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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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부 4강 <금강경> 육조 해 서문 (1)/한국학중앙연구원
자성의 노다지로 ‘부자 되세요’

대개 서문은 책의 표정이다. 거기 지은이의 수준과 스타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3회에 걸쳐 혜능의 <금강경 구결>, 그 서문 전체를 소개해 주기로 한다. 혜능은 이 짧은 글 안에 자신이 읽은 <금강경>의 근본 취지와, 이 책을 만나 소를 짓기까지의 인연을 압축적으로 담아 놓았다.
번역은 내가 짐짓 고투로 했고, 간간이 어림없는 토를 달아놓았다.
1. “무릇 <금강경>은 무상(無相)을 종(宗)으로 하고, 무주(無住)를 체(體)로 하며, 묘유(妙有)를 용(用)으로 한다.” (夫金剛經者, 無相爲宗, 無住爲體, 妙有爲用.)
-육조 혜능의 불교가 여기 강령으로 선포된다. 무상과 무주는 <금강경>이 본문에서 늘 강조하고 있는 바이고, 1부 서론(別記)에서 지리장황하게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여기 마지막 “묘유의 용”은 금강경이 다루지 않는다. 다른 불교 경전도 마찬가지인데, 앞 강의에서 내가 불교는 ‘반쪽’이라고 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이 부분은 길을 밟는 각자에게 맡겨져 있다. 불교는 이를테면 터를 고르는 정지작업만 해 줄 뿐, 거기 무엇을 세우고 지을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이것은 불교의 필연적 선택이다. 만일, 짓기로 작정하면, 그때 불교는 도그마가 되고, 억압이 되어 유연성과 적응력을 잃고 만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곳을 아예 의식하지 않다간 불교는 정재(淨財)를 좀먹는 기식 집단으로 떨어지기 쉽다. 이 두 해협 사이를 잘 지나가야 진정 여법(如法)한 불교가 될 수 있다.
2. “달마가 서쪽에서 건너와 이 경전의 뜻을 전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理)를 깨닫고 성(性)을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自從達磨西來, 爲傳此經之意, 令人悟理見性.)
-선종의 근본 취지도 <금강경>에 있다!
3. “그런데 사람들이 자성(自性)을 보지 못하기에, 견성(見性)의 법(法)을 세웠다. 세상 사람들이 만일 진여본체(眞如本體)를 분명히 보았다면, 굳이 법(法)을 세울 필요가 없다.” ( 爲世人不見自性, 是以立見性之法. 世人若了見眞如本體, 卽不假立法.)
-요컨대 <금강경>은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다.
4. “이 경전을 독송하는 사람은 무수하고, 칭찬하는 사람도 가이없고, 주석하고 해석하는 사람도 800여명이나 된다. 말하는 도리(道理)는 각자의 본 바에 따르는데, 견해는 다르더라도 법(法)은 둘이 아니다. 오랫동안 익힌 상근(上根)은 한번 듣고 바로 이해하지만, 오래 묵은 지혜가 없으면 많이 독송해도 부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이 경전을) 해석하여 학자들의 의혹을 풀려고 한다. 만일 경전만 보고도 취지를 분명히 파악한 사람이라면 굳이 (나의 구구한) 해설을 빌릴 필요가 없다.” (此經讀誦者無數, 稱讚者無邊, 造疏及註解凡八百餘家, 所說道理各隨所見. 見雖不同法卽無二, 宿植上根者一聞便了, 若無宿慧, 讀誦雖多, 不悟佛意. 故解釋其義, 庶斷學者疑心. 若於此經, 得旨無疑, 卽不假解說.)
