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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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부 5강 혜능의 혁신, 자성불(自性佛)의 제창
번뇌, 지혜, 그리고 불성 사이

혜능은 불성을 전면에 세움으로써 돈교의 가르침을 제창했다. 자성불(自性佛), “너는 이미 부처이다”가 이후 선의 표어가 되었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을 전폭 신뢰함으로써 그는 불교사의 한 기원을 열었다.
그런데 이 불성이 어떻게 해서 타락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어둠에서 솟아나 본래의 빛과 힘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것이 궁금할 것이다. 바탕인 불성과 장애물인 번뇌, 그리고 그것을 타파하는 지혜는 불교의 삼각코드라 할 수 있는데, 혜능은 이 관계를 금강과 영양각, 빈철의 삼각관계에 빗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왜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했을까
9. “우리 석가 본사께서는 <금강경>을 사위국에서 설하셨다. 수보리가 물음을 제기한데 인연하여 대비(大悲)로 설하셨는데 수보리는 그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부처에게 이 법(法)에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했는데, 후인들로 하여금 수지(受持)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은 말한다. ‘부처가 수보리에게 고했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다. 너는 이 이름으로 마땅히 봉지(奉持)하라.’ 여래가 그 법에 어째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붙였느냐 하면, 금강(金剛)은 이 세상의 보물로, 그 특성이 매우 날카로워 능히 무엇이든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我釋迦本師說金剛經在舍衛國. 因須菩提起問, 大悲爲說. 須菩提聞說得悟, 請佛與法安名令後人依而受持, 故經云佛告須菩提. 是經名爲金剛般若波羅密, 以是名字汝當奉持. 如來所說金剛般若波羅密, 與法爲名. 其意謂何. 以金剛世界之寶, 其性猛利能壞諸物.)
-앞에서 적었듯이 금강은 1) 지극히 견고하고, 2) 지극히 예리하며, 3) 지극히 비싼 물건이다. 우리 마음속의 불성(佛性)도 또한 그렇다. 혜능은 여기서 금강을 반야(般若)의 특성으로 읽기보다,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한 영원의 불성의 상징으로 본다. 이 해석은 통념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사람들은 이 해석 앞에서 혜능이 불성을 실체화 절대화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이 문제는 다음에 논의하기로 하고 우선 혜능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하자. 다음은 그의 독창적 비유이고 해석이다.
금강과 영양각, 그리고 빈철 사이
10. “쇠(金)가 비록 지극히 견고하나, 영양각이 능히 무너뜨릴 수 있다. (여기) 금강(金剛)은 불성에 비유했고, 영양각은 번뇌에 비유된다. 금이 비록 단단하나, 영양각이 능히 부술 수 있다. 불성이 비록 견고하나, 번뇌가 능히 어지럽힐 수 있다. 번뇌가 비록 견고하나 반야가 능히 부술 수 있다. 영양각이 비록 견고하나, 빈철(賓鐵)이 능히 깨트릴 수 있다. 이 이치를 깨닫는 사람은 뚜렷이 자신의 본성(佛性)을 본 것이다.” (金雖至堅, 羊角能壞. 金剛喩佛性, 羊角喩煩惱, 金雖堅剛, 羊角能碎. 佛性雖堅, 煩惱能亂. 煩惱雖堅, 般若智能破. 羊角雖堅, 賓鐵能壞. 悟此理者了然見性.)
-이 비유는 다시 말하지만 혜능의 독창이다. 새로운 비유와 상상력을 통해 그는 한 스타일을 만들었다. 불교의 삼 요소는 다름아닌 불성과 번뇌, 그리고 지혜이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불성은 목표, 번뇌와 무지는 문제, 그리고 반야는 방법에 해당한다. 이들 사이의 삼각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 안목에 따라 서로 다른 불교가 펼쳐졌다. <대승기신론>은 이 세 축을 각기 본각(本覺), 불각(不覺), 시각(始覺)으로 설정하여 불교의 원리와 구조를 보여주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좀 거칠지만 이렇게 단순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붓다 초기에는 문제에서 출발해서 방법으로 나아갔다면, 아비달마와 유식은 문제의 분석에 치중했고, 중관은 세 번째 ‘지식’의 성격과 발휘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다. 원효가 <대승기신론>을 주목한 이유는 무엇보다 이 짧고 간결한 저작이 위의 세 항목 전체를 유기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소(疏)>와, <별기(別記)>에서 그 구조와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아무래도 ‘문제의 분석’쪽에 더 깊고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이장의(二障義)>라는 책을 따로 썼다. <대승기신론>에서 ‘무지로 오염된 마음(不覺染心)’의 모습으로 제시한 번뇌애(煩惱碍)와 지애(智碍)에 대한 상세하고 독창적 해석이 여기 담겨 있다.

혜능의 혁신, 금강불성(金剛佛性)
-이에 대해 혜능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그는 불각(不覺)의 어둠을 분석하거나, 시각(始覺)의 훈련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본각(本覺)에 철저하다! 인간의 바탕은 번뇌와 망상의 기름띠에도 불구하고 본래 광명을 발하고 있다는 믿음, 그 돈오(頓悟)의 정신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 강조는 자칫 점수(漸修)의 수련을 소홀히 하고, 창광자자(猖狂自恣)의 광태로 흐를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믿지 않는 자가 어떻게 남을 존중하겠는가. 인간의 몸은 그 자연 속에 고유한 이성이 거주하고 있다. 그 소리에 다만 귀를 기울이면 거기 모든 것이 있지 않을까.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남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혹시 열등감과 오만의 자의식일 때가 적지 않다. 방하(放下), 즉 놓아줄 때 일은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잊어버림으로써 우리는 기억한다.
-혜능은 내 속의 이성의 빛, 그 불성이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나, 번뇌의 바람에 이리저리 어지럽게 흔들린다고 말한다. 그건 더 설명이 필요없이 누구나 알 수 있다. 우리가 늘 겪고 있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 쳇바퀴로부터 벗어나자고, 그 윤회의 고리를 끊어보자고 우리는 불교를 찾는다.
이에 대해 혜능은 말한다. “걱정하지 마라. 불성은 어떤 번뇌나 업(業)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결코 소멸되는 법이 없으니…” 이것은 정말 정말 위대한 복음이다. 우리를 속이는 삶에 대해, 절망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는 이 꺼지지 않는 불꽃에 희망을 붙든다.
그러나 번뇌 또한 두텁고 완강하다. 겹겹이 둘러싼 그 어둠은 흡사 전복된 유조선에 오염된 바닷가같다. 나는 기름에 덮인 가마우지를 볼 때마다 번뇌에 덮인 불성을 떠올리는 버릇이 있다.
그렇게 강하고 두텁고 집요한 번뇌도 그러나 불성의 불꽃에서 발하는 지혜의 공격과 정화력 앞에서 손을 든다. 역시 관건은 지혜이다. “마하, 반야, 바라밀!”
11. “<열반경>에 이르기를, ‘불성(佛性)을 본 사람은 중생이라 하지 않는다. 불성을 보지 못한 사람을 중생이라 한다’고 했다.” (涅槃經云, 見佛性者不名衆生, 不見佛性是名衆生.)
-혜능의 돈오관이 여기 드러나 있다. 부처와 중생은 ‘마음’의 한 ‘특성’을 자각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렸다. 그 갈림길은 한 순간에 결정된다. 그 존재물음은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순간순간 우리를 다그친다는 점에서 견성(見性)은 끝나지 않는 도정이다. 혜능의 자성불(自性佛)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중생으로서 저 멀리의 부처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처와 중생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시계추들일 뿐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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