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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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2부 1강 <금강경>의 소(疏)를 시작하며
불교는 어렵지 않습니다

소문과는 달리 불교는 어렵지 않습니다. 너무 겁주지 마십시오. 팔만대장경이라 운을 떼면, 사람들은 그 엄청난 분량과 어려운 한문에 놀라, 혹은 한숨을 쉬며 발길을 돌렸고, 혹은 숨을 멈추고 시렁에 고이 모셨습니다. 둘 다 길이 아닙니다. 불교는 ‘알아야’ 맛인데, 그렇지 않으면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를 양이면 차라리 불교 근처에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겁낼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불교의 핵심은 지금까지 보았듯이, 매우 단순하고 쉬운 바 있습니다. 준비는 ‘마음’ 하나면 됩니다.

불교는 쉽습니다
이 말에 또 팔만대장경을 떠올리며, “설마”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있겠습니다. 불가에는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바닷물의 맛을 알자고 바다를 다 들이키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책을 어떻게 다 읽을 것입니까.
모든 일에는 요령이 있고, 말에는 중심이 있습니다. 그것을 장악하면 나머지는 쉽게 풀립니다. 원효 스님이 일찍이 그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펼치면 팔만대장경이지만, 압축하면 마음 하나로 귀착된다.” 원효의 복잡한 교설도 사실 무덤에서 마신 해골 물에 다 들어있습니다.
불교가 쉽다는 제 말을 아니 믿으시려 하시니, 앞선 조사와 선지식의 권위를 빌려 볼까요. 선의 3조 승찬 대사는 선문헌의 걸작 가운데 하나인 <신심명(信心銘)> 첫머리에서 이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지도무난(至道無難)!” 스님은 불교가 말하는 진리가 하나도 어렵지 않다고 분명하고도 힘차게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책 이름을 눈여겨 보십시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 바탕을 에누리 없이, 제발 믿으라는 눈물겨운 권유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믿지 않고, 오래된 책이나 자기 밖의 권위에 기대려는 오랜 습성을 키워왔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용단하여 홱 뿌리치고, 마음 깊이 자기 마음을 믿고 그 내면의 소리에 깊이 귀를 기울이십시오. 왜 자신의 마음을 믿지 않습니까. 왜 자신은 하찮다고 생각하고, 모든 가치 있는 것은 자기 밖에, 자기보다 더 높고 위대한 어디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누구나 마음에 불성을 갖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 마음이 곧 불성입니다. 마조의 권유처럼 다만 오염시키거나 억압하지 마십시오. 우리 마음은 완전하니,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입니다.
이참에 한 마디 해야겠습니다. 불교에 접근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병폐가 있습니다. ‘경전에 있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아니 듣는 버릇입니다. 말하면 액면 그대로 들어야 하는데, 꼭 뒤집어보고 의심하면서 그 뒷면에 무슨 딴 의도나 비밀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조주 스님은 학인(學人) 하나가 도(道)가 무엇이냐”고 하자, 앞에 따라 놓은 차를 가리키며, “자, 들지!”라고 했습니다. 그럼 시키는 대로 마시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데서 길을 더듬습니다. 도(道)가 멀리 있지 않고, “뜰 앞에 있는 잣나무”라고 하면, 그런 줄 알고 잣나무를 빈 마음으로 보고, 하나 된 마음으로 껴안으면 되는데, 그것을 하지 않고, 무슨 다른 뜻이 있는지 머리를 굴립니다. 그 순간 도는 십만 팔천 리 우주 밖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빈 마음으로 보고, 마주 선 사람을 하나 된 마음으로 껴안는 것, 그것뿐이라면 정말 쉽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할 수 있고, 거기 아무런 준비가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것만큼 또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어려움은 그 취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기가’, 그리고 그 바라밀을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일 뿐입니다.

불교는 아무 것도 주지 않습니다
불교는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잊고 있던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게 하고 ‘자각’하도록 도와줄 뿐, 없는 것을 가져다주거나, 혹은 무엇을 더 얹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특히 <반야심경>을 위시한 반야부, 그리고 선의 전통은 “아무것도 얻은 바 없다”는 무득(無得)의 철학을 설파합니다. 불교가 혹시 무엇을 가져다 주거나 덧보태 주기를 기대할까 보아, 불교는 아예 거기 “깨닫는 것도 없다”는 무지(無智)의 소식을 선포합니다. 제가 앞 강의에서 인용한 <반야심경>을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無智亦無得!” 그런 다음 이렇게 이어집니다. “以無所得故, 菩提薩 ,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 碍. 無 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이 뜻을 부연해 볼까요.
“깨닫는 것도 없고, 그리하여 얻는 것도 없으니… 요컨대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믿읍시다. 작게는 작은 거슬림이 있거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어도, 크게는 어떤 역경에 처하거나 불행에 처하더라도, 그 주어진 운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쓴 약은 깊이 울대로 삼키는 연습을 해 나갑시다. 그 용기와 더불어 세상은 나의 자아와 대적하기를 줄여나갈 것이고, 그와 더불어 마음에는 장애물이 점점 더 사라질 것입니다. 마음에 장애물이 없을 때, 우리는 욕망으로부터, 그리고 그 욕망의 저쪽 야누스인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때 세상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투명하고 분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보디스바하, 거기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경열반’이라고 부릅니다.”

불교는 반쪽입니다
불교에 대한 또 다른 오해 하나를 짚어주어야겠습니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려는 것이지, 구체적으로 이러저러한 ‘행동’을 지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기에 불교의 하늘에는 서로 다른 개성의 수많은 별들이 명멸할 수 있었습니다.
불교가 특정한 ‘명령’으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점에서 불교는 ‘비어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채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또 다시 자신의 삶을 남에게 맡기는 비본질적 삶으로 타락할 것입니다. 불교의 최강의 강점이 이것입니다. 삶을 특정한 양식에 맞추어 규율하지 않으려 하기에, 불교는 어떤 형태의 삶에도 적응할 수 있는 놀라운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나 종족에 상관없이, 직업이나 개성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심금에 파고들 수 있고, 그들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불교는 그런 점에서 인간이 배워야할 근본 중에 근본이지만, 그것이 가르치는 것은 기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교는 그래서 썼다가 지우는 물건입니다. <금강경>이 뗏목의 비유를 들고, 금가루의 위험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취지 때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불교는 반쪽만 가르칩니다. 나머지 반쪽은 여러분 각자의 삶을 통해 채우고 증거해 나가야 합니다. 그 자율학습시간을 의미 있게 채우십시오. 왜 아무런 지시도 명령도 없느냐고 불평하지 마시고… 또 그것이 불안 갑갑하여 또 다른 명령을 내리려 하지 마시고….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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