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록을 읽다보면 ‘끓지도 않고 넘쳐버린’ 이른 바 오버하는 초심자들 이야기가 나온다. 보통 행자(혹 사미승 또는 동자승)로 표현되는 그들은 순수함과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날이 넘어 기상천외한 소리를 흉내만 내는 경우가 더러더러 있다. 초심자의 때묻지 않는 마음이 철딱서니가 없어 기성 스님들을 당황케 하는 것이다.
위산선사 회상에서 있던 일이다.
한 행자가 선객을 따라 법당으로 들어갔다. 대뜸 행자는 부처님에게 침을 뱉었다. 같이 갔던 선객이 기가 막혀 한마디 했다.
“행자는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방자하게 부처님께 침을 뱉느냐?” 그러자 이 행자가 당돌하게 그 선객을 빤히 쳐다보고서 되물었다.
“부처님이 없는 곳을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 곳에다 침을 뱉겠습니다.”
그러자 그 선객은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 부처라고 하였으니 그 말도 맞기는 하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하나.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 자리에서 방(棒)을 휘둘러야 하나. 아니면 뺨이라도 철썩 때려주어야 하나. 아무리 어린 행자라고 해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도저히 혼자서는 해결할 방도가 없어 위산 선사에게로 달려갔다.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답을 물었다. 위산 선사가 말했다.
“거참! 어진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고 나쁜 사람이 도리어 어진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물론 어진 사람은 그 선객이고 나쁜 사람은 그 행자이다. 그런데 문답 한마디에 서로의 위치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행자는 똑똑해졌고 그 선객은 어리석게 된 까닭이다.
속으로 이렇게 제자를 꾸짖었을 것 같다. “그러길래 내가 평소에 공부 좀 열심히 하라고 누누이 당부했잖아. 이놈아! 행자한테 당하고 왔으니 꼴좋다 꼴좋아. 네 놈부터 한 몽둥이 먼저 맞아야겠다.”
그러나 어록 속에서 위산 선사는 그 제자를 때리지는 않고 그냥 차분하게 한 말씀 하셨다.
“그 순간 너는 그 행자 얼굴에다가 바로 침을 뱉어야 했었다. 그리고 행자가 뭐라고 하거든 ‘나에게 행자 없는 곳을 보여준다면 거기에다가 침을 뱉겠노라’고 했어야 했다.”
부처 없는 곳이 없듯이 행자 역시 없는 곳이 없다. 왜냐하면 모두가 부처이니 행자자신도 부처이기 때문이다. 부처에게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얼굴에도 침을 뱉을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구조로 인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늘을 향해 높이 뱉고 난 뒤 자기 얼굴에 떨어지길 기다리면 된다. 아니면 상대방이 침을 뱉어주는걸 맞으면 된다. 그 정도 경지도 못 되면서 어설픈 선문답 흉내나 내는 놈은 침이 아니라 똥오줌을 한 바가지 둘러씌우더라도 할말이 없어야 한다.
위산 선사에게서 명답을 구해왔지만 이미 버스 지나가고 손 흔드는 격이니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법당으로 그 행자를 끌고 가서 시나리오대로 하기 위하여 한 번 더 해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그 때는 활구(活句)가 아니라 사구(死句)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소에 열심히 수행하여 안목을 열어두어야만 이럴 경우 바로 그 자리에서 정로(正路)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행자의 잘못이 아니라 곁에 있는 스님의 잘못이 더 크다. 행자가 법당에서 부처님께 침을 뱉자마자 바로 곁에 있던 스님이 행자얼굴에 즉시 침을 뱉고 난 후 이 문답이 이루어졌다면 뭔가 서로 좀 (공부경지가) 있어 보였을 텐데 둘 다 맹탕인지라 하나마나한 문답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