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자나깨나 전화 코드가 끼워져 있어야
더우시죠? 그래도 우리 한국에는 사계절이 있어서 좋은 나라라고 합니다. 여러분한테 질문을 한번 해 볼까요? 만약에 이 세계가 빌딩이라면, 우리가 그 빌딩 안에 있는데 빌딩에서 불이 났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옴치고 뛸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죠? 거기에서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왜 말을 못하십니까? 뭐, 이 생각 저 생각 들겠습니까? 가까운 예로, 만약에 어느 빌딩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서 불이 나서 나갈 구멍만 찾는 상황이라면, 남을 건지기는커녕 나부터 건져져야 하는 것이죠? 그럴 때 그 안에서 무슨 생각이 나겠습니까? 아무 생각도 없어요?
▲신도1: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날 것입니다.
▲신도2: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신도3: 몸은 죽고 마음은 날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겠습니다.
▲스님: 나는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그냥 평상시에 할 수 있는 얘기와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있는 행동, 그것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빌딩 안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런 것도 허다하게 보시죠? 그러면 그 안에서는 살겠다는 생각도 생길 여유가 없습니다. 단 하나의 생각만 있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가 하는 거요. 빠져나갈 구멍만 찾지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내가 생각할 땐 그렇습니다. 여유가 없는데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겠습니까? 살아야겠다 하는 건 이차적입니다. 어디로 나가야 빠져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급하죠.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자체가 그렇습니다. 이 중세계가 불타는 지옥과 같느니라. 상세계와 중세계, 하세계가 딴 데 있는 게 아니고 전부 이 자리에 있느니라. 과거가 흘러갔다고 하지만, 예를 들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산은 그대로 있는데 사람은 몇 바퀴를 돌았는가?’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옛산은 그대로 있는데…, 인생은 몇 바퀴를 돌아도 어찌해서 저 산은 그대로 있는가?’ 하는 거요. 우리가 좀더 계산을 잘해 보세요. 자기 양심으로써 들여다보면서 자기를 한번 검토해 보세요. 그런다면 ‘내 팔자’ 소리도 안 나올 거고 ‘내 운명’ 소리도 안 나올 겁니다. 현실에 자기가 어떻게 사는가를 보면, 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거를 알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리고 미래를 보려면 지금 내가 어떻게 하고 가는가를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그럼 또 미래가 어떻게 올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 가닥 줄을 잡고 얼음판 위를 지금 걷고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 얼음판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철모르는 아이들은 얼음이 녹는지 깨지는지 빠지는지, 그것도 모르고 덮어놓고 걷습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여러분이 사시다가 화를 내면 얼음판을 걸어오면서 모닥불을 놓는 거와 같습니다. 얼음이 얼른 녹으라고…, 그래야 빠져 죽기 쉬우니까. 모닥불을 놓는 거와 같고, 그냥 극치에 이르러 마음이 팔팔 뛰면 얼음이 빨리 꺼지라고 막 뛰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제 말이 틀리다면 틀리다고 하세요. 나는 항상, 있는 얘기 하지 없는 얘기 안 합니다. 우리 앞에 도달한 얘기를 하죠. 앞에 도달한 얘기도 미래면서 바로 과거고, 그렇게 초월해서 돌아가는 현재의 얘깁니다. 그러니까 제가 항상 그러죠. ‘화가 나더라도 그 자리에다 놔라.’ 이러죠? 그러면 모닥불을 놓지 않고도 그 길은 걸어갈 수 있죠. 펄펄 뛰지 않아도 그 길은 걸어갈 수 있죠. 가는 데까지 가요. 그러나 모닥불을 놓고 뛰면 얼음은 금이 가고 빠지게 되고, 나로 인해서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 다 빠뜨리게 되죠.
