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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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간힘 쓰지 말고 그냥 여여하게 살아가세요!
한번 굴려서 놓고 침착하게 대처해야

오늘 이렇게 더운데도 불구하고…, 덥든 춥든 간에 그것도 마음이겠죠. 하여튼 마음이란 그놈이 바로 부처라고 불리죠. 참 어떤 때 생각하면 재미도 있어요. 정히 덥다 싶으면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고요. 또 정히 혼자 있고 싶을 때는 나무 밑으로도 들어가고요.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들어간다고 해서 몸뚱이가 어찌 더움이 가셔지고 편안해질 수 있는가 이러시겠죠? 거짓말이라고 그러시겠죠? 그러나 이 모두가 마음으로써 빚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에 몸뚱이도 마음으로써 빚어지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거든요. 땀방울이 하나 나오면 둘, 셋이 따라 나오죠. 그런데 둘, 셋 나오는 땀방울을 하나로 줄일 수도 있는 것이 이 법이랍니다. 제일 첫째로, ‘마음을 가라앉혀서 내 몸뚱아리 하나의 개체에 내 불국토를 건설할 수가 있어야 바깥의 불국토도 건설할 수 있다.’ 이런 게 있죠.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인간에게는 다섯 가지의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평상시에 학술적인 것이라든가 팔만대장경에 관련한 법문을 많이 들어보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법문이 나를 깨우쳐 주는 건 아닙니다. 또 어떤 종교를 가지고 신의 이름을 찾으면서 믿는다고 입으로만 되풀이하는 게 믿는 것이 아니죠. 내가 이 세상에 나왔다면 나를 나오게 해 준 그 자체가 있어서, 그것이 바로 근본이기 때문에, 육의 부모와 법의 부모가 따로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법의 부모를 육의 부모와 동시에 같이 믿는다 이런 게 있죠.
왜냐하면 어머니의 마음이 비록 작고 소박하더라도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자기 생명을 던져서라도 줄 수 있는 마음이거든요. 육의 부모가 그렇다고 한다면 또 법의 부모는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자기를 형성시킨 장본인이거든요. 바로 자기 조상이죠. 그래서 자기 조상 자체가 바로 공했다는 얘기죠. 그래서 어머니의 그 소박한 마음과 나의 조상, 즉 말하자면 주인공이 동시에 일체제불의 마음과 더불어 같다 이거죠. 따로따로 떼어 놓고 한다면 아무리 시간이 가도 깨우치지 못할 겁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작으나 크나 똑같습니다. 내 집부터 다스릴 줄 알아야지 내 집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바깥에 나가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내 몸속에는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누적된 다섯 가지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한 가지만 얘기하다가 말았죠. 우리는 수없이 과거로 해서 미래로 해서 현재로 다시 들어오고, 또 돌아서 다시 들어오고, 또 돌아서 다시 들어온답니다. 그런데 누구나가 다 똑같이 돌아오긴 하는데 모습을 어떻게 가지고 나오느냐가 문제입니다. 천차만별의 마음의 차원이 있기 때문에 그 차원대로 모습을 쓰고 나오니까요. 이것을 기필코 우리가 해결하고 뛰어넘어야 되겠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 몸속에 다섯 가지가 주둔하면서 세계가 벌어져 있습니다. 지구에 세계가 있듯이 한 몸뚱이 속에 세계가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 세계를 다스리는 주동자가 바로 여러분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섯 가지가 의식적으로 마음을 통해서 나오는데, 거기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길은 한 길이지만 진짜 마음에서 나오는 것과 의식 속에서 나오는 것과, 보고 들어서 그냥 생각이 나는 것과는 천지 차이랍니다. 때로는 욕구 불만도 나오고 때로는 욕망, 어떤 때는 욕심 이런 게 나오는 것도 당연하지만 거기에 속지 마라, 한번 굴려서 놓고 침착하게 대처를 해라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섯 가지의 문제라는 것은 인과성, 세균성, 영계성, 업보성, 유전성을 말하는데 인과성은 과거로부터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많은 인과를 둔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세균성을 많이 맺어 놓은 사람은 고기를 많이 잡아서 해쳤다거나 살생을 많이 해서 문제가 된 인연들이 많죠. 세균성이라고 하는 것도 살생과 더불어 원한의 인연이 되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뱀소굴에서 뱀들을 때려잡는다거나 이랬다면, 임신을 하지 않았어도 꼭 그것이 자식들한테로 대치가 되거든요. 그거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균성의 원리가 그러하니까 그렇게 세균성이 오는 거죠. 그게 그냥 착 와서 ‘내 자식들을 모두 이렇게 했으니까 너도 네 자식 때문에 이렇게 좀 돼 봐라.’ 하고 여지없이 유전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것이 오는 이치는 없어요, 절대로.
