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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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태수의 부름에도 꿈쩍않던 약산유엄/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얼굴을 보니 이름 듣던 것만 못하구나”
“어찌 귀만 중시하고 눈은 천히 여기시오?”

행세께나 하거나 공부 좀 했다고 목에 힘을 주는 벼슬아치들을 한 방에 기를 꺾어버리는 선사들의 기상천외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물론 참선정진의 힘이다. 제자백가서를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꿰는 실력에다가 팔만대장경까지 위로 아래로 외는 유생거사들과는 논쟁을 하거나 논리로 붙어봐야 이래저래 ‘이겨도 손해, 져도 손해’인 게임이다. 이기기 위하여 목소리를 돋우고 잔머리를 굴려야 하니 스님으로서의 위의가 손상되기 마련이다.
혹여 논쟁에서 지게 되면 출가사문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인도와는 달리 중국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이념적으로는 정치가인 크사트리아 계급보다도 종교인인 바라문 계급이 더 윗자리라는 잠재의식이 승려사회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저 한 방(木奉) 한 할(喝)로 끝내는 게 피차를 위해서 또 정법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이고(李 )가 낭주(朗州) 땅의 자사(刺史)의 벼슬을 지낼 때였다. 중앙에 있을 때도 국학박사로 또 사관(史官)으로서 국사편찬에 관여할 만큼 유능한 관리였다. 부임한 고을에 약산유엄(藥山惟儼 751~834)이라는 대 선지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겸사겸사해서 만나고자 하였다. 사또가 부르면 그 고을에 사는 백성으로 냉큼 달려올 일이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나타나지 않았다. 세 번이나 거절을 당하자 열이 이마 끝까지 올라 왔으나 점잖은 체면에 드러내놓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아무리 고을 백성이긴 하지만 상대는 지역불교와 선종을 대표하는 인물이지 않은가.
이고 역시 따지고 보면 정치가이기 이전에 유교를 상징하는 종교인의 위치에 있는지라 함부로 경거망동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잘못하면 유불(儒佛)의 대립으로 비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일인지상 만인지하(一人之上 萬人之下)’라는 그의 화려했던 벼슬자리 이력도 체면손상을 극도로 꺼리는 요소로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찾아가서 버르장머리도 고쳐놓고 한 수 가르쳐 주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도 쐬고 콧대도 꺾어놓을 심산으로 길을 나섰다. 당연히 미리 기별을 했다.
하지만 일주문 앞까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중 나오는 선사를 볼 수가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한 계단 한 걸음 옮기다보니 어느 새 방장실 앞이었다. 꼬일대로 꼬여 심기가 비틀어진 것이 선비 얼굴에 나타날 정도였다. 그러나 여전히 선사는 꿈쩍도 않고 방안에 있었다. 자사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한 시자가 마침내 태수가 왔노라고 아뢰었다. 그제서야 방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길래 저렇게 도도한가 싶어서 가까이 가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정말 보잘것 없는 그리고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꾀죄죄한 늙은이에 불과했다. 화도 나고 어이도 없고 해서 한마디 툭 던졌다.
“직접 와서 얼굴을 보니 이름을 듣던 것만 못하구나.”
표현이야 점잖게 했지만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이다. 그런다고 함께 열 받으면 안 되겠지. 이런 상황에서 심오한 법문 줄줄이 늘어 무슨 소린들 귀에 들어가겠는가. 그제서야 선사는 고개를 들고 태수를 바라보면서 무심히 지나가듯 한마디 하였다.
“태수께서는 어째서 귀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눈은 천하게 여기는 것이오?”
귀로 명성을 들을 때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으로 와서 직접 보니 별 볼일 없다는 그의 말에 대한 이 댓구(對句)는 모든 시비를 그 자리에서 끝내버리는 승부수가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본래 선근이 있고 말귀를 잘 알아듣는 태수는 그제서야 두 손을 모우고서 정색을 하고는 가르침을 청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200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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