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를 나온 자리에 다시 돌려놓고 자유롭게 살라
문
불을 밝히면 천도가 되나요?
답
칠석과 백중이 되면 불을 켜서 등을 밝힙니다. 그런데 왜 그렇듯 불을 밝혀야 하며, 불을 밝히면 나와 조상님이 정말 밝아져서 천도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간단히 표현을 하자면, 서천궁은 바로 내 마음 깊은 속을 말합니다. 잠재의식으로서의 깊이 들어간 그 속을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불성 자리, 움죽거리지 않는 거기까지 말입니다. 그게 서천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내서 움죽거리는 이 세상은 예를 들어서 동천의 아촉이라고 합니다. 생각을 내는 겁니다. 요렇게 간편하게 우리가 그 뜻을 알려면, 마음 깊은 속이 서천궁이다 한다면 바로 마음을 내는 것은 우리가 불을 켜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그걸 인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불을 켜기까지 재료를 다 해서 자리가 딱 잡혀야 한생각을 내는 게 바로 불을 그어대는 거나 똑같은 얘기입니다. 라이터가 준비가 돼야 여러분이 탁! 불을 켤 수 있고 한찰나에 불을 댕길 수가 있는 거죠. 그게 대비가 되지 않는다면 한 찰나에 불을 댕길 수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 중심이 촛대라고 본다면 바로 불을 댕기는 그 생각은, 우리가 촛대를 준비를 해놓고 있어야, 주인공 자체를 준비를 해 놓고 있어야 불을 탁! 켤 때에 불이 확 가서 붙는다는 말입니다.
그와 같이 칠석과 백중은 둘이 아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백중이 서천궁이다 한다면 칠석은 동천에 불을 댕기는 즉, 해가 뜨는 것과 같다 이거예요. 그래서 표현을 하자면 인생이 태어남을 말하고 인생이 죽어감을 말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리를 알면 죽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대로 우리가 여여함을 배우기 위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서천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천에 불을 켤 수가 있는, 인등을 켤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영원한 불을 켤 수가 있다 이런 얘기입니다. 우리가 살아나올 때는 바로 불을 켜들고 나올 수 있게끔 돼 있고, 또 죽어갈 때는 바로 그 초가 완전히 이렇게 되어져 있다 이겁니다. 그 초를 장만하고 마련을 하기 위해서 서천궁으로 가는 거고 또는 불을 켜기 위해서 동천으로 온다 이겁니다. 이렇다면 불을 켜기 위해서 오는 것은 칠석이고, 불을 켜기 위해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바로 서천궁, 백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리를, 우리가 살아생전에 그 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서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제 자리를 굳건히 다지지 못한 채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부처님 조상도 그렇고 여러분을 다 한마음으로 공덕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백중이 생긴 것이고 칠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칠석에는 그렇게 공덕을 한마음으로 모아서 백중에 정성을 들일 수 있게끔 우리가 불을 켜고 자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칠석이 부모 조상들에게도 그렇지만 여러분도, 죽은 조상의 마음이나 산 조상의 마음이나 둘이 아닙니다. 몸만 없어졌을 뿐이지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차원도 그대로죠. 산 사람들도 그 마음의 차원은 그대로요, 마음을 내기 이전도 그대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공부하는 것은 불을 켜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초를 만들어 놓고 성냥불을 그어댈 것을 생각하고 이렇게 해서 불을 댕기는 것도 한순간에 불을 댕길 수가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것 마련을 하는 것이 바로 칠석입니다. 