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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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2부3강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제목
깨지지 않는 ‘다이아몬드 불성’

금강
금강은 다이아몬드를 가리킨다. 그래서 콘즈도 이 경전을 “다이아몬드의 경전(Diamond Sutra)”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그 투명한 보석이 중국에서는 나지 않은 듯하다. 적어도 혜능은 몰랐던 것 같다. 그는 ‘쇠 중에 강한 쇠’, 즉 강철 정도로 생각했고, 그래서 이것을 영양각, 즉 영양의 뿔로 깰 수 있다고 순진하게 말했다. 그는 <금강경 구결(口訣)>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성은 견고하기 금강 같다. 그러나 그 단단한 불성도 번뇌의 영양각으로 혼란될 수 있고, 또 그 번뇌의 영양각도 반야의 빈철로 깰 수 있다.” 혜능은 이 삼자의 관계를 이해하면, 불교의 근본을 깨친 셈이라고 보증했다.
금강은 다이아몬드이다. 그것은 1) 예리하고 2) 견고하며, 3) 그리고 무지 비싸다. 다시 말하면 다이아몬드는 어떤 것도 잘라버리면서, 자신은 그 어떤 것에도 깨지지 않는 것, 그리고 결혼 예물이나 보석상에서 보듯 비싸고 귀하기 그지없는 물건이다.

반야
반야가 바로 그 다이아몬드의 특성을 갖추고 있다. 반야는 ‘지혜’를 가리키지만, 그것은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는 지혜이다. 그래서 불교가 자리 잡고 난 다음에는, 번역어인 지혜보다 원어인 반야를 더 유통 정착시켰다. 반야는 대인관계를 효율적으로 맺거나, 사무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노하우와는 관계가 없다.
반야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한 지혜이니, 마음 근본의 특성과 기능을 아는 지혜라고 해 두자. 이렇게 하면,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을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같은 마음이니 관련이 있지만 거기 접근하는 방식과 통찰한 결과는 좀 다르다. 반야는 마음의 내적 방해물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힘이다. 그 방해물들을 전문적으로(?) 번뇌, 혹은 망상이라고 부른다.
반야는 1) 이들을 깨부수는 힘이다. 어떤 번뇌나 망상도 이 앞에서 깨어진다. 그리고 이 반야는 2) 워낙 견고하여, 그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안정하게 흔들리기는 한다. 혜능이 바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반야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번뇌와 망상 앞에 흔들리지만, 그렇지만 이 촛불은 결코 꺼지는 법이 없다! 번뇌망상이 태풍처럼 몰아쳐도 반야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것만큼 견고한 것도 없다.
그리고 그 반야는 3) 지상 최고의 보물이다. 이보다 더 귀한 재산은 없으니, 그것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라, 모래알처럼 많은 우주에 깔린 칠보로도 까마득히 견줄 수 없다. 로또 당첨금 정도는 새발의 발톱에 낀 때에도 못 미친다. 사람들은 물을지도 모른다. “뭐 돈도 아니 되는 것을 그렇게 치켜 올릴게 무어냐. 그거 위선 아니냐.”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은행의 잔고는 늘어나는데, 삶이 여전히 공허하고 무의미하다고 느낀다면, 이 말을 수긍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바라밀
바라밀은 도피안(到彼岸)으로 번역한다. 금강이 반야의 특성을 나타낸다면, 반야는 수단이고, 도피안은 그 반야를 써서 성취해야 할 목표에 해당한다. 도피안, 민통선 근처에 이 이름을 단 절이 있다고 들었다. “피안, 저 언덕으로 가 닿았다”는 뜻인데, 그런데, 거기가 어딘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저 언덕은 그만 두고, 대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언덕’은 어디인가. 그것부터 분명히 해야 대책이 선다.
어찌 보면 개인이나 사회, 역사와 문명이 어느 것 하나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고 있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배가 고프면 밥을 찾고, 피곤하면 퍼지르며, 나이가 들면 짝을 생각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 등등이 그렇다.
세속이 추구하는 도피안은 외향적이다. 그것은 늘 밖의 대상을 포섭하고 동화하는 활동인데, 불교는 이와는 달리 내부의 피안에 도달하고자 한다. 마음의 안쪽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거기, 불건전한 상념과 정념, 충동들이 있다.
이 무지, 즉 무명(無明)이 있는 곳이 이 언덕이고, 이것을 불식시키고 마음이 밝아진 것이 저 언덕이다. 이 전이는 시간을 요하지 않고 한 순간에 일어난다. 전광석화(電光石火), 발뒤꿈치 한번 돌리면 열리는 세상이기에, 불교는 하나도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다만 이 밝은 지식의 불꽃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돈오(頓悟)는 쉬운데, 점수(漸修)는 어렵다.
요컨대 불교는 이렇다 할 물건을 안겨주지 않는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무득(無得)이라고 했다. 불도를 통해 우리는 얻기보다 차라리 잃었다. 그동안 나를 지배하던 불건전한 상념과 정념, 충동들을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질식하고 있던 불성이 기지개를 켠다. 그게 해야 할 전부이다.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은, 이게 ‘몰록 깨달음’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흡사 기름때 가득한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다. 양손으로 한번 밀치면, 바다는 깨끗한 속살을 드러냈다가, 곧 다시 밀려오는 기름에 덮여버린다. 그 전에 다시 양손을 노처럼 저어 길을 열어야 한다. 한참을 헤치고 용을 써서 나가야 비로소 깨끗한 바다를 지나 부드러운 모래사장에 닿을 수 있다. 거기 시원한 콜라 한잔과 싫지 않은 태양이 빛나고 있다.
그래서 점수(漸修)가 필요하다. 불건전한 상념과 정념, 충동들은 한번 태운다고 고이 물러가는 것이 아니다. 여러 생을 거쳐 묵은 업장(業障)과, 태어난 이후 한 번도 닦아본 적이 없는 습기(習氣)로 하여 처음에는 뻑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다가 숙련과 더불어 운신이 점점 임의로워지고 안정된다.
그것은 자동차 운전을 익히는 것과 닮았다. 처음에는 클러치, 액셀 브레이크 헷갈리고 운전대가 겉돌지만, 점차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음악을 흥얼거리거나, 지나가는 아가씨의 선글라스가 눈에 들어올 정도가 된다.
깨달음으로 일대사인연이 끝난 것은 아니다. 조주가 빗자루를 들자, 객이 핀잔을 주었다. “먼지 하나 없고 깨끗한데, 뭘 더 쓸려고 그러시오.” 조주가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여기 또 하나 날라 오네.”
도피안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난 사태이다. 피안은 시공을 점하고 있는 어떤 다른 세계에 있지 않다. 극락은 없다. 젖과 꿀이 흐르는, 환상의 나라. 서방 정토도 없다. 혜능은 <육조단경>에서 “그런 곳은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 여기서 서방 정토를 보여주랴”라고 했다. 이곳을 떠나가서 이르러야 할 저 곳은 없다.
지금 여기 서 있는 내 마음 밖에는 어떤 나라도 없으니, 혜능이 다시 말한다.
“마음이 헤매면 차안(此岸)이고, 마음이 깨달으면 피안(彼岸)이다.”


위와 같은 취지를 이 짧은 글에 담았다. 위의 취지를 이해한다면, <금강경>의 본문은 읽을 필요가 없다. 더구나, 수많은 주석도 돌아볼 필요 없다. 더구나, 내 군소리는 불쏘시개 감도 못되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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