“스님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합니까?” 이렇게 하시는 양반들도 계실는지 모르죠. 하지만 그게 어폐가 있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앞에 50%는 보이지 않게 돌아가고, 50%는 보이는 데서 돌아갑니다. 밤과 낮이 있듯이, 밤에는 자면서 돌아가고 낮에는 깨어서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거를, 밤에 도는 거든 낮에 도는 거든, 안에서 일어나는 거든 바깥에서 들어오는 거든, 모두가 더불어 같이 사는 삶이기 때문에 더불어 같이 있는 그 가운데에 놔라 이겁니다. 그렇게 더불어 같이 사는 그 가운데 놓는다면, 내가 망한 일도 없고 내가 흥하게 한 일도 없지만 그 가운데서 나는 중심을 잡고 그래도 사람답게 걸었노라 할 수 있습니다.
오전에 법사 스님께서 부모의 효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우리가 대승(大乘)이다 소승(小乘)이다 하기 이전에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진화가 돼서 형성되고 이렇게 해서 수억겁을 돌아 왔다구요. 그래서 내 부모 내 자식 아님이 없다고 항상 여러분한테 말했죠? 그러니까 노인들을 봐도 내 아픔같이, 내 괴로움같이, 내 외로움같이 생각한다면 항상 부드러운 말이 나가게 되고 항상 부드러운 행동이 나가게 됩니다. 노인들을 따로 본다면 항상 말도 거칠고 부드럽지 않습니다.
남도 그렇지만 현재 내 앞에 당면해 있는 내 부모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시대적으로 좀 뒤떨어져서 잘못 말씀을 하신다 하더라도 “네, 그렇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렇습니다.” 해 놓고 그대로 해도 되는 거거든요. 속 안 썩여 드리고 아주 질서정연하게, 내 마음 같고 내 괴로움 같고, 내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마음과 같이 나도 그렇게 부모를 귀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한다면 부모가 자식 속을 썩일 리가 없고 자식이 부모 속을 썩일 리가 없어요. ‘효도해라’ 하는 것을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이렇게 천차만별의 말을 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단 한 가지, 내 생명 같고 내 몸 같고, 내 아픔 같고 내 괴로움, 내 외로움 같으면 아주 그거는 효도라는 이름 아니더라도 그대로 정말 세세생생의 효도인 동시에 일체제불의 그 마음과도 같이 한자리를 하게 되는 겁니다.
제가 말이 왔다 갔다 하지만, 아까도 살얼음판 같다고 했습니다. 보세요! 살얼음판을 걷는 건데,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런 뜻을 모른다면, 철모른다면 그냥 막 뛸 겁니다, 얼음이 깨지거나 말거나. 깨지는 걸 모르거든요. 금이 가든 깨지든 빠지든, 아랑곳없이 뜁니다. 그러고 부아가 나면 아무거나 막 집어서 던지고, 또 때로는 술 먹고 부수기도 합니다. 그런다면 아주 집에다 불을 놓는 거와 같습니다. 즉 말하자면은 얼음판이 빨리 녹고 빨리 깨지고 빨리 빠지라구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가족이 다 빠지고, 자기도 빠지게 되니까 그때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살려 달라고만 하는 격이다 이 소립니다.
사람이 이렇게 많아도 다 차원에 따라서 살고 있습니다. 천차만별로 사람의 차원이 그렇게 많습니다. 바로 그 차원에 따라서 모습과 자기 소임이 주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지게꾼 노릇을 한다 하더라도 누구의 탓을 하지 말라 이겁니다. 부모의 탓을 하거나 형제의 탓을 하거나 남의 탓을 하거나 이렇게 해서는 절대 되지 않는다는 얘기죠. 왜냐? 애당초에 소임을 가지고 나올 때에 넝마로 차원이 돼 있으니까 넝마로 나올 수밖에 없죠. 그건 누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또 과거로부터 자기가 금으로 차원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면 금으로 살 거 아닙니까? 그런데 금으로 사는 사람 자만하지 말고, 넝마로 사는 사람 너무 자기를 하대하지 말라 이겁니다, 타박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그 가운데서 무엇이 금과 넝마를 다 바꿀 수 있느냐? 아까 얘기했듯이 그것도 다 놓고 묵묵히 자기한테 주어진 거를 마다하지 않고 그대로 감사하게 받아들이면서 모든 걸 거기다 놓는 데서 그것이 무한정으로 없어집니다. 차원을 가지고 모습을 가지고 소임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온 것이 그냥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체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죠? 오신통이라는 것은 시쳇말로 한다면 바로 자동적인 컴퓨터와 같다고요. 그래서 과거에 스스로 짊어진, 누적돼서 입력된 거는 다 무너지고 우리가 새로이 생각해서 넣는 그 입력이 거기에 주둔하게 됩니다. 그래서 입력되는 대로 자꾸 나오고, 또 거기다가 집어넣으면 앞서 입력이 없어지면서 또 새로이 입력이 들어가고…. 이런 것이 찰나찰나 우리가 살아나가는 생활 아닙니까? 고정된 게 하나도 없죠? 보는 것도 고정된 게 없고,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만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일거수일투족이 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찰나찰나 화(化)해서 돌아가는 살림살입니다.