그 불을 댕길 수 있는 그런 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공부하시는 것은 지금 불을, 우리가 삼합이 한데 합쳐져서 불을 아무 때라도, 생각을 한데 합쳐서 불을, 아무 때라도 생각을 하면 그냥 불이 당겨지도록 하기 위한 공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런 공부를 하신다면 백중에도 조상들의 마음이나 산 사람의 마음이나 둘이 아니어서 그렇게 공 도리를 완전히 한마음으로서 이끌어 나가면서 중심을 딱 세우고 촛대를 세우고 불을 켜게끔 딱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이게 바로 자기 마음의 자가발전소에 불을 댕기는, 한생각에 그대로 불이 댕겨질 수 있도록 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칠석에는 산 사람들을 위해서 불을 댕기고, 백중에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대로 그 바탕을 세우고 중심을 세워서 주장자를 세워 놓으면, 동천에 와서 금방 불을 켤 수가 있으니까, 살아나올 때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조상을 위해서 하는 것도 되고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서도 하는 것도 되고 부모나 자식, 아내나 남편, 친지 형제들을 다 위해서 한마음으로서 관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저 한생각에 그 여러 가지를 가지고 오신 그 자체, 또는 가지고 돌아가고 가지고 괴로움을 받고 이러는 그 재료를 가지고 모든 걸 여러분의 한생각에, 인등의 불에 한생각이면 모든 것이 다 태워져 버릴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여러분이 실험하기 위해서도 칠석과 백중을 지내면서, 재료를 가져오신 것을 실험을 하고, 그렇게 여러분이 성냥을 탁! 그어대서 불이 일어나서 그 모두를 무너뜨리고 태워 버리고 이렇게 해서 여러분의 살아나가는 가정과 앞길이 환하게 길이 인도되도록 이렇게 노력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칠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가정의 산 사람들의 마음의 인등을 켜는 날입니다. 우리가 백중에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위해 인등을 켜기 때문에, 자식들이 인등을 켜기 때문에 그 인등의 불이 백중에 촛대를 해 놓은 데 가서 불이 붙으면 영가님들께서 좋은 데로 천도가 되기 때문에 백중이 중요하다 이겁니다. 그래서 백중날 여러분이 촛불에 댕길 수 있는 불을 켜서 영가님들의 마음에까지 불이 들어올 수 있어야만 영가 천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중심 촛대에 불을 켜지 못한다면 어떻게 조상님들의 촛대의 불이 켜지겠습니까? 이건 자동적으로 이어진 연결된 둘 아닌 도리입니다. 이 도리는 칠석과 백중과 연결이 돼 있는 둘이 아닌 그런 뜻입니다. 그걸 가깝게 본다면 자기 깊숙한 마음내기 이전과 또는 깊숙한 마음속에서 촛대에 불이 댕겨지는 것과 현실의 불이 댕겨지면 모든 사람들이 다 연결이 되고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다 밝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죠. 지나가다 지나오다가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그 사실을 명심하시고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의 불을 밝히세요.
문
마음이 잡히지 않는데…
답
마음 법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청년 법우입니다. 그렇지만 저도 모르게 부모님이 다 계신데도 고아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확고하게 잡히지 않고 가끔씩 불뚝불뚝 올라오는 마음의 일렁임이 있습니다. 스님, 관을 한다고 하면서도 관해지지가 않고 공부가 잘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날 내가 산다고 그러기 때문에 그렇지. 이 세상이 모두 허튼 게 없는 거예요. 사람이 한번 웃었으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웃은 사이도 없고 성낸 사이도 없고 우는 사이도 없습니다. 내가 살았다고 하는 사이도 없어요. 매사 게 다 내가 살아 있으니까 모두 있다 그러지 내가 없는데 뭐가 있겠어요. 있다고 그러는 걸로 인해서 오는 허탈감도 있고 매사 게 거기서 오는 거지요. 사람이 길을 걸을 때 한 발자국 떼 놓으면 있나요? 없지요. 또 떼 놓으면 있나요? 또 없지요. 사람 사는 게 그래요.
