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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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시·청각과 벽암록 한 구절
우리가 가장 많이 암송하는 반야심경에 ‘무(無)안이비설신의’라는 귀절이 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그리고 뜻을 내는 기관인 눈·귀·코·혀·몸(피부), 그리고 뇌신경조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기막힌 말과 같이 들린다.
게다가 이 기관이 느끼는 색·성·향·미·촉·법 또한 없다고 선언하니 더욱 놀라울 뿐이다.
눈과 귀는 우리의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기관이다. TV를 볼 때나, 전축, 핸드폰 모두 눈과 귀를 통해서 정보를 주고받는다. 눈과 귀의 지각 메커니즘은 매우 흥미롭다.
외부 세계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은 파동을 통해서다. 파동이란 파도와 같이 높낮이가 있는 모습을 띠고 있다. 빛이나 소리 모두 파동의 모습으로 다른 지역으로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다. 주파수는 이 높낮이가 1초에 몇 번 정도 변화하는가(이를 헤르츠라고 한다)를 나타낸다. 빛의 주파수는 약 10의 15제곱 헤르츠 정도이고(1억의 약 100만 배 )이고, 소리의 주파수 중 약 16헤르츠부터 20킬로 헤르츠 정도를 귀로 들을 수 있다. 재미있게도 외부세계에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파동의 주파수 영역을 보면, 대부분 빛과 소리영역에 있다. 즉, 태양에서 만들어지는 빛, 그리고 자연에서 만들어 지는 소리에 맞추어서 눈과 귀가 이 주파수에 반응하도록 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반야심경에서 주장하는 ‘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눈과 귀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정보가 없다는 것일까. 우리가 듣고 있는 방식의 한계를 일깨워주는 것일까. 아니면 집착하는 ‘나’라는 물건이 없다는 과학을 가르쳐 주는 것일까.
관세음보살은 듣는 것(파도소리)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른 위대한 성자다. 파도소리를 예로 들어보자(꼭 파도소리가 아니어도 좋다). 밀려들어오는 소리, 다시 물러나가는 소리, 그 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이 연속해서 들려온다. 우리는 밀려들어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나가는 파도소리를 예측한다. 밀려들어오는 파도소리를 명료하게 듣고 있다기보다는.
여기서 우리는 밀려들어오는 파도소리와 함께 듣는 내가 같이 개입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하나의 파도소리에서 그 소리에서 ‘집착하는 나’가 같이 끼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바로 듣는 것으로부터 항시 존재하는 집착하는 하는 ‘나’에서 해방됨으로써 부처를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벽암록> ‘제46칙’에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문답을 주고받는 경청 화상과 제자가 등장한다. 무대는 아마 요즘과 같이 무더운 여름이었을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제자에게 묻는다.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무슨 소리인가?” “빗방울 소리입니다.” 이에 스승이 질책한다. “중생이 전도되어 바깥의 물건만 쫓아다니는구나.” 이때 관세음보살이 계셨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 아마 자비의 웃음을 보여주시지 않았을까. ■서울대 전기공학부
200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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