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손 세우고 구지 선사 흉내내던 동자승
스승에게 손가락 잘리고 그 자리서 깨쳐
흔히들 ‘동진출가자’로 불리는 스님네들 가운데 중노릇 반듯하게 하는 이들을 보면 정말로 ‘승보(僧寶)’라는 말이 어울린다. 진짜 ‘인간문화재 승려부문’이라도 만들어 국가적으로도 보존할만한 무형문화재 그 자체라는 느낌이 든다. 절집의 풍습과 역사를 온몸으로 어른들에게 배우고 체현해내며 염불 간경 좌선 불사 등에서부터 시시콜콜한 것까지 어느 것 하나 기울어짐 없이 여법하게 소화해낸다.
하지만 이제 세월이 갈수록 이런 인재들은 보기드물어질 것이다. 한 집안에 아들 혹은 딸 하나씩밖에 낳지 않으니 어느 가문인들 선뜻 독자(獨子)를 절집에 내놓겠는가. 티베트에서는 싹수 있는 ‘놈’을 ‘린포체’라고 하여 어릴 때부터 지도자로 특별히 키운다고 한다. 이런 인재들이 세계불교화의 주축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선어록에 나오는 꼬마 사미승 내지 동자승은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언제든지 천진불(天眞佛)로 진입할 수 있는 천재들이기도 하다. 구지 선사와 똑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는 흉내를 내던 동자승도 마찬가지다.
구지 선사의 암자에 선사를 시봉하는 한 동자승이 있었다.
동자승은 항상 납자들이 구지 선사에게 와서 묻고 대답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보았다. 그런데 스승은 누가오든지 늘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법문만 하는 것이었다.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이 동자승도 손가락을 세우는 선법(禪法)을 배우게 되었다. 드디어 스승이 출타하여 자리를 비울 때는 찾아온 납자를 자기가 손가락 법문으로 제접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것을 지켜보던 어떤 납자가 구지 선사에게 말했다.
“선사시여! 저 동자승은 참으로 희유(稀有)합니다. 그도 불법을 알아서 누구나가 동자승에게 물으면 화상처럼 손가락만 세웁니다.” 구지 선사가 이 말을 듣고 난 뒤 어느 날 가만히 칼 한 자루를 소매에 넣고는 동자를 불렀다.
“가까이 오너라. 듣건대 너도 불법을 안다는데 사실이냐?”
“네! 그렇습니다. 스승님.”
“어떤 것이 불법인고?”
이에 동자승은 자랑스럽게 스승이 평소 하던 대로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손가락을 세우자마자 선사는 칼로 그 손가락을 끊어버렸다. 동자는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갔다. 이에 선사가 애틋한 목소리로 동자를 부르니 도망가다 말고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돌렸다.
“어떤 것이 불법인고?” 동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을 세웠다. 그러나 손가락이 보이지 않자 이에 크게 깨쳤다.
이제 부처님오신날 연등축제 무렵이나 돼야 동자승을 구경할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그것도 이벤트의 하나인지라 단기출가 형식으로 데리고 있다가 행사를 마치고나면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해마다 이런 동자승 행사를 하는 사찰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범불교집안의 ‘성골’ 내지는 ‘진골’ 출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 이후에도 서로 묶어주고 또 기수별로 이들을 위한 정기적 모임을 만들고 출가의 인연까지 연결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리도 필요하다.
이제 모두가 독자인 가정이 대세이다보니 누가 출가하여 이 불법문중을 지켜갈지 그것도 걱정이다. 앉아서 출가자를 기다리는 그런 시대는 지난 것 같다. 그래도 현재 출가자들중에는 장남과 독자가 생각보다 많은걸 보면 그것도 아이러니다. 수행생활이 주는 매력은 집안걱정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반증일까?
그런데도 종단의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어른들께서 ‘실버타운 촌장’이나 하실 말씀인 출가연령한계 40세 조항도 없애야 한다고 한다니 한편으론 종단백년대계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번복하는 것 같아 참으로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