그러니까 ‘한생각을 뛰어넘으면 그대로 여여함이니라. 한생각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그대로 중생의 모습이니라.’ 했으니 바로 생각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죠. 왜냐하면 지금 세상에 이렇게 돌아가니까 이렇게 되고, 저렇게 돌아가니까 저렇게 되고, 이런 거는 모두 여러분의 사량입니다. 이건 사람으로선 도저히 할 수가 없다느니, 이렇게 돌아가느니 저렇게 돌아가느니 하면서 사단이 많죠. 그러나 아무리 사단이 많아도 하등 상관이 없이 한생각에 뛰어넘을 수 있어요.
앞뒤 없이 묵묵하게 걸어가다가 문득 옆의 사람이 쓰러질 때,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서 끌어올려 주는 그것이 바로 중생들을 거두는 것이요, 또 저 먼 산을 보니까 불이 나고 있어서 ‘아, 안 되겠구나. 비가 오게 해야 되겠구나.’ 하고 생각해서 비가 와서 저절로 꺼지게끔 한다면 이 또한 보살행이죠. 누가 비를 내리게 해서 누가 꺼뜨렸는지, 이런 것도 모르면서 그 사람네들은 좋아할 거다 이겁니다. 그 좋아하는 마음들이 바로 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리의 법칙을 우리들은 절대 몰라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고등동물로서 첨단을 넘어서야 될 사람들이, 앉아서 세상을 다 굴리고 세계를 다 굴리고 우주를 다 굴릴 수 있는데 어째서 그렇게 비천하게 자기 한 발짝 떼어 놓으라는데도 못 떼어 놓습니까?
참, 여러분이 오시는 걸 가만히 보면요, 다 맞습니다. 소승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도 없이 다 맞는데, 좀 높이 생각한다면 이것도 저것도 다 맞지 않는 게 되죠. 만약에 저 윗사람들이 내 목을 잘라서 끌어내려고 하는데 산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저편의 마음을 조절하질 못할 때 그걸 어떻게 해야만 되겠습니까? 내 마음이 그 윗사람들의 마음과 둘이 아니어야 되겠죠. 그런데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날 그냥 지지부진하게 살다가 별안간에 주인공 이름만 알아서 주인공에 맡긴다고 그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진짜 통신이 돼야, 즉 말하자면 줄을 그냥 탁 대는 대로 전력이 흘러서 탁 붙어서, 불이 번쩍 들어오게 돼 있죠. 평소에 전화 코드를 끼워 놓지도 않고 전화를 하려니, 전화 통신이 돼야죠! 항상 자나깨나 전화 코드가 끼워져 있어야, 안에서 일어나는 거든 바깥에서 들어오는 거든 금방이라도 닥쳐오는 그런 것을 해결하려면 전화에다 대고선 통신을 해야 통신이 돼서 그걸 전부 다 알아듣고 소임을 제대로 하죠.
