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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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선사들의 수다/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지대방 한담은 성역이 없다. 위로는 불조부터 아래로 행자까지의 야사(野史)를 다루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전방위로 터치하다가 사이사이에 우스개 소리로 양념도 한다. 잡담은 머릿 속을 어수선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진솔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또 법담으로 이어질 때는 그 자리에서 살아있는 선어록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해제 후 마음맞는 도반끼리 함께 만행길을 나서는 것은, ‘벗이 수행의 전부’라는 부처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출가생활의 큰 즐거움이다.
하지만 ‘떨어져서는 죽고 못 사는’ 어느 도반이 인도로 배낭성지순례를 같이 갔는데 ‘나갈 때는 함께 가더니 들어올 때는 각각 오더라’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척박하고 낯선 환경 속에서 서로 배려하고 마음을 맞추어가며 긴 시간을 함께 다닌다는 것이 어찌 녹록한 일이겠는가.
덕산 선사 밑에서 공부한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스님과 암두전활(巖頭全豁 828~887)스님, 흠산문수(欽山文邃 생몰연대미상) 스님은 자주 함께 다녔다.
어느 겨울날 폭설을 만나 외딴 암자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몇 날밤을 같이 지냈다. 고지식한 암두 스님은 내내 꼿꼿이 앉아 좌선을 하였고, 느긋한 설봉 스님은 맨날 누워서 잠만 잤다. 보다 못한 암두 스님이 “흠산 스님과 행각할 때도 곳곳에서 누를 끼치더니, 또 잠만 자면서 나를 번뇌롭게 한다”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설봉 스님은 “맨날 참선한다고 폼만 잡고 있으니 뒷날 사람들 꽤나 홀리겠다”고 덜 깬 목소리로 한마디했다. 지청구에 못 이겨 자다가 일어나 눈을 비비며 하품 속에서 내뱉은 말이겠지만 언중유골(言中有骨)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사람은 객실에서 함께 묵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각각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하게 되었다
먼저 암두 선사가 말했다.
“조그마한 나룻배를 하나 얻어 낚시꾼과 함께 앉아 한 평생을 보내고 싶다.”
별다른 욕심도 없고 은둔자적인 기질이 다분하다. 아니나 다를까, 뒷날 법난을 만나 속복차림으로 악저호에서 뱃사공 노릇을 하였다. 어쨌거나 타고난 품성 자체가 소박한 것 같다.
이어서 흠산 선사가 말했다.
“큰 도시에 살며 절도사에게 스승의 예우를 받으면서 비단옷을 입고 화려한 평상에 앉아서 금 그릇 은 그릇에 담긴 밥과 찬을 먹으면서 한 평생을 지내고 싶다.”
누군들 이런 마음이 없겠는가.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선종의 ‘무소유’ 라는 가풍 속에서 이런 불온한(?)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흠산 선사는 어찌 보면 자기의 본마음을 남에게 억지로 가리지 않겠다는 그 순수함이 오히려 돋보이는 면도 있다.
마지막으로 설봉 선사가 말했다.
“네 거리에 선원을 세우고 대중을 법답게 공양을 시키겠다. 만약 어떤 납자가 길을 떠나면 내가 바랑을 메고 지팡이를 들고서 문 밖까지 잘 전송하고 그가 몇 걸음을 디디면 ‘아무개스님’ 하고 부르고 나서 고개를 돌린다면 ‘먼 길에 조심 하십시오’ 라고 하리라.”
그 말대로 그의 회상은 융성한 총림을 이루었고 많은 납자들을 제접하면서 살았다.
이 세 선사의 수다를 종합한다면 ‘슈퍼승려’상(像)을 각각 나누어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때로는 도가적인 은둔자풍으로도, 때로는 유가적인 벼슬살이풍으로도, 때로는 불가의 청정승가 구성원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양한 중생세계 속에서 어떤 곳에 살더라도 수처작주(隨處作主)해야 함을 각자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200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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