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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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기쁜 마음으로 줄 수 있습니까?-이미령(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옛날 너무나도 가난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 큰 부잣집에서 스님들을 초청해서 음식을 대접한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도 그곳에 가서 먹을 것이나 좀 얻어먹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여인은 남부럽지 않은 부잣집 사람들이 저마다 먹을 것을 들고 와서 스님들에게 공양을 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저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전생에도 이런 공을 쌓아서 이번 생에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저렇게 복을 쌓으니 다음 생에는 정말로 훌륭하고 부유하게 태어날 것이다. 나는 과거에도 복을 닦지 못하여 지금 세상에 이런 신세가 되었는데 지금이라도 복을 짓지 않으면 미래 세상에는 더욱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자기 신세를 생각하니 울음이 복받쳤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여인은 생각해내었습니다.
‘그래, 내가 전에 똥 속에서 동전 두 푼을 주운 것이 있지. 정말 아쉬울 때에 쓰려고 잘 감춰둔 그 돈을 이제 스님들에게 보시해야겠다.’
거지여인은 스님들이 공양마치기를 기다렸다가 그 돈을 보시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스님들 가운데 가장 높은 스님이 친히 그 보시를 받고는 몸소 그 여인을 위해 축원을 해주셨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공양올린 음식까지 그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여인은 기쁘기 한량없었습니다.
‘내가 보시한 과보를 얻는구나.’
그 뒤에 왕의 눈에 우연히 들어서 거지여인은 하루아침에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던 여인은 단 한순간이라도 그때의 보시를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런 복의 과보를 얻은 것은 돈 두 푼을 스님에게 보시하였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나의 은인임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왕에게 청하여 스님들의 은혜를 갚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여인은 커다란 수레에 음식과 귀중한 보배를 가득 싣고 스님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보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일인지 그때의 큰스님은 얼굴도 보이지 않고 아래 스님을 그 여인에게 보내 축원하게 하였습니다.
여인은 곧 불만에 차고 말았습니다.
‘이전에 두 푼을 보시했을 때에는 몸소 나를 위해 축원하더니 오늘은 귀중한 보배를 가득 싣고 와서 보시했는데도 날 위해 축원하지 않는구나.’
이런 여인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그 큰스님이 여인을 만나자고 청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로 나를 의심하고 있군요. 부처님 법에서는 오직 착한 마음을 귀하게 여길 뿐 진귀한 보배를 귀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부인께서 지난번에 두 푼의 돈을 보시했을 적에는 착한 마음만이 가득 하였는데 지금 귀중한 보배를 보시하면서는 나(我)라는 교만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지금 당신을 위해 축원하지 않는 것입니다.”(잡보장경 제4권)
며칠 전 반야경에 관해 짧은 강의를 하면서 보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남에게 필요한 물건을 주면 그것을 ‘보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은 공한 것이다’라는 반야의 세계에서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여야 합니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주는 물건도 깨끗해야 하는 것, 그런 무주상보시가 보시바라밀입니다. 바라밀이란 ‘완성’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니 보시바라밀은 ‘보시의 완성’이란 말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저의 설명을 듣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였습니다.
‘보시를 완성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내가 빈털터리가 될 때까지 가진 것을 다 주라는 말인가?’
‘그럼 나는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무주상보시의 뜻을 알고 싶은 분은 앞에서 소개한 <잡보장경>에서의 여인과 스님의 대화를 깊이 음미해야 합니다. 다른 이의 정갈하고 푸짐하고 거창한 보시를 보고 부러워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진 소중한 것을 내놓으면서 거기에 간절한 소망을 담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 소망이 남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렇게 보시의 선업과 즐거운 과보를 알고 난 뒤의 우리 마음입니다. 착한 업을 지었으면 저절로 즐거운 과보가 따를 것인데 어찌하여 눈앞에서 과보가 나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내미는 것을 받아주기만 해도 고맙고 감격스러워하였던, 처음 품었던 그 마음은 어디로 도망갔을까요? 그 마음을 빨리 찾아와야 하겠습니다. 그 마음으로 보시해야 무주상보시가 될 터이니 말입니다.
200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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