그래서 내가 살아도 산 게 없고, 죽어도 죽는 게 없고, 길을 걸어가도 걸어간 게 없고, 악을 써도 악을 쓴 게 없어요. 그렇게 살아 보니까 없는 걸 가지고 애탄지탄하고 야단들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없다고도 생각하지 말고 닥치는 대로 그냥 놔 가면서 살아요. 놔 가면서 안 살아도 놔지는 것 아녜요? 한 살 먹어 두 살 먹어, 그냥 저절로 놔지지요. 다 늙어서 죽어도 죽은 사이가 없는 거예요. 죽어도 돌아다니고 살아도 돌아다니고 죽어도 그냥 다녀요. 살아도 산 게 없고 죽어도 죽은 게 없고요.
더 살아 보세요, 안 그런가. 이 세상 우주 만상이 다 죽거나 살거나 죽은 것도 없고 산 것도 없다. 그러니까 죽을 것도 없고 살 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죽었다 살았다를 다 놓아야지 놓지 않으면 어떡해요? 놓을 것도 없이 놔야지요.
전에 어떤 사람이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생각이 나서 죽겠거든요. 그래서 산에 올라가다가 앉아서 울었대요.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 가시고 한 번도 저는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울고 있으니까 부모님이 앞에 나서더래요. “아니, 울긴 왜 우니? 떳떳하게 살아라. 죽어도 울지 말고 살아도 울지 마라.” 그러곤 서 계시더래요. 그러니 눈 깜짝 할 새 부모가 돌아가셔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안 보인단 말 하지 마라 이겁니다. 죽었다고도 하지 말고. 정말이에요. 항상 눈에 보이질 않아도 눈에 보인단 말이에요.
그리고 고아 같다고 했는데 한번 이것을 생각해 봐요. 언제는 고아가 아니었는지를요. 부모가 안 계셔야만 고아인가요? 이 세상 태어난 게 본래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거지,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타박하고 그럴 수 있겠어요? 이 세상 어디에 대신 살아 줄 누가 어디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까 자기가 좀 컸다고 이 생각 저 생각 해 봐도 그게 이해가 가지 않을 거예요. 그래, 간 것도 없고 온 것도 없으니까 그냥 놔 버리라고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살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항상 힘들어요. 한 것도 없고 안 한 것도 없고 산 것도 없고 죽은 것도 없어요. 질문한 사람도 없고 같이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없고, 질문 받는 나도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찾을 것도 없고 애걸복걸할 것도 없어요. 하품하면 없어지듯이 꿈 같은 세상이니까요. 그러니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잘 관해진다 관해지지 않는다, 공부가 잘된다 잘 안된다 할 것도 없이 몰록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올라오는 것마다 다시 내려놓고 편하게 살아가세요.
문
도로에서 죽은 동물들에 대해서
답
요즘 운전을 하다 보면 도로에서 차에 깔려 죽은 개나 고양이의 모습들이 자주 눈에 들어옵니다. 그럴 때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하는지요.
내가 살생을 꼭 해서만이 살생이 아닙니다. 지나가다가 죽은 것을 봤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건져야 합니다. 지나가는 길에 벌레가 죽어 있다 하더라도 한생각에 건져야 합니다. 에누리가 없어요. 모든 마음이 한마음으로 뭉치면 부러지지 않습니다. 좋은 마음과 좋은 행동과 좋은 건짐이라는 것은 세세생생에 버릴 것이 없고 아까울 것이 없고, 또 그러면서도 안 버릴 게 없듯이 전부 때에 따라서 한 찰나에 도움이 오고, 거저가 없습니다. 내가 했으면 한 대로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건, 모든 생명들의 모습들이 다르다 이러지만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착하면 서로 다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전에 길을 지나가는데, 어느 부자 대갓집에서 그 집을 고치려고 헐어서 부수는데 그 집에서 큰 구렁이가 나왔습니다. 근데 그 집의 젊은이들이 모르니까 그걸 그냥 토막토막 내서 저 길바닥에다 그냥 내버렸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토막토막 낸 것이 그냥 펄떡펄떡 뛰는 겁니다. 그것을 내가 지나가다가 보고 참 안됐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어쩌면 그렇게 그 마음이 안됐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헌 통을 집어 가지곤 집게로다가 집어서 넣어서 저 모래톱에다가 묻어 줬습니다, 흙에다가. 밤동산이라고 하는 데다가 묻어 줬거든요. 묻어 주고 기왓장을 덮어 놨습니다. 비를 맞으면 썩을까 봐. 그랬는데 얼마 있다 거길 지나가다가 그것을 헤쳐 보니까 간 곳이 없어요. 그게 썩었으면 거기에 구더기가 나야 할 텐데 간 곳이 없단 말입니다, 아예. 해 놓은 것 그대로 있는데 묻어 놓은 구렁이를 한데 합치면 한 깡통이나 되는데 그게 가뭇도 없어요.
