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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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왜 이렇게 서론이 길었나
<금강경>의 별기(別記)를 마치며

이제 서론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강의를 시작한지 벌써 1년이 되었네요. 시간에 쫓겨 밀리다 보니, 어느새 한 해가 훌쩍 갔습니다.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 뿌듯하기도 하지만, 한편 귀한 지면을 내 멋대로 썼다는 미안함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동안 너무 많이 <금강경>을 말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독자 대중들께서는…. 제 강의가 그동안 <금강경>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반대로 이제까지 <금강경>에 대해서 너무 많은 얘기를, 쓸데없이 장황하게 했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선사들이 옆에 있었다면, 몽둥이로 두들겨 맞거나 아악하는 고함소리 몇 번은 착실히 들었을 망발을 저질렀으니 말입니다.
<금강경>은 한 마디 말로도 이미 넘치고, 또 팔만의 장경으로도 다할 수 없습니다. 이 뜻을 알면 불교의 근본 소식을 깨우쳤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선법(禪法)과 교학(敎學)의 두 극단 가운데서 중용쯤을 취하고자 했습니다. <금강경> 나아가, 불교가 가르치는 근본 취지가 무엇인지, 그 핵심 골격에 대해 제가 엿보고 들은 바를 대강 적어드렸습니다.
이는 물론, 정통의 방식이 아닙니다. 다들 <금강경> 하면 소(疏)의 방식을 익숙히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특히 이 시대는, 소(疏)보다는 이를테면 별기(別記)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굳이 별기(別記)의 방식을 택했나
제가 이런 별기(別記)의 방식으로 <금강경>을 해설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불교의 장경이 어느 곳을 펼쳐도 불교의 소식을 알려주기는 하나, 그들 각자가 표현하는 방식은 서로 너무나 다릅니다. 불교는 근기(根基)론 위에 서서 방편(方便)론을 말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듣는 사람을 위한 배려인데, 역시 진리는 듣는 자의 성격과 자질, 문화와 교양, 시대와 상황 등등을 고려해야 하는 물건입니다. 그래서 저는 소보다는 별기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적어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대상: <금강경>이 설해지던 당시의 독자는 기억하십시오, 일반인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최상승의 불교를 설하고 있는 점에서, 진리를 자신의 전부를 바칠 각오로 오랫동안 수련해 온 이를테면 골수 불교수행자들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가르침은 매우 고차원의 것입니다.
2) 상황: 둘째는 <금강경>의 ‘말씀’은 불교의 역사를 통해 습득된 어법과 문제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맥락과 환경은 지금의 현대인들에게는 생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언어는 진실의 일면, 빙산의 일각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사실을 보여주기에는 불충분하고, 그래서 언제나 오해와 왜곡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금강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수면 위에 잠긴 빙산의 전체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3) 언어: 셋째는 그 맥락과 상황을 이해하더라도, 그것을 해설하는 언어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로 소통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가 제일 취약하고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금강경>의 맥락과 상황은 여러 주석들이 이러저러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인도와 중국, 그리고 한국에서 발전된 수많은 주석들이 바로 그 잠긴 빙산을 드러내주기 위한 보조도구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채용하고 있는 언어가, 인도 아니면 한문으로 씌어 있다는데 있습니다. 한문에 답답한 분들이 지금 인도나 남방에서 옛적의 불교를 배워 오시는데, 불교의 다양화와 변증을 위해서는 장려할 일입니다마는, 그거나 그 언어 또한 한문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소통되지 않는 ‘낯선 비의적 언어’임을 아셔야 합니다.
제 강의는 이 세 부면의 난제를 동시에 해결해보겠다는 기염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하여 1) 최상승의 경지보다 그것이 타파하고자 하는 장애의 현실에 대해 장황하게 논의했고, 2) <금강경>이 말하는 언어보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과 맥락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3) 무엇보다 이 모든 이야기를,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일상적 언어의 지평 위에서 언설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별기(別記)의 방식입니다. 저는 현대인들에게는 경전의 언어를 축자적으로 충실히 따라가는 소(疏)의 방식보다, 오해와 헛디딤의 위험은 크지만 과감한 해석과 체계를 제시하는 별기(別記)의 방식이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틀었지요.

다시 길을 나서며
그렇지만 제 강의가 이 기획에 얼마나 부응했는지는 저도 잘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보여준 것은 제가 불교와 만난 흔적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틀림없이 많이 틀렸을 것인데, 혹은 근본적으로 틀렸을 것이고, 때로 무책임한 소리를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누구에게나 보이게 해 놓았으니, 그리하여 자신의 체험으로 제 망발을 비판하고 반증할 수 있으리니, 별다른 위험에 빠지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위안해 봅니다. 부디 제 혀끝을 따라오지 말고, 스스로의 길을 가십시오. 장자가 말하는 대로, 길은 누구에게나 같은 길이 아니라, “각자 걸으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道行之而成)”이니 말입니다.
어쨌거나 이제 여기서 그만 접는 것이 순리이고 당연합니다. 1000여 매를 끌어오느라 지친 붓을 쉬기도 해야 하고, 제가 몸담은 연구원에 일도 하나 맡은 터라, 처음의 공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바도 있습니다. 그런 뜻을 표했더니, 현대불교의 국장님 이하, 몇 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아니, 아직 본론에 들어가지도 않고, 연재를 그만둔단 말이오.”
마친 것은 겨우 서론이니, 이제부터라도 본문을 쫓아가며 해설을 해 주어야하지 않겠느냐는 주문인데, 제 생각에는 소(疏)에 관한 한, 시중에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시중의 서점에 불교책 서가의 거의 한 코너 전부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 <금강경>의 주석들 아닙니까.
곰곰 생각한 끝에 여기 다시 하나를 더 보태기로 했습니다. “역시 별기는 소와 더불어 있을 때 완전해지는 법이겠지”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말입니다. 짐짓 외람되게 원호를 삼자면, 원효 스님께서도, <대승기신론>의 별기(別記)만으로는 흡족하지 않아서 다시금 소(疏)를 지으셨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아마도 무릇 총론과 더불어 각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동안 <금강경>의 근본취지를 강(講)했다 할 수 있으니, 이제부터는 그 세부적 내용을 현대적으로 써 나가 보겠습니다. 1년 전 처음 시작할 때의 예고대로, 구마라습의 한역 <금강강>을 축으로, 오가해(五家解) 가운데 혜능 스님의 구결(口訣)을 중심으로 다루겠습니다. 가끔 야부(冶父)의 촌철살인도 정문의 얼음처럼 청량하게 찍어드릴 텐데, 다시 시작되는 긴 여행이 모쪼록 지루하거나 짜증스럽지 않았으면 합니다. 즐겁고 유익한 소풍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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