-자상한 해석이 필요한 사람, <금강경>만 보고도 아는 사람, 그것조차 군더더기인 사람이 있다. 나는 <대승기신론>의 간략하면서도 핵심적인 설계도에 끌리는데, 그게 번다하다 하여 화두를 드는 사람도 있다. 화두조차 틀에 잡힌 격식이라 하여 전통을 깨고 아예 격외(格外)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이 지점에 불교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도 불교의 생명은 이들 격외의 실험들로 유지 확대되어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불교사는 원래 새로 쓰는 것이지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5. “본시 여래가 선법(善法)을 설하는 것은 범부들의 불선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從上如來所說善法, 爲除凡夫不善之心.)
-자성(自性)은 ‘범부들의 불선한 마음을 제거하면’ 저절로 드러난다. 거기 이르는 방법과 스타일은 달라도 이르고자 하는 곳은 같다…. 그러나, 또한 서로 다르다. 다음에 보듯, 불선한 마음을 제거한 점에서는 서로 같겠지만, 그 마음을 쓰는 묘유(妙有)의 용(用)은 서로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6. “경(經)이란 성인의 말씀이니, 사람들이 듣고, 범(凡)에서 성(聖)을 깨달아, 영원히 미혹(迷心)을 그치게 하기 위함이다. 이 한 권의 경(經)은 중생의 성(性) 가운데 본래 가지고 있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는 다만 문자만 독송하게 될 것이다. 만일 본심을 깨닫는다면, 비로소 이 경(經)이 문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經是聖人之語, 敎人聞之, 從凡悟聖, 永息迷心. 此一卷經衆生性中本有. 不自見者, 但讀誦文字. 若悟本心, 始知此經不在文字.)
-<금강경>의 취지는 <금강경>의 밖에 있다!
7. “다만 (자신의) 자성(自性)을 분명히 밝힐 수 있다면, 그때 일체의 제불(諸佛)이 이 경(經)에서 나왔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지금 다만 우려되는 것은, 세인(世人)들이 자신 밖에서 부처를 찾고, 밖을 향해 경(經)을 구할 뿐, 내심(內心)을 발하지 않고, 내경(內經)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해설(訣)을 지어 학자로 하여금 내심경(內心經)을 지녀, (자성을) 스스로 분명히 보게 하려는 것이다. 청정한 불심이 헤일 수 없고,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나중에 학자가 이 경전을 읽다가 의문이 있으면, 이 해설을 보면 의심이 석연히 풀릴 것이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但能明了自性, 方信一切諸佛從此經出, 今恐世人身外覓佛, 向外求經, 不發內心, 不持內經, 故造此訣, 令諸學者持內心經, 了然自見淸淨佛心過於數量不可思議. 後之學者讀經有疑, 見此解義, 疑心釋然, 更不用訣.)
-<금강경>은 마음의 진실 하나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밖을 향해 찾지 말라. 자기 속에 있지 않은 것은 그 누구도 가져다 줄 수 없으니… 그 진실이 마음 안에 ‘이미’ 있다면, 정말, 경전은 아무 필요가 없지 않은가. 단 한 군데 쓸모가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이미 거기 있음을 알려주는 즉 지시(指示)에 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왜 손가락은 보고 있냐?”
경전이 짚어주고자 하는 마음의 진실은 어디 꽁꽁 숨어있거나 복잡하게 엉켜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한 순간에 알려진다. 여기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돈오(頓悟)이다. 그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모종의 액션을 취하게 된다. 성철 스님이 이 점에서 돈오돈수를 말하셨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이 액션의 강도와 지속성은 연습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점수(漸修)라고 한다.
8. “바라건대는 학자들이 광석 가운데 금의 성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 지혜의 불로 녹이고 제련하여 광석은 버리고 금을 남기기를….” (所冀學者同見石廣中金性, 以智慧火鎔煉, 石廣去金存.)
-<금강경>은 ‘이미’ 내 마음 속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왜? 번뇌가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번뇌망상의 잡석을 지혜의 용광로에 녹여 제거하면, 그 속에 있던 불성의 금이 나타난다. 그 황금빛 노다지로 다들 “부자 되세요!”
200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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