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70. 4.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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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세생생 보현행자의 길을 가리라 (상)/권혁위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이 진리처이니라.’ (임제 선사)
위 게송은 내가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조사스님의 말씀이자, 오늘날 치열한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불자들을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현세의 많은 이들이 형상(명예, 권력, 돈, 여자 등)에 집착한 나머지 스스로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각자의 축복된 삶을 영위하지 못한 채 허망하게 한 생을 끝낸다. 이는 마치 자기 자동차의 열쇠를 차 안에다 두고 바깥에서 차 문을 잠근 꼴이다.
나는 모태 신앙으로 불교를 만났다. 불심이 깊으셨던 나의 어머니는 나의 고향인 강릉시내에서 약 이십여 리 떨어져 있는 법왕사에 백일 지성을 드리고 나를 잉태하셨단다. 6ㆍ25전쟁이 치열하던 1950년 시월 중순 어느 날, 남하하는 북한 인민군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미군 비행기가 교량을 끊기 위한 폭격을 감행하던 한 그날이었다.
나는 파편이 난무하던 그때 난산 끝에 태어났다고 한다. 어머니를 비롯한 친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때의 그날을 생생하게 증언해줘서인지, 나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 날의 사건을 뇌리에서 지우지 않고 있다.
나의 생가를 가로 질러 건너편에는 오대산 월정사의 포교당인 관음사가 있었다. 나는 자라면서 그 절의 부설 유치원에 다녔으므로, 절마당은 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나와 내 친구들, 그리고 선후배들의 운동장이었다.
그곳은 만해선사께서 공부하셨던 곳이기도 하다. 법당의 불상과 관음보살상은 내 어린시절의 신비한 대상 그 자체였고, 그 자애롭고 친근한 모습은 내 가슴속에 이미 깊이 각인돼 버렸다. 관음사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모든 강릉인들이 평안을 기원드렸던 귀의처이자, 큰 재난이 발생했을 때면 몸과 마음을 맡겼던 피난처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시내에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도, 물난리가 시내를 휩쓸 때에도 그곳은 묘하게도 침범되지 않았던 성지였다. 몇 년 전 사상초유의 태풍 ‘루사’와 ‘매미’가 연이어 강릉지역을 강타했을 때에도 그곳만은 안전했던 것을 보면 그야말로 수월도량임을 알 것 같다.
나는 관음사를 마음에 담으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자연스레 불교학생회에 입문하게 됐다. <반야심경>을 암송하는 것부터 시작해 지도스님께 법문을 듣기도 하고 수련회를 다녀오기도 했는데 그것들은 내게 매우 흥미로웠다. 여러 학교 교우들과 함께 활동하며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냈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당시 불교학생회 회장이었던 전보삼군이 생각난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학교를 다닌 그는 현재 신구대학교 교수이자 만해기념관장직을 맡고 있다. 오래전 사재를 털어 남한산성 한 켠에 만해기념관을 짓고 민족정기와 만해사상을 천하에 선양하고 있는 그. 많은 친구들 가운데 나와 가장 뜻이 맞고 같은 길을 가는 도반으로서의 우애를 다졌던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면서 많은 주변의 인연들을 만나고 또 새로운 도시환경에 물들면서 불교와 담을 쌓게 됐다. 캠퍼스에서 사귀게 된 팔도 사나이들과 만나면서 세간옥락에 빠지게 됐고 잠시 부처님을 여의었던 것이다. 그러다 학기 초부터 사귀게 된 같은 과 동기였던 이전 아내와 캠퍼스 커플로 4년간 연애 끝에 졸업 후 바로 결혼했다. 12년 동안 인생의 반려자로 함께 했으나, 그는 1984년 4월 청천벽력같은 암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2년여를 투병하다 86년 4월 어느 날 아내는 사바의 인연을 훌훌히 털고 이 땅을 떠났다. 당시 내 나이 서른 일곱. 직장에서 한창 인정받고 조직의 중심에 서서 이제 좀 재미나게 살만할 때가 됐을 때 아내는 무정하게도 나와 세 아이들을 뒤로 한 채 세상인연을 달리 했다. 나와 아이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큰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4학년, 둘째 딸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막내 녀석이 겨우 다섯 살이었으니, 4월은 정말 내 인생에 있어서도 잔인한 달이었던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참인지 거짓인지, 억장이 무너져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견딜 수 없었던 상황에서 나는 절을 찾게 됐다. 암선고를 받은 아내와 주위의 안내로 잠실에 있는 불광사ㆍ불광법회에 처음으로 발을 붙이게 됐다. 투병생활 2년 동안 병원 치료는 물론 기도와 정진을 열심히 했으나, 전생업과 시절인연 때문이었는지 이생에서의 고통과 번뇌를 쉬는 쪽으로 마음을 놓고야 말았다. 남게 된 나는 황망한 마음을 놓을 수 없었으나 아내의 명복이나마 열심히 빌어야 하는 것이 못난 나의 몫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건성으로 아내를 따라 절을 찾았던 사이비 불자의 너울을 벗고, 그날 이후부터 지심참회하며 기도도 공부도 열심히 했다.
먼저의 아내를 떠나 보낸 후 약 1년여 동안은 그야말로 나에게는 지옥이었다. 어린 자식 셋을 거느리고 직장 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슬프고 막막했다. 강릉의 부모님께서는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던 이모님을 서울로 급파하셨다. 의식주는 이모님의 수고로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아이들의 학습지도와 보건관리가 전혀 되지 않기에 아이들의 숙제와 준비물을 내가 직접 챙겨줬고, 아이들 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찾아가지도 않던 담임선생님을 수시로 만나기도 했다. 녀석들의 ‘엄마가 없는 목마름’을 옛날 양반이신 이모님은 돈으로 때우셨다. 아이들은 찬 빙과류를 매일 먹어대다가 허구헌날 감기를 앓아 병원을 번갈아 들낙거리곤 했다.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매일 밤을 숨죽여 울었다. 오지 않는 잠을 수면제로 청하기도 했다.
난 그때 지옥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살아있는 생에 지옥도 있고 극락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는 가운데 용기를 내서 잊었던 저녁기도를 시작했고, 염주와 반야심경 책자를 가슴에 안고 잠이 드는데, 그게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나무 반야바라밀.
고향의 부모님께서는 매일 전화로 안부를 물으시며 나를 걱정하셨다. 주위의 지나친 염려도 나를 힘들게 했다. 핑계에 불과하게 들릴지 몰라도, 아내의 3년 상은 치르고 재혼을 생각할까 했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아이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계속)
200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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