또 영계성이라는 것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내 몸속에도 이런 문제가 다 주둔해 있는데다가, 나에게 주인이 없다면 바깥에서도 마구 들어오는 겁니다. 자기 주장심을 주인으로 삼아서 다스려 나가지 않는다면 주인이 없는 집이 되죠. 바깥으로 찾고, 바깥으로 매달리고, 바깥으로 기도하고, 바깥으로 삼천 배 절하고, 모든 걸 바깥으로만 하니까요. 자기 안에 주장자가 본래 있는 건데, 자기가 그것을 세워 놓지 않고 다스리지 않기 때문에 주인이 없는 집이 돼서 안에서 마구 끌어들이는 겁니다. 바깥에 있는 것도 끌어들이고 안에서도 일으키고 하는 것이 마치, 엄마와 아버지가 어디 나가면서 애들에게 ‘갔다 올 때까지 놀아라.’ 하니까 친구들 데려다가 그냥 막 뛰어 놀고 온통 집안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는 것과 같은 거죠.
그러니까 그러한 문제가 내려오면서, 지금 백팔 염주에 염주알을 꿰어 놓은 것처럼 자기의 그 종자가 종자대로 그렇게 꿰여 있죠. 이 세상 이치도 우주 전체를 염주알 꿰 놓은 것처럼 돼 있어서 우리가 그 염주 바깥으로는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유전성이라는 것도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유전성이든지, 영계성이든지, 세균성이든지, 업보성이든지, 인과성이든지 이 공부를 안 하면은 무너뜨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는 말을 항상 하죠. 거기서 나온 거라면 거기서 대치를 해야지 어디 다른 데서 할 수가 없습니다. 나오는 구멍도 그 구멍, 드는 구멍도 그 구멍, 우리가 숨을 쉬었으면 숨을 쉰 그 자리에서 숨을 또 내쉬지 딴 자리에서 숨이 나오는 겁니까?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한 숨구멍이죠. 그렇듯이 마음이 들고 나는 자리도 딱 하나죠. 그래서 부처님은 경전에서 ‘한 궁전 가운데 털구멍에, 털구멍 가운데서 보살을 낳고, 털구멍 가운데서 모든 세계가 벌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업보성’하면 오간지옥성입니다. 지금 우리가 차원이 낮고 낮아지면 인간에서 좌천이 되는 거죠. 인간에서 좌천이 돼서 기어다니는 벌레로 땅속에서 사는 것이 바로 오간지옥이에요. 무당들이 칼을 들고 바가지에서 죽 쑨 것을 던지면서 하는 소리 들어 보셨어요? 하하하…. ‘이걸 먹고 싹 물러나라.’ 그렇게 물러나지 않는다면 국내 밥내도 못 맡게 지옥성에다 넣는다는 이런 말이 있죠. 그런 거와 같이 이거는 인간이 돼야 국내 밥내를 맡지 땅속에서 사는 벌레가 어떻게 국내 밥내를 맡습니까? 만약에 땅속으로 다니고 굴속에서 살고 그러는 살모사나 뱀 종류라든가 벌레 종류라든가 이런 거라면 국내 밥내도 못 맡죠. 그게 바로 오간지옥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라는 것은 결단코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칼로 썰어도 썰어지지 않고, 아주 굳세고 아주 늠름하고 여여한 것이죠. 그래서 마음은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이름이 부처라 이런 거죠. 그러니 여러분 속에 모두 주둔해 있는 거를 어디 가서 빌고 어디 가서 찾습니까? 어디 가서 그걸 해결해 달라고 합니까? 오신통을 컴퓨터라고 해도 좋다고 내가 항상 말하죠. 앞서 입력이 돼서, 자동적으로 컴퓨터에 입력이 돼서 주둔해 있으니, 거기서 나오는 대로 다시 입력해라 이 소립니다. 그래야만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지는 겁니다. 업보성이라든가 영계성, 유전성, 세균성, 인과성 이 자체가 몽땅 차례차례로 나오는 것을 내가 닥치는 대로 거기다 놓으니까 차례차례로 없어지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면서 나가면 자손 대에도 그렇고 다시 바꿔지는 거죠, 아주 그냥. 체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바꿔지는 겁니다, 그대로 그냥.
