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둥 엄마 오리
못 물 위에 둥둥
동동 아기오리
엄마 따라 동동
풍덩 엄마 오리
못 물 속에 풍덩
퐁당 아기 오리
엄마 따라 퐁당
‘감자꽃’으로 유명한 권태웅(1918~1951) 시인의 ‘오리’를 읽으면 한가로운 연못에 떠 있는 엄마 오리와 아기 오리의 모습이 그려진다.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시인의 눈에 비친 오리 가족의 풍경은 그 시대 어린이들에게 한 없이 맑고 정겨운 선물이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어떤 선물을 받고 있을까?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알록달록하게 염색 한 병아리들을 주고받는다는 보도가 있었고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를 비난하고 염려하는 글이 쏟아지고 있다. 어미 닭을 따라 앞마당과 외양간, 미나리꽝을 쫑쫑거리며 다니는 노란 병아리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을 어른들이 돈벌이를 위해 그 여린 솜털에 화공약품을 잔뜩 묻혀서 판다는 것 자체가 한 편의 ‘지옥도’다.
물론 염색된 병아리를 사서 노는 아이들에게도 병아리는 장난감 이상의 의미가 없을 테니 그 역시 지옥의 한 장면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지옥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고귀한 생명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다 못해 아이들에게 장난감 대용으로 인식 시키는 지옥 말이다.
학교 앞 문구점 구석진 곳에 비치된 게임기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아이들, 책가방을 팽개치고 인터넷에 접속해 폭력으로 일관되는 게임에 빠지는 아이들에게서 인간 세상의 밝은 미래를 차마 내다볼 수가 없다. 참담한 일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에 더 큰 분노를 느끼게 된다. 언젠가 “이 시대의 어른들은 생존을 위한 전사 같다”는 말을 들었다. 삶이 전쟁이란 말이다. 어른들이 그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동안 아이들은 도덕이 뭔지, 생명이 뭔지, 인간이 뭔지도 모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인과라는 개탄을 들으며 입맛이 씁쓸했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세상에는 존귀한 것이 많다. 그런데 그 존귀성은 사람에게서 온다. 사람이 가치를 부여함으로 존귀해지는 것이지 스스로 존귀해지는 물건은 없는 것이다. ‘생명’은 어떤가? 누가 생명의 귀함과 천함을 따질 수 있는가? ‘생명’의 존귀성은 인간의 가치부여마저 초월하는 자리에서 빛나는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지닌 생명은 시작과 끝이 없다고 가르쳤다. 사람의 생명과 고양이의 생명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의 생명을 두고 어찌 우열과 경중을 따질 수 있겠는가.
중국 당나라때 남전(南泉) 선사가 제자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놓고 서로 자기의 것이라고 다투는 모습을 보고 서슴없이 고양이 목을 잘랐다는 이야기는 선가에 널리 알려진 일화다. 그는 단지 고양이 목만 벤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집착’이라는 병도 함께 잘랐던 것이다.
생명을 죽여 생명을 살리는 선사의 활발발하고 적극적인 가르침은 오늘날 흐트러진 생명관을 정돈해 주는 약이다. “어제의 네가 오늘 나로구나”하는 선사들의 외침은 일체 생명이 하나임을 가르치고 있건만, 시작과 끝을 논할 수조차 없는 그 절대적 존귀성이 지금은 너무 쉽게 무너지고 있다. 생명의 존귀성을 알뜰하게 가르쳐도 모자랄 세상에서 생명과 장난감을 동급으로 가르쳐 버리는 어른들이여, 그 업보가 무섭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