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가 ‘되려고’ 기웃거리지 마라
돈교는 선의 표어입니다. 그것이 혜능 이래의 유구한 전통입니다. 서로 표현은 다르고, 스타일은 달랐지만,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소식은 부절(符節)처럼, 꼭 같았습니다.
오늘은 그 증거 하나로 마조(馬祖道一, 709~788)의 즉심즉불(卽心卽佛)을 짚어보겠습니다.
즉심즉불은 “네가 곧 부처이다”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처라면, 그럼 다시 부처를 운운할 필요가 없겠지요. 말이란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루거나 얻기 위해서, 혹은 피하거나 떨치기 위해서 존재하니까 말입니다.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든다
마조는 스스로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부처가 ‘되려고’ 기웃거릴 점교(漸敎)의 부류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도록 정문에 일침을 가했습니다. 그것이 심즉시불(心卽是佛) 혹은 즉심즉불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표어대로 만일 내가 부처라면, 이제 부처의 이름은 별 의미가 없어집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부처로서 살아가는 일일 것이니, 더 이상 부처니 중생이니 따질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심불시불(心不是佛)은 어느덧 비심비불(非心非佛)이 되었습니다. 두 언사는 결국, 같은 말입니다. 이 소식을 <금강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수보리야, 내가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진리라고 한다.”
마조에게 이 돈교의 역설을 알려준 사람은 육조 혜능의 5대 제자 가운데 하나인 남악 회양(南嶽懷讓, 677~744)이었습니다. 남악은 첫 눈에 그가 범상치 않은 그릇임을 알고, 이렇게 떠 보았습니다.
“자네 지금 무얼 하고 있나.” “보시다시피 좌선을 하고 있습니다.” “좌선은 해서 무엇하려는가.” 마조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부처가 되려구요.”
다음 날 남악은 마조의 선방 앞에서 기와를 숫돌에 갈기 시작했습니다. 사각대는 소리에 눈을 뜬 마조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무얼 하고 계십니까.” “보시다시피 기와를 갈고 있지.” “뭐하시려고요.” “거울을 만들려네.” 마조는 크게 웃으며, “원, 농담도. 기와를 갈아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남악은 마조의 말을 잡아채듯 말했습니다. “그렇지. 기와를 갈아 거울이 안 된다면 퍼질러 앉은 좌선으로 어떻게 부처를 기약하는가.” 쇠망치로 맞은 듯 얼얼한 마조가 남악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남악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레가 안 간다면 소를 쳐야 하는가, 바퀴를 쳐야 하는가.” 마조는 대꾸할 말이 없었습니다. 남악이 따끔하게 일렀습니다. “좌선이라고 앉은 부처 공부를 하고 있는데, 참된 원리는 앉거나 누움에 걸리지 않고, 궁극의 자리는 일정한 틀이 없다. 너의 따지고 가리는 마음, 취하고 버리는 태도로 하여 부처가 질식하고 있음을 왜 모른단 말이냐.”
부처의 목을 조르다
물론, 좌선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외물의 유혹과 침탈로부터 마음을 지키기 위한 불교의 기초수련입니다. 남악이 이 수련의 효과와 의미를 전면 부정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초일 뿐, 궁극은 아닙니다. 선의 운명을 걸머쥐고 ‘천하를 짓밟을 천리마’라면, 그 기초를 넘어서 다른 차원을 경험해야 합니다. 남악은 정형화된 자세로 부처를 이루리라던 마조를 위해 최상승(最上乘)의 법문, 즉 혜능 이래의 돈오(頓悟)의 법문을 들려주었던 것입니다.
“엄격한 생활과 소승적 명상이 해탈로 이끌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깨달음은 점진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수행의 단계와 과지(果地)의 점차(漸次)를 설하는 방편론은 궁극의 깨달음을 오히려 방해한다. 부처와 중생 사이, 그리고 깨달음과 미혹 사이의 거리는 기실 아주 가깝다. 현실이 곧 궁극이고, 네가 곧 부처이다(卽心是佛). 지금 네가 그 본원의 걸림 없는 세계를 네 스스로 흩트리고 있지 아니하냐. 너의 가리고 따지는 마음, 취하고 버리는 태도로 하여, 그리고 그 분별로 인한 종종의 장애로 하여 부처의 걸음이 뒤뚱거리고 있다.”
이 말에 마조의 눈이 문득 열렸습니다. 그는 진정 자신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에누리 없이 수긍했던 것입니다.
돈교의 깨달음이란 결국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선가에서는 이른바 깨달음이란 것을 얻고 나서는, 한 바탕 배꼽을 잡으며, “소 위에 타고 앉아 소를 찾고 있었네.”라며 자신의 그동안의 어리석음을 탓하지들 않습니까.
깨달음은 없다
깨달음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법(佛法)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싱겁기 그지없습니다. 조주(趙州)는 학인이 부처의 진리를 물을라치면, “차나 한잔 들지(喫茶去)”라고 권했습니다. 여기엔 아무런 신비적인 낌새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액면 그대로입니다. 너무나 싱거운(?) 이 진리에 범신론적 억지나 무리한 형이상학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유혹을 경계하십시오. 선은 아무것도 아닌데, 더구나 신학이나 형이상학은 선(禪)의 소식과 십만 팔천 리입니다.
선은 불교를 ‘심각하게’ 말하는 것을 무엇보다 경계합니다. 오죽하면 자기 종교의 창시자에게 ‘똥 닦는 막대기’라는 불경(不敬)을 서슴지 않겠습니까. 단하(丹霞天然 738-824)는 춥다고 법당의 목불(木佛)을 도끼로 쪼개 캠프파이어를 해 버렸습니다. 놀란 주지가 억장이 막혀 발을 구르자 태연히, “우리 부처님 사리가 얼마나 나오는지 궁금해서…”라면서 재를 뒤적였습니다. 목불에 무슨 사리냐고 어이없어하자, 단하는 “사리가 없다면 부처님이 아니지”라며 쏘아붙였습니다.
하여, 초자연적 실재란 없고, 초월적 깨달음이란 것도 헛소리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실제(實際)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 없이, 욕망의 흔적과 조바심 없이 관(觀)할 수 있을 때, 그곳이 곧 구원이고 법계(法界)입니다. 진리란 피곤하면 눕고 졸리면 자는 것일 뿐, 이밖에 무슨 특별한 소식은 없습니다. 오늘 지은 업(業)이 마음의 창고(如來藏)에 아무런 찌꺼기나 흔적(種子)을 남기지 않고 또 내일 다가올 일을 걱정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부처입니다.
마조도 바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도(道)는 굳이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다만 오염시키지만 않으면 된다.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생사(生死)를 의식하여 조작하고 선택하는 일체가 그것이다. 도(道)와 곧바로 만나고 싶은가.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이니라(平常心是道).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인위적 조작과 주관적 가치판단이 없고, 의도적 선택이 없는 것, 사물에 대한 고착이나 방기가 없고, 진리에 대한 환상도 없는 바로 그곳을 가리킨다! 경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범부의 행(行)도 아니고 성인의 행도 아닌 것, 그것이 보살행이라고. 다만 이렇게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 상황에 따라 응접해 나가는 것이 바로 도(道)이고 그 세계가 바로 법계(法界)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