그런데 그날 저녁에, 나는 저녁에 사람들이 다 자면 풀섶이든 어디든 내가 앉아 있고 싶은 데 그냥 앉아서 30분, 그거는 30분이다 한 시간이다 이런 게 없습니다. 내가 앉아 있고 싶으면 별을 쳐다보고 나를 보고 이러면서 앉아 있는데, 그 재미있는 거는 말도 못해요. 정말이지 저녁이 돌아오면 그렇게 조용하고 내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 별성 하나하나가 나 아님이 없고 풀포기 하나하나가 나 아님이 없으니 그 벗들하고 노느라고 아주 정신이 팔렸죠. 그랬는데 그렇게 잠시 앉아서 저녁이 돼서 별이 뜨고 그래서 좋아서 쳐다보고 그러는데, 쳐다보니까 그 구렁이가 말입니다, 공중으로, 광목 있죠? 하얀 광목. 그것이 그냥 파르르르 날더니 그걸 타고선 그냥 올라가는 겁니다, 그걸 타고. 그러더니 그것이 저 꼭대기로 올라가더니마는 탁 보이는데 부처님 상이 그냥 보이는 겁니다, 그게 화해서. 그 마음이 화하면 몸뚱이는 벗어지고 그 마음이 화하면 마음이 바로 사람도 될 수 있고 부처로서의 한마음이 될 수도 있고 모든 게 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그걸 거기다가 묻어 줄 때 벌써 나로 변했고 내가 변해서 벌써 거기로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니 그 뱀도 언짢을 때는 모두가 와 줍니다. 어디 가서 어떻게 됐든지 그 어려움의 용도에 따라서 모두 그냥 도와주는 겁니다. 그래 시골에 다니면서 소에 치인 사람 뱀에 물린 사람, 이런 사람들도 한생각 지극히 하면 그 병이 나았단 말입니다. 그건 왜냐. 모두 그 용도에 따라서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궁무진합니까. 그러니 한마음이 뭉쳐지지 않는다면 그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는 얘기죠.
그러니 우리 내면세계에, 우리 몸뚱이 속에 천차만별로 들어 있는 그 이름들이 다, 의식들이 그 생명들이 다 나 아님이 없다는 얘기죠. 그럼으로써 그걸 한데 합쳐서 부르는 게 바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 속에 그렇게 자기 사람이 많은데 말입니다, 그 이름을 어떤 걸 부를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위장에 있는 그 모습들이 나라고 하겠습니까, 또는 간장에 있는 생명들이 나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내 생명이 그렇게 많고 내 모습이 그렇게 많고 내 마음이 그렇게 천차만별로 자꾸 화해서 자꾸 나투고 나오는데 그걸 어떻게 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끊는 것도 없고 안 끊는 것도 없느니라. 색과 공은 그냥 그대로 둘이 아니어서 바로 여러분이 움죽거리는 대로 공해서 돌아가니까 둘이 아니란 뜻이죠. 그것은 정녕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어떤 생명들을 보더라도 마음으로 함부로 무시하거나 하찮게 보지 마시고 함이 없는 무주상 보시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서 살아가세요.