우리가 알고 보면 모든 일체 목신(木神)들, 즉 말하자면 식물들과도 전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부 통신을 하고 있다는 얘기죠. 우리가 이런 생각을 했다 하면 그 모든 통신을 엮어 주는 멤버란 말입니다. 엮어서 과거로 미래로 현재로, 둘 아니게 통신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식물이라는 자체에도 큰 나무들의 목신들, 꽃신들, 뭐 신들이 천차만별로 있죠. 그래서 수풀을 다스리는 관리인이 있고, 나무를 다스리는 관리인이 있고, 땅을 다스리는 관리인이 있고, 또 어디 도면 도, 시면 시, 이렇게 갈라서 다스리는 멤버들이 많이 있는데 그걸 주림신(主林神)이라고 그러고, 주해신(主海神)이라고 말을 하죠. 그런데 그렇게 이름을 불러도 주(主)자 빼놓는 거는 하나도 없어요. 왜냐? 마음 빼놓고 하는 거는 없거든요. 그러니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기필코 이것을 다 부숴야 되겠다는 겁니다. 물론 부순다, 부순다 하고 안간힘을 쓰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여여하고 편안하게 나가는 거죠. 이 몸뚱이 하나가 그대로 꼬챙이에 꿰어져 있는 것처럼 바로 선장에 꿰여 있는 거나 같습니다. 그리고 배와 같고요. 선장이 끌고 가는 배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배를 타고 있는 놈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여러분 몸속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들어 있습니까? 그거는 배를 탄 중생들이라 이 소립니다.
그런데 바람이 많이 불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 평지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험한 파도치는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감과 같다, 살얼음판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이랬습니다. 선장이 잘 이끌고 가는 거를 믿지 못하고 안에서 마음이 흔들리면 안에 있는 중생들이 다 흔들리거든요. 그러니까 죽는다 산다 하고 안에서 뛰면은 바깥에서도 뛰고, 바깥에서 뛰면 안에서도 뛴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 배가 뒤집히지 않고 견디겠습니까? 배가 몸뚱이라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런데 말입니다, 이 한생각을 하고 돌아가는 분들은 파도가 치든 말든, 배가 엎어지겠으면 엎어지고 말겠으면 말고 딱 그냥 ‘어허, 내가 공(空)했는데 배를 탄 거는 어딨으며 배를 안 탄 거는 어딨겠느냐? 파도친 거는 또 어딨겠느냐?’ 이럴 때는 그냥 안에서 빙긋이 웃음이 날 뿐이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랬을 때 아무것도 없이 배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고, 여러분의 가정이 무사히 혼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엊그저께 무궁화호 위성이 떴다고 하더군요. 그것이 뜰 때에 내가 이랬습니다. ‘허허, 이 마음공부들을 했으면, 들이고 내는 데에 저장처를, 조그마한 덩어리 하나 더 달았으면 아예 그냥 제대로 될 건데 모자라는구나.’ 그랬어요. 그리고 또 그것뿐이 아니라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그 위성이 지구 밖에서 돌아가는 것도 인간의 마음이 한 거지, 딴 데서 한 것이 아니거든요. 인간의 마음이 발전이 돼서 그렇게 한 거지, 딴 데서 떨어져서 그럭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올렸든지 내렸든지 간에 마음이 선장이죠.
