거나 이런다면 일단 자기 주인공에 놓으려고 하지 않고 벌써 병원이나 약국부터 생각이 나거든요. 그게 자기가 누구를 의지해서 안정을 하려고 그러거든요. 근데 남이 나를 알뜰히 보살펴 주는 법이 없어요. 만약에 내가 기계라면 조립한 장본인이 그 기계를 더 잘 알아요. 그리고 조립한 사람이 더 잘 알지 딴 사람이 더 잘 알지는 않아요. 아무리 의사나 박사들이 인체에 대해서 잘 알아서 의학적으로 한다 하더라도 40%, 50%를 넘지 못해요.
내가 주인공에 놓고 관하면 ‘아! 여기서 이렇게 파워를 일으켰으니까.’ 하고 알게끔 돼 있거든요. ‘여기가 아프다.’ 그러면 여기 안 아프게 하는 그런 음식물이라든가 이런 것도 별다른 거 아닌데도 약이 될 수 있는 건데, 똑 병원에 가서 그거보다 더 부작용이 나는 약을 해다 먹고야 마음이 편안하게끔 되거든요. 몸은 망가지고 마음은 편안하다 이겁니다. 몸은 일어나고 마음은, 좀 마음도 편안하고 몸도 편안해야 될 텐데, 마음은 맡겼으니까 하면서도 몸은 몹시 아프니까 항상 이게 부대끼는 거예요. 그러면 양면이 다 괴로운 거죠.
그런데 원주에 사는 어떤 분은 병원엘 다니다 다니다 못해서, 병원엘 다녀도 영 낫질 않으니 어떡하면 좋겠느냐 그래서 그때에 무슨 꼭 낫는다 안 낫는다 그런 것도 없이 하여간에, 너무 기름 있게 먹지도 말고 자기가 조절을 해서 자기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으라고 그랬더니 병원에서 그것 하나도 먹지 말랬대요. 그러나 요구하는 대로 먹고 죽으나 요구하는 대로 안 먹고 죽으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죽는 거는! 그래서 요구하는 대로 먹어라 이겁니다. 그런데 어느 결에 그렇게 해 가지고 그 돈 200원 버리고서 나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 일 그것도 역시 마음입니다, 마음. 그런데 왜 굳이 나를 살려 달라고, 타의에다가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구원을 해 달라고 막 빌어야만 합니까? 자기를 형성시키고 끌고 다니는 자기 주인공이 있는데 왜 자꾸 바깥으로만 끄달리면서 사느냐는 겁니다. 생각이 하나가 아니고 눈도 하나가 아니고 귀도 하나가 아니라니깐요. 우주를 덮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눈 하나 가지고서 고정되게 하나만 본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루도 그 눈 하나 가지고 수십 개를 봤지 않습니까? 자꾸 바꿔가면서 보았지 않습니까. 바꿔 가면서 듣죠, 바꿔 가면서 생각하죠. 바꿔 가면서 움죽거리죠, 바꿔가면서 먹죠, 말하죠. 그것이 어떻게 고정되게 하나입니까?
그러니 모두 놔라 이거예요. 모두 맡겨 놔라 이겁니다. 놓으라니까 무슨 놓을 게 있어서 놓으라는 게 아니라 그대로 믿고 거기에서밖에는 해결 못하고 거기에서밖에는 감사함을 주지 못하고, 거기에서밖에는 나를 끌고 다니지 못하고 거기에서밖에는 지혜로운 마음이 생겨서 모두 품안으로 안을 수도 있고 지혜롭게 해나갈 수 있다 이겁니다, 거기밖에는.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은 ‘거기밖에 없다’ 하고 믿고 나가라 이거죠. 그것이 놓는 거라고요.
그것이 놓는 거기 때문에 한 번 놓고 두 번 놓고 자꾸자꾸 놓아 들어가면 업보로 뭉쳐진 중생들이 다 그냥 보살로 화해 버려요. 그러니 얼마나 편안하고 좋습니까. 거기에서 호법신도 생기고 수호신도 생기고, 화신도 생기고 법신도 생기고 모두가 수효가 없이 생기니 얼마나 마음이 편안하고 좋으냐고요. 가정이 화목해지고 하는 일마다 귀인이 생기고 발이 넓어지고 속의 모든 두려움이 없어져 떳떳해지고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 이 공부는 필수적으로 해야 된다는 문제죠.
그냥 묵묵히 일체를 나와 같이 보는 마음으로만 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실천이 되는 거죠. 우리가 공부 공부 하지만 사실 공부라는 이름도 붙이지 말고, 지금 바깥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일들, 그건 불쌍한 게 아니라 애처롭습니다. 여러분은 산 사람, 산 물질만 봐도 애처로운 일이 많은데, 죽은 영령들이 부모 자식을 위해서 자기를 던지는 마음, 애처롭게 끌고 다니는 그 마음, 세상에 그렇게 애처로울 수가 없습니다. 인연이 뭐고 사랑이 뭐길래, 자식이 뭐고 부모가 뭐길래, 남편이 뭐고 아내가 뭐길래 그렇게들 인연줄이 질기고 질겨서 그걸 놓지 못해 붙들고, 애처롭게 피를 흘리는 그런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람사람이 누구나가 몰라서 그렇지 여기서도 살고 있고 저 별성에도 살고 있다. 여기 모습대로 거기도 그 모습을 가지고 사는데 그건 화신입니다. 여기는 이것이 육신이지만, 그 모습들은 화신으로서 모두 보현보살로 화해서 영계들이나 산 사람들이나 다 보호하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서 화해서 직속 왕래를 해 보세요. 얼마나 떳떳한가. 그런 일이 어디 있을까 이러죠. 그런 일이 왜 없습니까! 빛보다 더 빨리 왕래를 하는데. 그러니 여러분은 기복으로만 만날 빌고 ‘아이구, 나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제발 좀 이러지 말고, 죽으면 죽고 살면 살지 어차피 한 번 죽을 거 뭐 또 죽을까 봐 그렇게 살려 달라고 애를 씁니까?
그전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오직 팔랑개비대만 쥐고 다녔다고요. 그게 돌아가든 안 돌아가든 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대만 쥐고 다녔으니까. 그러니까 우선에 내가 대를 쥐면 나한테도 바람이 있죠. 지수화풍이 다 내 안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건 저절로 돌아갈 거라고요. 나는 그 대만 붙들고 다녔기 때문에 내 육신이 고통을 받든지 안 받든지, 죽든지 살든지 상관을 안 했으니까 고통이 없었다 이 소리예요. 그러니 진짜로 자기의 자성불을 믿고서 악과 선을 다 놓을 수 있다면 집안에서 병 문제가 생겼어도 스스로 해결하고 자유스럽게 살아갈 수 있다 이겁니다, 고통받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누가 여러분 몸을 아프게 하고, 누가 여러분을 가난하게 하고, 누가 여러분을 그렇게 뼈저리게 건건이 괴로움을 주겠습니까? 여러분이 과거에 살던 인연에 의해서 그게 업보가 되고 그래서 지금 건건이 거기에서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의 탓도 할 것 없고 누구 원망도 할 것 없이 내 탓으로 돌렸을 때, 바로 나로부터 그 일을 벌여 놓은 거니까 나로부터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문제죠.

