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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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범모(미술평론가·경원대 교수)-길에서 길을 묻는다
이 길은 언제 끝날 것인가. 하루 종일을 달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길을 오늘도 달렸다. 나는 현재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 중이다. 손수 운전으로 대륙의 광활함을 체험하고 있다. 정말도 무지막지할 정도로 커다란 땅덩어리이다. 이렇게 넓은 땅을 가지고도 무엇이 부족하여 남의 땅까지 넘보았는지,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광활한 대지, 그 곳의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어제도, 오늘도 하루 종일을 달렸다. 하여 보스턴에서, 시카고에서, 뉴욕에서, 나의 핸들은 분주했다. 그래도 동부의 북쪽 지역은 적당히 구릉도 있고 우거진 나무 숲의 산도 보인다. 하지만 플로리다나 텍사스 같은 지역의 황량한 풍경은 정말로 지루한 길의 연속일 따름이다.
질주를 하면서, 숱한 트럭과 만나면서, 나는 잭 케루악의 장편소설 <노상에서>를 생각했다. 동으로, 서로, 남의 차를 얻어 타고 다니면서 젊음을 소진하는 젊은이들을 생각했다. 길에서 헤매는 인생. 노상에서, 그것은 한 때 나의 화두이기도 했다. 무엇인가 길에서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남의 차를 얻어 타기도 하고, 남을 나의 차에 태워주기도 하고. 히치하이크라는 제도는 하나의 미풍임에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세상이 험악해지면서 언젠가부터 남의 차 얻어 타기가 사라졌다. 각박한 세상인심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아쉬운 일임에 틀림없다.
동행은 아름다운 일이다. 먼 길을 낯선 사람과 함께 가기. 그것은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차피 인생살이는 낯선 사람과 만남의 연속이 아니겠는가. 시절인연이 오면 친해지고 또 언젠가는 헤어지고. 그 모든 것은 바로 길에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길, 길은 우리 인생살이를 상징한다. 오솔길이 있는가 하면 고속도로도 있듯이.
도반(道伴)이란 단어를 생각한다. 벗과 함께 가는 길, 그것처럼 아름다운 길도 없으리라. 그 길이 피안을 향하여 가는 것이라면 더욱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길을 걷는다. 그 길은 익숙한 어제의 길이기도 하고 낯선 새로운 길이기도 하다. 나그네 길을 도반과 함께 하는가. 과연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도반이 있는가. 도반이라는 단어는 가람에서만 통용되는 특수용어인가. 가람이라고 하니 불교 용어가 떠오른다. 바로 협시불이라는 용어이다.
삼존불의 경우, 우리는 흔히 본존상의 옆에 있는 상을 협시불이라고 한다. 협시라는 단어는 상하의 수직구도를 일컫는다. 깨달음의 세계에서 굳이 위계질서가 분명한 용어를 사용해야 할까. 나는 언젠가부터 협시라는 용어에 대하여 커다란 아쉬움을 지니고 있었다. 하여 협시를 대신할 만한 용어 찾기에 골몰하기도 했다. 그 같은 고민은 우연히 한 도반으로부터 해결되었다. 바로 반불(伴佛)이라는 용어였다. 반불은 수직이 아닌 수평의 구도를 의미한다. 상하의 위계질서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렇듯 평등개념은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의 의미가 아닌가. 협시불이라는 용어보다 반불이라는 용어, 나는 이 말에 감동을 하고 있다. 함께 가는 길은 외롭지 않다. 도반과 함께 가는 길은 힘들지 않듯이.
나는 오늘도 대륙을 질주했다. 물론 가족과의 여행길이지만, 길이 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부처님의 일생은 바로 길,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탄생, 득도, 설법 그리고 열반에 이르기까지 길과 연결되어 있다. 그 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길은 안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는 전진을 요구한다. 운수행각이라는 단어의 상큼함이 이 여름을 멋있게 꾸민다.
우리는 길을 간다. 혼자 혹은 여럿이. 하지만 우리가 가는 이 길은 과연 어떤 길인가. 이 뜨거운 여름,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누구와 함께 가는가, 그대는 협시를 원하는가, 반불을 원하는가.
200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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