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갇힌 불꽃
명덕(明德)은 아시다시피,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 첫머리에 나오는 표준구입니다. 명명덕어천하(明明德於天下), 즉 인간 교육의 목표, 혹은 위대한 정치의 이상은 “천하에 명덕을 밝히는 것”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명덕이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의 본래 의미는 말 그대로, 사회의 여러 관계 속에서 한 개인에게 요구된 도덕적 원칙이었을 것입니다. 주자는 그러나, 이 개념을 자신의 사유 속에서 전혀 다른 얼굴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주자의 새로운 유교
주자는 자신의 파격적 해석을 설득하기 위해 <대학> 경전을 다시 편집하고, 거기다 자기가 쓴 글을 끼워넣기까지 하는 참람한, 혹은 독창적 모험을 시도했습니다. 조선조에서 그런 짓을 했다면 그는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행한 독창적 해석의 취지는 서문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 누구에게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을 주었다. 그런데 기질(氣質)의 받음(稟)이 고르지 못해, 각자가 ‘이미 갖고 있는(固有)’ 것을 깨닫지 못해서 그것을 온전히 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총명한 지혜의 사람이 있어 자신의 본성을 장악한 선각(先覺)이 되면, 하늘은 그로 하여금 억조창생의 군사(君師)로 세워, 그들을 다스리고 가르쳐, 그리하여 모두가 자신들의 ‘본성을 회복하게’ 했다.”
이 말에서 분명하듯이, 주자학의 과제는 “자신의 숨겨진, 때 묻고 탁해진 본성의 회복”에 있습니다. 이 곳을 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자는 인간의 모든 훈련과 교육의 목표가 자기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고(修己), 다음 다른 사람의 본성을 회복시켜 주는 것(治人)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목표이고, 수많은 제도와 법률 또한 이 구원의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해석입니다. 그는 이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굳이 <대학> 본문의 친민(親民)을 새롭게 한다는 뜻의 신민(新民)으로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강조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모토를, 자신의 깨달음을 토대로, 다른 사람의 정신적 어둠을 걷어내는 이를테면 ‘깨달음의 사회화’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질의 가림과 업장의 두터움
주자학에서 성(性)과 명덕(明德)은 동의어입니다. 그 모두가 우리 마음의 바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마음’의 빛은 인간의 편견과 의도, 선입견 등에 의해 굴절되고 외곡되어 있습니다. 주자학은 이것을 ‘기질의 가림(氣質之蔽)’, 혹은 ‘기질의 구속(氣質之拘’)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다가, 대상을 향한 사적 의지와 탐욕이 가세하여 그 빛을 더욱 짙게 차단합니다.
그러나, 이런 짙은 ‘어둠’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래의 덕(德)이 갖춘 어둠은 끝끝내 질식되지 않습니다.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 然, 其本體之明, 則有未嘗息者.) 그것은 흡사 “재에 파묻힌 불씨, 진흙에 덮인 구슬, 먼지에 뒤덮인 거울”처럼 때묻고 가려지고 더럽혀져 있지만, 자신의 본래 가치를 잃어버리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어둠 속에도 어느 순간, 그 뒤덮인 어둠의 한 틈서리를 뚫고 자신 내부의 빛 속으로 들어갈 때, 그때 내 속에 있던 덕성(德性)의 빛이 ‘분명하게(洞然)’ 드러납니다. 그것은 흡사 불교의 깨달음이나 선가의 돈오(頓悟)같은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경험이 그렇게 신비롭고 비의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사람과 얽히지 않고, 일도 쉬고, 문득 깊이 휴식할 때, 안팎이 다 고요할 때, 우리는 그 빛을 볼 수 있고, 또 우리가 아무런 편견이나 의도가 없이 무심히 사물과 응접할 때 그 덕(德)의 활동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리적 정서적 의지적 장애만 없으면 본래의 빛과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학의 기획은 철저히 내면적이고 그 중심은 자각에 있습니다. 주자는 “마음의 빛을 가리고 있는 어둠을 벗겨 내는 것”이 바로 공부이며, 그 어둠을 벗겨냄으로써 우리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본래 ‘마음의 빛’을 회복했을 뿐인 것입니다. “명덕을 밝힌다는 것은 본성의 밖에서 무엇을 보태거나 찾는다는 것이 아니다.” (所謂明明德者, 而非有所作爲於性分之外也.)
그럼, 이제 문제는 각자의 본성을 어떻게 자각하고 그 빛과 힘을 회복할 것이냐가 되겠습니다. 주자는 다양한 공부와 수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앞에서 적은 대로 그 핵심은 경(敬)입니다. 경에도 여러 공부가 있지만, 그 중심은 구방심(求放心), 즉 ‘집나간 마음을 불러오기’입니다.
경(敬)은 혼침과 산란을 다스리는 공부
방심(放心)이란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일종의 ‘비자각적 상태’, 멍한 정신 나간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자학은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이 행위자의 외면적 선택에 유래하기 이전에 이미 원초적으로 내면적 자기망각에서 준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악의 근원은 바로 방심, 즉 자기 망각에 있는데, 주자학은 이 자기 망각이 유전과 경험의 복합으로 하여 심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구방심(求放心)은 바로 이런 자기 망각의 비자각적 상태를 극복하려는 최초의 노력인데, 그와 같은 의식의 혼란(昏亂), 즉 혼침(昏沈)과 산란을 깨고 생생한 자기의식으로 돌아오려는 노력은, 그러나 아주 쉽습니다. 필요한 것은, “아차! 내가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었지?”라는 자각이 전부지요. 그것은 순간적이고 즉각적으로 성취되는 공부입니다.
이 훈련이 득력(得力), 힘을 얻으면 운전 연습 때처럼 자각의 지속이 길어지고, 또 밝은 상태가 고양됩니다. 이로써 유전과 경험의 복합으로 하여 구조화되어 있던 자기망각과 그와 연관된 두터운 업장의 장애가 엷어지면서, 동시에 인간 내부에 본래 있던 덕성(德性)의 빛이 점점 더 크게 밝아진다고 가르칩니다. 이 양성(養性), 즉 ‘덕성의 배양’은 동시에 복기초(復其初), 즉 “자기 안에 있던 본래성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퇴계는 이 점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율곡에게, 구방심이 공부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그 끝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하나 짚어둘 것이 있습니다. 이 구상은 그러나 주자의 것이지, 그 저작권을 갖고 있는 <맹자>의 발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맹자>는 방심(放心)을 ‘자기 의식의 망각’이라는 사태로 읽지 않고 ‘양심의 망각’으로 읽었습니다. 이 차이는 맹자와 주자의 학문을 가르는 중심축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자의 새로운 포부와 구상이 어디선가 늘 듣던 이야기같지 않습니까. 불교의 자각각타(自覺覺他),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와 언술만 다를 뿐, 취지는 같아보이지 않으십니까. 요컨대 이 ‘자각’의 기획이 주자학을 불교와 근접시키게 했고, 원시 공맹의 유학과는 거리가 있게 한 지점입니다. 그래서 주자학을 ‘새로운 유교’(Neo-Confucianism)라 부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