업을 소멸하며 살아가려면


우리가 한생각을 낼 때 주인공 불성 자리에서 내는 거하고 그냥 무명에서 낼 때가 있습니다. 만약 무명에서 한생각을 내면 그게 인제 고통의 원인이 되는데요, 그것을 12연기의 가르침에서 환멸 연기가 되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신 줄 압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살아가는 것이 도리어 업을 짓고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데요, 우리가 업을 짓지 않고 업을 사하면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실천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요.

무명에서 그러는 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내 몸이 있다고 인식하고 들어가면 그 생각하는 것도 전부 그렇게 어리석거든요. 전부 그렇게 미약하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에 외려 고를 태산같이 불러오는 거고 짊어지는 거고, 그것을 우리가 한 발짝 한 발짝 떼어 놓는 대로 고정됨이 없이 화해서 돌아간다 이거를 알면 한생각을 내도 오히려 천만 가지가 멸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전부 거기서 하는 거라 이거예요. 그래서 한생각을 잘하면 육근이 여섯 개의 부처가 되고, 전체가 다 부처가 되고, 잘못 생각해서 바깥으로 끄달리면 여섯 개의 도둑이 된다는 얘기예요. 마구니가 되는 거죠. 세세생생에 빠져나올 길이 없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한생각을 잘하라’ 이런 뜻입니다. 생각하고 논의하고 그래서 될 일이 아니고 한생각, 보는 순간 듣는 순간 한생각 잘하면 그게 법이 된다 이거예요. 법이 되면 우리가 가만히 한 발짝 떼 놓지 않고도 그 보살 응신들이 다 해결을 해요. 우리가 지금 한 발짝 떼어 놓지도 않고 이렇게 사는 겁니다. 본래 한 발짝 떼어 놓은 바가 없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직결돼 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 줘야 되는데 한 발짝도 떼어 놓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별나게 사는 그걸로만 돼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벗어나기가 어려운 거예요.
우리가 찰나찰나 화해서 나투고 끝없이 돌아가는 이 진리를 파악한다면 우리가 할 거 다 하면서도 함이 없이 한 것이 되죠. 어디를 갈 때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지고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진다고요. 우리 생활이 그런 생활이거든요. 그러니 발자국 떼어 놓는 동안에 어떠한 발자국을 떼어 놨다고 말하겠습니까? 어떤 발은 떼어 놓을 때 내가 했고 어떤 발은 떼어 놓을 때 내가 안 했습니까? 떼어 놓은 대로 없어지는 것을. 지금 내가 말을 하면서도 과거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미래도 바로 과거와 교차로에서 우리가 하기에 달렸고 마음먹기에 달렸고, 마음을 먹어도 한마음을 먹기에 달렸다 이겁니다.
내 몸속에도 생명들이 많으니까 한 개체를 더불어 한마음, 이 모두가 우리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할 일이고 진리를 파악해야 할 일이고 진리 속에서, 악과 선, 그 가운데서 내가 악에는 어떡하고 선에는 어떡해야 하는 그 도리를, 보이지 않는 무의 세계에서 용법으로 모든 것을, 즉 말하자면 ‘공법’이라고 해도 되고 ‘용무’라고 해도 됩니다. 그렇게 함이 없이 할 수 있는 도리가 있다면 어떠한 거든지 손색이 없을 겁니다.
실천을 항상 해 보십시오. 자기가 실천해야지 일체제불이 있다 하더라도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실천을 해서 감응이 되고 감응이 되면 한생각 해 보시고 ‘아, 이렇게 가는 거로구나.’ 하고, 또 상대를 만나 보면 내가 차원이 얼마나 됐는지도 알게 됩니다.