문
왜 화를 내고 힘들어지나요?
답
본래청정심을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왜 똑같은 일을 가지고 다른 도반들은 여유롭게 잘 넘어갈 수 있고 그러는데 저는 저도 모르게 화를 내게 되며 힘들어하게 되는 것입니까. 수행의 부족으로 인해 차이를 보이는 것인지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모든 것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다고 항상 말해 왔지만 자기가 자기 몸 다루는 것도 자유스럽게 생각을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 실정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지를 않습니다. 지금도 놓으라고 말을 하면 “무엇을 어떻게 놓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렇게 자기 주인 근본 뿌리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를 않습니까? 이렇게 저렇게 휘몰아쳐서 일어나는 마음들이 자기인 줄 알고 이리 쓸려 다니고 저리 쓸려 다니며 세상이나 원망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자꾸 말리지 말고 거기에 모든 것을 놓고 부드럽게 생각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부드럽게 행동하면서 일체를 나온 자리에 다시 돌려놓고 자유롭게 살라고 하는데도 자기가 부드럽게 생각을 못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진실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경질이 나고 부아가 치미는 그 상태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올라오는 대로 끄달려서 밖으로 내뱉는 그것이 바로 화탕지옥이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딴 데서 화탕지옥을 갖다 주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그것이 바로 화탕지옥이거든요. 근데 왜 내가 자꾸 거기에 끄달려서 괴롭게 사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상구보리 하화중생 해야 한다고 말을 한 원인도 거기에 있습니다.
내 지배인의 마음은, 마음내기 이전은 그대로 부처지만 이 속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마음 분별은 바로 중생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중생들의 마음이 그렇게 들끓어서 분별심이 마구 동할 때는 ‘어, 이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깐 거기서 해결해야 한다.’ 하고 믿고 그 생각들이 나온 그 자리에 다시 놔야 될 텐데 내려놓지 못하고 붙들고 있으면서 자기를 더욱 안절부절 안달복달 하기만 합니다. 그것이 진짜 나의 마음인 줄 알고 말입니다. 하늘이 무너진들 어떻고 땅이 꺼진들 어떻습니까? 어차피 한 번 죽을 거, 죽기가 그렇게 원통합니까? 그러니깐 “놓아라! 놓아라!” 해도 그걸 놓지 못하기 때문에 진짜로 살지 못한다 이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 없죠? 자기가 자기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분도 없습니다. 주인공이라는 것은 삼합이 한데 합쳐서 돌아가고 우주의 모든 근본이 바로 같이 직결돼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살림살이가 전기 가설돼 있듯이 모두가 가설이 돼 있다는 걸 믿으세요. 모두가 모습은 다를지언정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음은 항상 같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공심으로 돌아가거든요. 그런데 공심으로 돌아가는데도 불구하고 공심이라는 걸 믿지 않고 각자 자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만 명이 일을 하면 쉬운데 자기 혼자, 단 한 명이 다 하는 줄 알고 설쳐 댄다면 자기가 만 명이 할 일을 혼자 어떻게 합니까? 만 명의 능력과 한 명의 능력이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지금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것이 그 만 명이 같이 돌고 만 명의 그 마음이, 만 마음이 같이 돌아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다면 너도 나고 나도 너고, 네 능력이 내 능력이고 내 능력이 네 능력이고, 네 생이 내 생이고 내 생이 네 생이라면 얼마나 든든하고 무엇이든지 해결할 수 있는 여건이 되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원래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공심이라는 것을, 공용이라는 것을, 공생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살아간다면 다가오는 바깥의 일들에 그렇게 연연해하고 아파하지 않으면서 나와 남까지도 지혜롭게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을 넓혀서 행복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문
왜 원하지 않은 일을 당해야 하나요?
