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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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한국학중앙연구원
돈교는 불교에 물든 사람을 위한 해독제

돈교의 설파 이후, 우리는 아득해집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고, 아무것도 얻은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깨우친 바는 다만, 그동안 우리가 문제를 잘못 설정했다는 것, 그래서 잘못된 해결책을 더듬으며 고전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 하나만을 일깨워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그것보다 소중한 가르침이 다시 없습니다. 작은 문제든 큰 문제든 해결책은 문제를 바로 파악하고, 목표를 정확하게 설정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두 관문
우리가 문제를 잘못 설정했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일까요. 두 가지가 있는데요, 1) 하나는 인간의 근본 문제가 ‘밖에 있다’는 통념입니다. 외적 조건이 달라지면 나는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념, 내가 행복해지려면 온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는 강박이 그 하나입니다.
불교는 이 무의식적 전제를 뒤집는다는 점에서 혁명적입니다.
불교는 행복의 주관적 차원에 주목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유심(唯心)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의 유심(唯心)의 철학을 다시금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행복의 조건을 이미 다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을 가로막는 방해물들 또한 우리 마음속에 있다.” 이 지점을 이해하는 것이 첫번째 관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취지를 올바로 이해하고, 전적으로 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류가 생긴 이래, 우리는 바깥을 돌아보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 있어, 문제를 다들 밖에 설정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2) 이 지점을 통과하고 나면 우리는 두번째 관문에 봉착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내 ‘마음’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우리 내부의 본래 행복을 되찾을 것이냐”하는 방법(道)에 관한 것입니다. 첫번째가 불교에 입문하기 전의 문제라면, 두번째는 입문 이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예측과는 달리 매우 다양합니다. 그것을 “부처님의 약상자에는 수많은 약이 있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불교의 역사는 그 길에 이르기 위한 수많은 실험과 논란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어느 길을 택하든, 그것은 이르고자 하는 목표에 가까이 그를 데려다 줄 것입니다. 각자의 근기에 따라, 개인적 기질과 문화적 풍토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초기 불교가 있고, 발전된 불교가 있습니다. 소승이 있고, 대승이 있으며, 중국의 선과 티베트의 불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의 전통불교와 더불어 현대에 들어와서 유럽과 미주 등지에 새로운 불교 운동이 실험되고 발전되고 있습니다. 이들 다양한 대소(大小), 돈점(頓漸)의 불교 가운데 어느 것이 어느 하나를 부정하거나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화엄의 웅대한 불교와 선의 활발발한 불교와 마찬가지로, 얕고 천근한 불교의 가르침 또한 귀하디 귀한 가르침입니다.

스스로를 부정하여 위대해진 불교
지금까지의 강의에서 제가 초점을 맞춘 것은 이 가운데 대승과 선의 길입니다. 이 길의 특징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를테면 세속에 물든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라기보다, 불교에 물든(?) 사람을 위한 처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조차, 아니 그것이 불교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불교의 근본정신에 위배될 가능성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불교는 그 점을 오랜 경험에 의해 분명히, 어느 종교보다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치료하는 해독제를 개발했습니다. 그것이 중관의 공(空)에서 시작하여, 화엄의 법계(法界), 그리고 선의 파천황(破天荒)으로 이어지는 공통의 정신입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아니 불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그 법음(法音)을 알아듣지 못해서 탈이지, 불교에 들어선 사람, 불교를 깊이 믿는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에 중독된 사람의 증상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불교가 귀하다고, 그 금가루를 눈에 넣는 어리석음이 그 하나입니다. 불교, 그 위대한 가르침은 궁극이 아니고 방편입니다. 그 뗏목은 <금강경>이 일러주듯이 강을 건너는 도구일 뿐, 짊어다니고 다녀야 할 신전이 아닙니다. 불교가 신전이 될 때, 그것은 또 다른 도그마가 되어, 나와 남을 구속하고 타락시킬 것입니다. 이 부자유와 예속은 불교가 무엇보다 타기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그 인습의 도그마를 깨뜨리지 않고는 진정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고구정녕 가르칩니다. 나는 이것이 불교를 다른 세계종교나 위대한 철학과 구분해주는 근본적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불교는 마침내 자신이 세운 종교의 푯대를 스스로 꺾어버리는 파천황을 연출합니다. 그 우상타파의 정신이 단하로 하여금 목불을 태우게 했고, 임제로 하여금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이런 선언을 파괴적 부정적으로 읽어서는 천만 불가합니다. 불교는 이 자기부정의 정신으로하여 역사를 통해 불가사의한 포용력을 과시했고,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한 평화의 철학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불교도 교단의 편협성을 벗어나야 다른 종교와 대화도 하고, 세계의 불교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2) 아니, 이보다 더 심각한 증상이 있습니다. 불교에 중독된 사람들의 보다 심각한 증상은 불교가 모종의 힘과 권력을 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그들은 생각합니다. “깨달음이란 아무에게나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독특한 엽기적인 수련을 필요로 하며, 그 상승의 어느 순간, 섬광처럼 다가오는 모종의 경험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그는 보통사람들보다 더 ‘위대해지고’, 더 ‘강한 힘’을 갖게 되리라”는 무의식적 기대로 일생을 이 일대사 타파에 걸고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봅시다. 이 또한 위태롭고 무모한 욕심 아닙니까. 불교가 그렇게도 타파해야 한다는 욕망을 지금 수행자들은 불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두 가지 병을 해독하는 장치가 바로 돈교(頓敎)입니다. 돈교는 단도직입으로, “깨달음은 없다”고 선언합니다. 돈교는 그것이 미리, 누구에게나 성취되어 있으므로 찾거나 얻을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며, 그 새삼스런 자각으로 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평상심을 되찾는 것은 아무 기특(奇特)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거기서 무슨 권력을 얻을 일이 있겠으며, 무슨 남다른 권위를 행사할 것입니까. 불교에 물든 사람들은 여기서, 그만 멈추어야 합니다. 더 이상 나가면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가 찾은 것은 다만 자신의 뒤뚱거리던 평상심일 뿐이었으나, 그러나 그것만큼 큰 축복이 어디 다시 있겠습니까. 그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되, 그는 진정 이 세상 무엇보다 귀한 보물을 쓸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200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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