불교계의 시련에 대해서

요즘 들어서 불교계와 관련해서 이런 저런 안 좋은 일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불법을 통해서 이 사회가 밝아졌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저로서는 그러한 일들이 불교계 전체를 호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한 불교계의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것을 여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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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사람들이 넓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다 불상사라고 하지만 온기가 물 밑 찬 데까지 서로 대치를 해 주지 않는다면 살 수가 없고 대치를 해 주지 않고 소용돌이치지 않는다면 밑에 있는 게 못 삽니다. 그래서 밑의 것이 위로 올라오고 위의 것이 밑으로 내려가야만 같이 먹고 사는 겁니다. 서로 주고 서로 살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다 물도 모든 생명들이 있기 때문에 사는 거지 생명들이 없으면 물도 죽는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 인간들이 살아나가는 데도 역시 그렇습니다. 인간들뿐만이 아닙니다. 물에서 사는 것이든지 들에서 사는 것이든지 다 그렇죠. 들에서 풀을 태우는 일들도 다시 새싹이 나와서 다시 먹게 하기 위한 도리도 됩니다. 그게 자연적인 활동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까 어느 누가 잘못해서 불이 났다 이러기보다는 ‘더불어 같이 살기 위해서다’ 하는 것이죠. 그러면 태풍이 일어서 사람이 많이 죽는데 그거는 어쩐 일로 그러냐 이러겠죠. 넓게 본다면 그것 역시 마찬가집니다.
어떤 사람은 외아들을 데려갔다고 하는데 그것도 쓸모가 있기 때문에, 외아들이고 아니고 간에 다시 대치해서 내보낼 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깐 죽는 것도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사는 것도 그냥 사는 게 아니에요.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이 살고 있는 겁니다. 그냥 자동적으로 자유스럽게 사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공기주머닐 한 발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 반면에 모든 게 자유스럽게 살 수 없다는 거죠.
우리가 공부하는 이치는 그런 것을 다 순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크게 돼라는 얘기죠. 그럼으로써 대치를 다 할 수 있고 그런 거죠.
보십시오. 바다의 물이 파도를 이루지 않고 곱게 잔잔한 대로 그대로 있다면 어떻게 물속 깊숙하게 있는 그 고기들이 살 수 있으며, 위에서 다니는 고기들이 살 수 있겠습니까?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뒤집어 놔야 밑에 있는 양식을 위에서 먹고, 위에 있는 양식을 밑으로 내려보내고, 태양열도 밑으로 내려보내고 온기와 찬 기를 서로 섞어서 다 공식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공식할 수가 있기 때문에 공용도 할 수가 있죠.
모든 게 교훈 아닌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련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되죠. 이건 바로 공생 공심으로서 공용하기 위한 사부대중의, 즉 말하자면 순환이라고 그럴까요? 정맥·동맥이 서로 돌아가서 순환이 돼서 이 몸뚱이가 아주 건강하게 잘살 수 있게끔 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깐 입 꼭 다물고 눈 지그시 감고 싱그레 웃으며 돌아서서 부지런히 정진하면 되는 일입니다. 말로 만들어진 일들은 자취없이 사그라지게 되어 있으니까요.
200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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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