만날 만나기만 하면 이런 말만 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하지만 어떡합니까? 나도요, 여러분과 같이 살얼음판을 걸어가면서도 빠져 죽을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타 죽을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얼음이 깨질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그냥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생명의 근본을 붙들고 생명을 아끼지 마시고, 부지런히 뛰시면서 부지런히 거기다 놓고 가시면, 그대로 바퀴의 굴림이 저절로 정신세계의 굴림과 물질세계의 굴림이 동시에 같이 돌아가게 됩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말은 못합니다. 그러니 거짓이라곤 생각마세요. 사실이니까요. 질문하실 것 없습니까?
▲질문자1: 감사합니다. 저는 수원에서 왔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으신 스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얼음판 위지만, 그냥 그 위에 눈썰매 하나 더 얹은 셈 치고 걱정 없이 당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아직 덜 여문 이런 상태에서 맛도 없고 향기도 없는 몸이 이렇게 문득 나오게 된 것은, 기회 있을 때에 큰스님에게 눈도장을 탁 받아 놓고, 더불어 우주 법계에도 그렇게 눈도장이 찍혀서 큰스님과의 이 인연이 세세생생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아울러 그 동안 저 나름대로 느끼고 있는 점 한 세 가지를 질문 올릴까 하고 나왔습니다.
먼저 합창단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합창단을 한 지 2년 가까이 됐는데요, 그 동안에 저로서 얻은 이득이 너무나 많아서 이것을 저 혼자 담아 뒀다가는 이것도 욕심이 될 것 같아서, 저 나름대로 느낀 점을 이번 기회에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첫번째 얻은 이득은, 수행의 힘을 얻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합창을 일 주일에 한 번, 일곱 시에 시작하는데요, 저 같은 경우에는 다섯 시에 출발을 해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누구나 다 마찬가지겠지마는 이 세속 생활의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중생심과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원력, 그 두 마음의 싸움에서 갈등을 이기고 들어가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한 6개월쯤 지나다 보니까, 이제는 그 갈등이 거의 없어져 버리고 지금은 그냥 당연히 나오게 되고, 또 못 가게 될 이유들이 많았었는데 그 이유들이 맞아 들어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다 잘되고 그냥 그대로 좋은, 그런 일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문득 좋은 생각이 나면 그냥 그대로 실천해 보고 하는 그런 힘이 생긴 것 같아서 그것이 첫번째 이득이고, 두번째 이득은 스님이 누누이 말씀하시는 그 가르침을 실지로 체험을 해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래를 하기 위해서는 그냥 우리가 평소에 말하듯이 가볍게 숨쉬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숨을 한 번 들이마시더라도 아랫배 깊숙이 집어넣어서 한 번 돌려서 거기서 우러나오는 힘으로, 성대를 그냥 이용만 해서 그렇게 내는 도리를 배웠습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렇게 저렇게 순간순간 나투는 생각들을 그냥 머리로만 생각해서 내뱉을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그 자리에, 본래자리에 놓고 돌리는 그 도리, 그것이 바로 노래의 기본 도리와 똑같다는 것을 안 것이 첫째 체험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우리가 노래를 하다 보면 항상 같은 음조가 아니고 높은 음이 나올 때가 있는데, 그것을 ‘아, 다음에는 높은 음이다.’ 미리 생각을 해 가지고 그 생각이 들어감으로 해서 몸이 굳어지고 성대가 굳어지니, 숨이 제대로 나오질 않아서 목소리가 갈라지고 오히려 제대로 안되는 그런 도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비록 높은 음이더라도 낮은 음이나 그냥 일반 음이나 마찬가지로 그냥 편안하게 소리를 내는 것이 ‘경계를 만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그냥 여여하게 돌아가라.’ 하는 그 말씀과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세번째 체험은, 우리들이 합창이다 보니까 서로 간에 소리가 조화가 돼야 됩니다. 그래서 옆의 사람의 소리와 내 소리가 어울려야 내 혼자 소리보다도 더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지, 내가 소리를 크게 할 수 있다고 마음 놓고 질렀다가는 불협화음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조화의 중요성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것은 스님의 법문에 대해 실행을 한 이득이고, 또 다른 이득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합창을 지휘하시는 전문가 선생님이나 또 거기다 반주 선생님까지 양쪽을 이렇게 앉혀 놓고 공부를 하려면 세속 생활에서는 실지로 엄청난 비용이 듭니다. 그런 것을 그냥 저녁까지 얻어먹어 가면서 공짜로 하게 되니 이것이 또 큰 이득이고, 또 지금 보시다시피 스님이 법문을 하실 때에 제일 가까운 데서 항상 이렇게 같이 한자리 할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이득이니, 이 많은 이득을 저 혼자 말 안 하고 이렇게 가지고 있다가는 벌받을 것 같아서 이번 기회에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나름대로 느끼고 겪은 이득이니까 보이지 않는, 말할 수 없는 이득은 스님께서 한마디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아주 일등으로 해 나가십니다.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리듯이 말입니다. 문이 없는 데로 나고 들어야 진짜 공부다 했더니, 문 없는 데를 찾으려고 하니 그 얼마나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입니까? 그랬는데 당신께서는 벽도 없으니까 봇장도 없고 문도 없고, 이렇게 문을 찾지 않는 그 도리를 슬기롭게 평가하셨습니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질문자1: 감사합니다. 합창단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 의향이 있으신 분은 언제든지 들어오셔도 좋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30대 40대 분을 환영합니다.