답
나름대로 열심히 사느라고 살지만 생각지도 않은 데서 사고를 내고 가족들이 속을 썩이거나 하는 일을 당하면 내가 무슨 업으로 인해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살아갈 의욕을 잃게 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과거에 지은 업으로 인해 원하지 않은 일들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전에 아주 한탄을 하면서 그러더군요. 아들이 나가서 어떻게나 노름만 하고 그러는지 얼마나 속이 상하고 미운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벌이는 안 하고 그러니까 얼마나 미웠으면 “이놈의 새끼, 나가서 급살이나 맞아라.” “이놈의 새끼, 염병이나 걸려서 죽어라.” 이러곤 욕을 해댔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욕을 지독하게 하는 분이 많이 있었죠.
그랬는데 그 아들이 정말 염병이 걸려서 죽었거든요, 아들 하나 있는 게 그렇게 병이 들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남의 탓을 해서 그렇습니다. 그 아들 탓을 하는 거죠. 자기가 그렇게 짓고 나온 업보인데 자기 업보 생각을 하지 않고 아들 탓을 한 겁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가슴이 미어져서 울고 있으니깐 어느 절의 스님이 지나다가 극락세계로 가도록 축원을 해 주시면서 그 어머니더러 이렇게 말했답니다. “보살님이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그렇게 해서 남의 돈을 다 없애고 남을 못살게 하고 계집까지 팔아먹고, 하여튼 있는 거 없는 거 다 없애면서 부모 속을 썩이고 살았다. 당신이 예전에 그렇게 했다.”라고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거를 고대로 보라고, 그 애가 바로 당신이라고, 그런데 누구 탓을 하느냐고 그러더라는 겁니다. 당신이 업이 많아서 그런데 그 아들이 인제는 원수를 다 갚았으니까 갔다. 갔는데 조금 더 살아서 그 업보가 다 지나면 아들이 인제 그렇게 안 할 때가 돼 가는데 당신이 욕을 하도 해서 그게 그렇게 됐다, 그랬으니 당신이 죽이고서 당신이 왜 우느냐 이러더랍니다.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공부들 열심히 하십시오. 자기가 해 놓은 것은 누가 뺏어 갈 수도 없고 헛된 게 아닙니다. 그저 일을 하면서도 그냥 헛되게 시간을 보내지 마시고, 일하면서 생각하시는 거야 마음대로 아니겠습니까? 돈이 드니 걱정입니까? 아, 몸으로 일하면서 돈 벌면서 생각을 좀 하시라 이겁니다. 생각하는 것도 돈 내고 생각합니까? 따로 시간이 걸립니까? 일하면서 생각하라는데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마음이라는 광대한 것은 비행기에 프로펠러가 돌아가듯이, 우리가 살아나가는 이 자체가 바로 수레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거기 먼지 앉을 자리도 없을 거고, 고(苦)가 있을 자리도 없을 거고, 또 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마음 하나 점프해서 돌리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고 그게 지혜입니다. 이 마음의 도리를 알면 내가 죄가 있다 없다도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렇게만 하신다면 이 세상 살아나가기가 아주 수월하고, 또 수월한 것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그 지혜의 뿌리가 이어져 가면서 자기가 뿌린 것 자기가 다 걷을 수 있고 과거에 내가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이렇게 거쳐 오면서 지은 인과들, 그런 것도 다 해결할 수 있고 그런 겁니다. 아주 한순간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들 해 보세요. 그리고 이 공부 하는 데에 생활이 지장이 된다 이런 소리는 하지 마세요. 생활이 즉 공부니까 말입니다.
“1천원으로 부처님 말씀 전하세요”
최상의 보시인 법보시 공덕을 지으세요
● 참여방법
-현대불교 매월 ‘법보시 후원금’ 1구좌 1,000원 이상
-현대불교신문 보내는 곳 : 군부대, 교도소, 경찰서, 병원법당, 복지시설 등
-후원 계좌 : 국민은행 006-01-0783-830 / 농협 053-01-236053
(예금주 현대불교신문사)
-자동이체로 하면 더욱 편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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