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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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별난 이름을 가진 당우들/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염화실·퇴설당’ 서정적 분위기 물씬 풍겨
과거제 문란 꼬집은 ‘선불장’ 사회현실 반영

선종총림의 당우들은 그 호칭까지도 선종의 정체성을 대변해야 했다. 서정성이 짙은 이름이 있는가 하면 비장한 결의가 엿보이는 명칭 그리고 조금은 비꼬는 듯한 냉소적인 명패까지 여러 가지가 어우러져 선종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편액을 달고있다.
서정적인 분위기는 염화실(拈花室)과 퇴설당(堆雪堂)이 대변한다. 연꽃과 흰눈이라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선지식들을 만나면 한 차원 달라진다. 대표 당우라고 할 수 있는 염화실은 선종의 할과 방이라는 거친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꽃’에서 기원한다. 가섭존자가 부처님께서 들고 있는 연꽃 한송이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었다는 ‘염화미소’ 이후에 ‘염화실(拈花室)이 등장했다.
이제 염화실은 산중 최고어른 내지는 그 절을 대표하는 선지식이 머물고 있는 거처의 대명사가 되었다.
혜가대사가 달마대사를 만나 법을 얻기 위하여 눈이 무릎까지 쌓이도록 밤새 마당에 서 있었다는 고사에서 연유하는 퇴설당(堆雪堂)도 염화실과 격을 같이 하는 당우이다. 꽃밭에서 그리고 눈밭에서 이루어진 전법(傳法)을 상징한다. 해인사에 가면 한 당우에 염화실과 퇴설당이라는 두 가지 편액이 사이좋게 붙어있다.
결연한 의지표명의 대표적 명칭은 ‘사관(死關)’일 것이다. 송나라 고봉원묘 스님의 ‘사관(死關)’은 죽기를 각오하고 출입자체를 스스로 봉쇄해버린 용맹정진처의 이름이다. 그 위치는 천목산 사자바위 서쪽 동굴이었다. 사다리가 없으면 올라갈 수 없는 곳인데도 그 사다리마저 치워버리고 모든 인연을 끊고 공부했다.
열반 후에는 제자들이 그 자리에 선사의 전신사리 그 자체로 부도탑을 세웠다. 물론 이는 선사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이런 정신은 요즘도 제방의 ‘무문관’ 형식으로 그 이름이 오롯이 이어지고 있다.
대사회적으로 가장 비판적인 이름을 지닌 현판은 선불장(選佛場)이라 할 것이다.
마조선사의 ‘선불장’ 즉 부처 뽑는 집은 당시의 과거제도 문란을 꼬집는, 어찌보면 참으로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단하천연 선사와 방 거사는 함께 과거길에 올랐다가 ‘응시자만 있고 합격자가 없는’ 관리를 뽑는 과거장 대신 부처를 뽑는 선불장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과거제도 문란으로 인하여 절집으로 인재가 몰려들었으니 반사이익을 누린 셈이다. 절집의 기쁨이 사회의 행복은 아닌 모양이다. 선불장은 알고보면 반사회적 시니컬한 명칭인 셈이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삐딱한 호칭은 등은봉이 양주 땅에 있을 때 머물렀다는 ‘파위의당(破威儀堂)’일 것이다. 이름이 파격 그 자체이다. 무릇 사문이란 삼천위의와 팔만세행을 갖추어야 하기에 ‘위의당’이란 이름이 마땅하거늘 ‘파위의당’이라 했다. 이 역설적인 이름은 참으로 괴각이었던 등은봉의 기질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당우였다. 그 집에서 등은봉은 승복조차 벗어던지고 속옷만 입고 지내던 어느날이었다. 느닷없이 다듬이돌 옆에서 홍두깨 몽둥이를 들고 함께 살던 대중들에게 말했다.
“한마디 한다면 때리지 않겠다.”
이에 대중들 어느 누구도 한마디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그 자리에서 차례대로 한 방씩 후려쳤다(맞아도 싸지, 앉아서 밥만 축냈으니). 하지만 그는 그 당우에서 위의는 파하고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법만큼은 서슬 시퍼렇게 세우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런데 연꽃을 들었고 미소를 지었는데 이를 ‘염화실’ 이라고 이름 붙일줄 알았던 그는 누구인가.
그 선사를 위하여 김춘수 시인은 ‘꽃’ 이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찬(讚)한 것이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200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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