여러분의 차원을 셋으로 나눈다고 합시다. 하나는 나를 지금 간곡히 관(觀)하고 들어가는 사람, 관하고 들어가서 나를 탄생시킨 사람, 그 다음에 탄생을 시켜 가지고 이제 점차적으로 점수(漸修)로 들어간 사람, 이렇게 세 단계가 있다 하면, 그 첫 단계에 있는 모든 분은 위 단계에 대해서 말한 것을 그냥 따라서 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항상 자기 집을 지으려면 주춧돌부터 아주 완전하게 해 놓아야 되니까요. 위성이 지구를 벗어나서 그렇게 돌듯이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지금 마음이 우리 몸뚱이 안에서 벗어나야 지구 안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공기가 없는 대기권 바깥으로 다닐 수 있는 건 마음뿐이에요. 물체는 공기가 없으면 죽지만, 물체가 아닌 마음은 이 우주 삼세를 다 한 찰나에 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손색이 없어요. 그러나 그뿐 아니에요. 전체를 갖다 놓고 보는 것이, 공 하나 갖다가 놓고선 요리 보고 조리 보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부처님께서는 도가 아니라고 그랬으니 무슨 까닭인가 이거예요. 전체를 갖다 놓고 볼 수 있어도 도가 아니니라 했어요. 목마를 때 물 한 모금 주는 것만 못하다 이 소리죠. 보는 것이 무슨 도겠습니까마는 우리가 저 위성을 만들려면 일 단계, 이 단계 겉껍데기를 만드는 것과 같이 그게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뿐이지, 오신통이니 뭐니, 이것도 종합해서 하는 거지 모두가 혼자 하는 거는 없으니까요. 보는 거, 듣는 거, 상대를 아는 거, 또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아는 거, 또 내가 가고 옴이 없이 이렇게 가고 오고 보고 이러는 것이 종합돼야 한몸이라고 할 수 있죠, 한몸! 정상인!
그렇듯이 그 정상인 하나를 정상인답게 할 수 있다면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지구 바깥을 벗어나서 돌거니와, 아니 다른 행성에 가서도 돌고, 다른 행성이 만약 우리 지구에 어떠한 문제를 일으킨다 하면 바로 그 속으로 들어가서 둘이 아니게 만들고 이렇게 하는 거죠. 이것은 평등공법이라고 할 수밖엔 없겠죠? 그런데 평등공법이면서도 중용이라고 이렇게 말하죠. 그것은 여러 가지로 이름이 주어지지만, 하여튼 모두 그 안에, 보고 듣고 하는 그 안에 진짜는 들어 있으니까요. 보고 들었으면 주어라, 보고 들었으면 결정을 지어라, 보고 들었으면 그냥 물러나는 게 아니라 잘못되고 잘되고가 알아진다, ‘수습을 해라’하는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길을 지나가다가도 말해 줄 사람한텐 말해 주고, 그냥 건져 줄 사람은 건져 주고, 예전에는 양을 많이 잡아서 바쳤답니다. 양을 바치려고 짊어지고 갈 때는 양을 건져 주고, 소가 죽을 때는 소를 건지고, 이렇게 해서 부처님 눈에 걸렸다 하면 그건 인도환생이 되는 거니까요.
여러분 중에 ‘더운데 시원한 데로 놀러가지, 왜 내가 거기 가서 끼어 앉았어?’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앉아 계시는 분들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건 왜냐하면요, 내가 지내보니까,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또는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누가 주면 주는 대로, 끌어다가 먹지도 않고 나한테 온 거 박차서 내버리지도 않는다는 얘기죠. 모든 점에 있어서 순리적으로, 일체를 합류화해서 항상 모두를 내 스승으로 보고, 내 아픔으로 보고, 내 몸뚱이로 본다면 그게 잘못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수없이 몸을 변하게 만들어 가지고서는 키가 모자라서 못 먹을 때는 키를 키우고, 다리가 모자랄 때는 다리를 키우고, 배가 좁을 때는 배를 크게 해서 자기 소관대로 자유스럽게 몸뚱이를 만들어서 사는데요, 그거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진화력이라는 게 그렇게 한생각으로 진화가 된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이 공부하시는 분들은 몸 자체도 개선할 수 있고 잘못된 것을 바꿀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나를 믿는 것 말입니다. 믿는 것은 아픈 것을 나을 양으로 믿는 것도 아니요, 죽을 걸 살 양으로 믿는 것도 아니요, 어떠한 업보를 제거하려고 믿는 것도 아니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그대로 자기를 믿으라는 거죠. 자기 시자는 자기 주인을 믿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아버지가 나쁘든 좋든 아버지이듯이, 어머니가 못났든 잘났든 못 배웠든 병신이든 내 어머니이듯 그냥 무조건, 무조건 믿는 그 속에서, 천차만별로 벌어지는 거는 다 대치가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믿지는 않고 이름만 부르면서 한 가지만 해결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면은 그건 참 더디죠. 앞에 닥친 거를 어쩌겠습니까? 그러니 진짜로 믿고 마음을 조급하게 두지 말아야죠. 안 되든 되든 일단 맡겼으면 그냥 던져 두는 거죠.