▲스님: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지금 질문 끝 무렵에서 합창을 할 때에 모두 같은 목소리가 나와야 그 소리가 제대로 나온다고 말씀하셨죠? 그런 것을 한번 얘기를 하겠습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습니다. 이런 것과 같습니다. 어느 스님이 은사에게 이렇게 말했죠. “나는 도무지 어지러워서 공부를 못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많고 시장 바닥 같아서 도저히 공부를 못하겠으니까 산으로 올라가겠습니다.” 하니까 “그럼 알았느니라. 그러면 어서 가거라. 옷 벗어 놓고, 이 오장 육부 속의 생명들도 다 꺼내 놓고, 땅도 딛지 말고, 물도 먹지 말고, 나무도 베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너 혼자 가서 살 수 있으면 너 혼자 가서 살아라.”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그 공부하는 스님이 가만히 생각하니까 오장 육부 속의 생명들도 다 꺼내 놔라, 땅도 딛지 마라, 나무도 베지 마라, 먹지도 마라, 입지도 마라, 죄 했으니 뭘 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그때서야 지금 저 양반이 말하듯 ‘아, 이거는 바로 같이 음파를 타고 돌아야 소리가 제대로 나겠구나.’ 한 겁니다. 그래서 공부를 했답니다. 그 소리나 똑같은 얘기죠?
그래서 이 세상은 우주 만물만생이 다 같이 평등하게 돌아가면서 또 과거, 미래, 현재가 따로 없이 이렇게 돌아간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살다가 죽어서 내일 또 태어나도 ‘나는 지금 시대에 사는 사람이다.’ 이러지 ‘과거에 살던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 안 합니다. 그냥 그렇게 옷만 자꾸자꾸 갈아입으면서 살아나가는 것이 지금 현재의 상황이거든요. 그러니까 “아이구, 뭐 이러다가 아무렇게나 살다 죽으면 고만이지.” 하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아예.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지만 그 가운데 회향을 잘해야 되느니라.” 이러셨거든요. “미운 것도 잠시요, 이쁜 것도 잠시니, 이쁘다 탈하지 말고 밉다 탈 잡지 말라. 잠시잠시 바람이 흘러가듯 하는 것이 인생살이니라.” 이러셨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탈이 많거든요. 밉다고 탈을 잡고, 이쁘다고 좋아하고, 이런 문제들이 뭐 허다하거든요. 그러나 또 내가 막상 생각을 해도요, 이런 말을 할 건 없지만 그래도 간판이 좋아야 회사에서도 빨리 뽑는답디다. 그러니 어떻게 간판 생각이 안 나겠습니까? 그 간판을 좋게 타고 나는 것도 바로 자기가 한 거 때문이죠. 그러니 그것도 누구 원망할 수도 없는 거죠. 또 질문할 것 있습니까?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6년 6월 2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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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현대불교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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