어떤 스님이 삿갓을 쓰고 주장자를 짚고선 물을 건너가는데 아, 어느 마을에 불이 나서 그냥 막 타오르고 아우성을 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 몸뚱이가 뛰는 게 없이 주장자를 물에다가 척 치니까, 그 물이 구름으로 화(化)해서 전부 비로 내리더랍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니 불이 그냥 단번에 꺼지더랍니다. 그쯤은 돼야죠. 허허허….
그러니 몸뚱이가 아무리 뛰어 봤자 벼룩입니다. 저 허공에서 비행기가 잘못돼서 죽는다고 해 보세요. 몸뚱이가 아무리 뛴다 하더라도 그거를 해결할 수가 있나요? 예전에 그런 예가 있었죠. 어느 스님이 가만히 보니 비행기 조종사가 몸이 불편해서 술 한 잔을 마셨는데 위험하게 된 거예요. 그 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사람들이 많이 죽겠거든요. 그래서 그 조종사 속으로 들어갔어요. 조종사 속으로 들어가서는 ‘정신 차려!’ 그러고는 콱 찔렀단 말입니다. 그래서 정신 차려 보니까 이거 야단났거든요. 그래, 그냥 수습을 한 거죠. 비틀비틀 하면서 수습을 해 가지고 괜찮았답니다. 그런 예도 있어요.
그냥 종교 삼아, 남들도 절에 다니니까 나도 다녀보자 이러고 그냥 나오는 분들 많으시죠?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겠죠.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전화를 필수적으로 쓰듯이, 밥을 필수적으로 먹듯이,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내가 살고 있으니까 모든 게 내 탓이고 남의 탓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내가 있는 자리에 부처가 있고, 내가 변소간엘 가든지, 똥둑간엘 가든지, 허허허…, 똥 재어 놓는 데 있죠? 그런 델 가든지, 내가 있는 자리에 부처는 있는 것이지 깨끗한 데를 찾아서 부처님이 계신 게 아닙니다. 질문하실 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질문자1: 여름철에 살다 보면 집안에 각종 벌레, 해충들이 많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저희가 죽어 있는 것을 먹거나 버릴 때는 뭐 ‘한마음!’ 하면서 관할 수 있겠는데, 살아 있는 놈을 귀찮다고 ‘한마음!’ 하면서 죽일 수도 없고 그래서 공부와 관련해서 한 말씀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님: 살아 있는 걸 죽인다 할 때 그거는 죽이는 사람의 차원에 따라 다릅니다. 지금 갓 배우는 사람한테는 ‘살생하지 마라’ 이럽니다. 그러나 다 배운 사람 앞에는 ‘무조건 먹어치워라’ 이럽니다. 그 뜻을 아시겠습니까? 그거는 왜냐? 그 모습으로 산다면 얼마나 고생이 되는 줄 아십니까? 만약에 다 깨우친 어떠한 스님이, 부처님께서…, 스님이 부처고 부처가 스님이니까요, 만약에 수많은 벌레들을 다 죽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거 살생이라고 보겠습니까? 죽여도 건진 거고 살려도 건진 거고, 줘도 건진 거고 안 줘도 건진 거고, 건져져요.
▲질문자1: 다음에는 정진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전에 스님께서 저녁 때 잠들기 전에 하루를 되돌아보고 반성을 하고 자야 된다고 그러셨습니다. 우리가 한 시간을 제대로 살면 하루를 제대로 살게 되겠는데 그러면 그때부터 반성하고 잠들어서 아침에 일어나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루를 어떻게,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우리 공부에 관련해서 정진이 되겠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 그냥 생활선법(生活禪法)이 아닐까요? 우리가 생활하면서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모든 것을 그냥, 내 주인이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해라, 이런 것이 참선입니다. 그대로 참선이에요. 그런데 그게 두 가지 여건에서 세 가지 단계로 얘기한 겁니다. 왜냐하면 나를 발견을 못했으면 진짜 공부를 못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면 저녁에 남이 다 자고 조용한 틈을 타서 한 30분이라도 앉아서 ‘당신이 있다는 것을 당신만이 증명을 해 줄 수 있는 거지 누가 증명해 주느냐?’ 이거야. 그것이 똑바로, 직속 들어가는 관법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발견 못했을 때 지극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죠. 그리고 살림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에 한해선 특히 더하고, 스님네들도 역시 그렇구요. 우리가 이 도리를 발견하려면요, 첫째는 다섯 가지 요소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것이 다 거기서 나오고 빚어지는 거거든요. 뭐, 관습이라든가 습성이라든가 이런 것도 한번 굴려서 놓아야 떨어지죠. 거기에서 예전에 살던 그 습성이 나오면, 그냥 나오는 대로 생각하게 돼 있거든요. 나오는 대로 말하고 나오는 대로 하거든요. 그걸 한번 굴리지 못하고 그러니까 그 습성이 다 떨어지지 못하면 인정을 못 해요. 하늘에서, 한울 중심에서 인정을 못한단 말입니다. 열쇠를 받지 못해요. 그걸 해인(海印)이라고도 하고 그러지만요.
그러니까 그 다섯 가지 요소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내가 나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통 속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모든 인과의 습성, 인연들과 살던 그 습성을 그대로 그렇게 반영하고 자꾸 그대로 하지 말고 한번 굴려서 놓되, 그 마음이 분기해서 탁 나오더라도 안으로 상대방을 생각해라 이거야. 내 생각을 하지 말고, 언제나 내 생각으로써 나의 기준으로써 잣대를 삼지 말고, 한번 내가 상대방으로 들어가서 상대방이 돼 봐라 이거죠. 그러면 그 습성이 차차차차 없어지죠. 그리고 둥글어지고 둘로 보지 않게 되고, 그래야 빨리 그 몸통 안에서 벗어날 수 있죠. 몸통을 그냥 통이라고 하죠.
▲질문자1: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제가 조그맣게 일을 하고 있는데 하다 보면 어떤 땐 일감이 좀 적게 들어오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점심을 안 먹고 ‘저 일감 가지고는 내가 이렇게 마음대로 밥을 먹을 수 없으니까 너희들이 나가서 더 벌어들여 오든지 일을 더 많게 하든지 하라.’ 그러고서 어떤 땐 굶어 버립니다. 그랬을 때에 그것이 공부와 관련해서 내면과의 대화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스님: 만약에 내가 당신이라면 이렇게 하겠어요. ‘점심을 먹게 하는 것도 너고, 먹지 못하게 하는 것도 너니까 알아서 해.’ 그게 배우는 과정에서 톡톡한 맛이 나는 도리죠. 그렇게 하고 만약에 그렇게 안됐으면 ‘어, 굶어라 이런 거로구나!’ 그러고, 먹게 되면 감사하고 먹고, 이렇게 하다 보면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안되고 되고 되고 안되고, 이것이 나중에는 그냥 막 돌아가 버려요. 그렇게 한참 돌아가야 뭐가 되는 거지 그게….
하여튼 내가 짐작하건대는, 이렇게 공부하시는 분들이 지극히 하시기 때문에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물론 고기들이 바다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인간도 공기주머니에서 절대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뱅뱅 돌면서, 죽어도 또 거기, 죽어도 또 거기, 이걸로 저걸로 모습을 달리 해 가지고 나오면서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살아서 내 몸뚱이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죽어도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니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대로 그냥 ‘네놈이 알아서 해. 난 너의 심부름이나 할 거야.’ 하고 그냥 콱! 말입니다.

※위 법문은 1995년 8월 6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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