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다 그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씨도 좋지 않은데 이렇게 즐겁게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여러분을 보면 오히려 여러분이 부처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네들이나 여러분이나 도반으로서 이 공부를 열심히 해나가시며 날씨 궂은 것 마다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한자리를 해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비가 와서 축축할 텐데 밑바닥이 차지는 않은지 몹시 걱정이 됩니다. 이렇게 나는 방석을 깔고 앉고 여러분은 찬 바닥에 앉아 있으니 말입니다. 이럴수록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꼭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생활을 하실 때 모든 것이 항상 내 마음에서 나오는 거니까 내 마음으로 나오는 것인 줄로만 알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다스릴 줄 아는 마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여러분이 과거에 살 때 인연 지은 악업 선업의 그 생명체들이 과거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현재 여러분 몸속에 다 주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연이 되어 한 덩어리로 있죠. 그런데 그 한 덩어리 속에 의식들이 차례차례로 잠재하고 있다가 살아나가는 대로 생각을 내게 해서 애고도 오게 하고 불만도 오게 하고 싸움도 하게 하고 병고도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 여러 가지 복잡한 것을 어떻게 말로 다 하리까마는 여러분이 생활하며 살아나가는데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것, 안에서 천차만별로 일어나는 것은 여러분 마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여러분 마음이 다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주에도 직결이 돼 있고 세상과도 가설이 돼 있는 한마음 주인공입니다. 그 주인공 속에서, 마음이라는 것은 수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경험과 체험을 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나쁘고 좋은 거를 너무나 잘 압니다. 해(害)가 오는 것도 알고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알고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의 의식들이 자꾸자꾸 나오게 되는데, 그 생명의 의식들은 바로 마음을 거쳐서 나옵니다. 나오는 구녘은 한 구녘이기 때문이죠. 여러분의 몸속에 있는 생명의 의식들이 바로 악업 선업을 지은 장본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구녘에서 나오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게 그저 내 마음이 그렇게 하는 줄 아시지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과거에 지은 업보의 장본인이, 생명의 의식들이 마음을 거쳐서 나오는 것뿐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 마음은 잘못됐다는 것도 잘 알고 잘된다는 것도 알고 모든 걸 너무나 잘 아는 한마음 주인공입니다. 사람답게 살려는 그 생각도 마음속에 있고 모두 다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아는 그 마음대로 행하는 게 아니라 업으로 잠재해 있는 생명의 의식에 의해서 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뜻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마음의 선장이 있고 그 선장에 의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생중생들이 있다 이런 소립니다. 그 자생중생들의 의식이 내 마음을 거치면서 나오는 것을 항상 마음의 선장으로 하여금 다스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마음을 거쳐 나올 뿐인 의식들을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건 줄 알고 속아서 항상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 하나 잘 쓰면 잘 쓰는 대로 모두가 뒤바꿔지고 이 세상이 그렇게 참답게 잘 돌아갑니다. 빛보다도 더 빨리 지구도 돌아가고 모두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컵이 놓여진 자체도 이 책상도 쉴 새 없이 눈에 보이지 않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의식 속에서 나오는 거를 진짜인 줄 알고 항상 거기에 끄달리고 분노를 일으키고 그러시는데, 내가 인연 지은 대로 나오는 생명의 의식일 뿐입니다. 즉 말하자면 악업을 지었으면 악업이 나오고 선업을 지었으면 선업이 나오게 돼 있고 유전성이라든가 영계성, 업보성, 세균성, 인과성 전체가 바로 그 자체 생명의 의식 속에 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쉴 사이 없이 안팎에서 나오는 것에 속아서 끄달리신다 이겁니다. 그런 까닭으로, 여러분이 끄달리는 그 마음을, 잘 나오는 거든지 못 나오는 거든지, 좋게 나오는 건 감사하게 놓고 잘 안되는 것은 잘되도록 당신만이 잘 이끌어 갈 수 있다 하고 거기에다가 맡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맡겨 놓는다고 하면서도 의심을 하고 또는 맡길 수가 없다고 그러거든요. 마음의 선장은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좋은 생각과 알 수 있는 마음, 심안으로 볼 수 있는 마음, 마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마음, 가고 옴이 있는 마음, 부모의 몸을 빌려서 영원함과 더불어 형성됐다는 그 앎이 숙명통이라고 한다면, 그 다섯 가지 속에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컴퓨터에 입력이 되듯이 마음 컴퓨터에 입력되었다가 항상 그렇게 나오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몸속에 그 의식들이 컴퓨터에 입력돼서 그렇게 나오고 있는 겁니다.
들으실 때는 어려우시겠지만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어요. 내 마음의 선장은 그 모든 걸 알고 보고 듣고 하지만, 몸속에 있는 중생들은 그렇게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거기서 입력된 대로 나오기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선장에 의해서 모든 것이 한마음 속에서 나온 거니까, 한마음 속에다가 모든 걸 나오는 대로 놓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병이 났으니까 그 안에서 고쳐야 하고 그 안에서 애고가 나왔으니까 그 안에서 애고를 해결해야 하고 모든 것은 다 그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시대가 변천하는 대로 순응하면서, 즉 말하자면 내 마음속으로 하여금 두뇌 즉, 누진을 굴려서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우리는 한생각을 하고 뛸 때에 만 리를 뛸 수 있고 천 리를 뛸 수 있는 그런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이렇게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 내용을 잘 모르지만 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예를 들어서 이 자리에 앉아서도 각자 집에 갔다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계시면서도 집을 갔다 온다면 한꺼번에 보실 수 있죠? 내 육신이 움죽거리지 않고도 집에 갔다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눈이 떠지지 못하고 마음의 귀가 열리지 못해서, 지금 사시는 집에 갔다 오시는 것처럼 그렇게 갔다 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세히 보고 올 수가 없는 거죠. 갔다 온다, 안 온다 이런 것도 없습니다. 지금 집에 갔다 오는 데는 내가 갔다고 말할 수도 없고 왔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냥 한 찰나에 눈 한번 깜짝하니까 그냥 갔다 오게 되고 알게 되더라 이런 거나 똑같이 심안이 뜨이면 일체를 우주와 더불어 같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안 하니까 그렇지 이 공부 하시는 모든 분들에 한해서도 그렇고 일체제불도 그렇고 일체 보살들도 그렇고 역대의 조상님들도 그렇습니다. 여러분한테 내가 “너희 집에 갔다 왔다.” 이러지 않아도 여러분 가정에 가면 뜰이 어떻게 생겼고 신발이 어떻게 놓여 있는 것까지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닙니다. 여러분 뱃속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공부입니다. 여러분의 뱃속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가 하면 여러분의 마음속까지 들여다 볼 수 있으며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으며 미래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한테 얘기해드리는 것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이고 과거에 어떻게 했었다는 것을 논하는 게 아닙니다.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없는 겁니다. 단 하나 있다면 여러분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인연이 돼서 지금 몸속의 자생중생들로 붐비고 있는 것입니다.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한다는 뜻이 뭔 줄 아십니까?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한 거니까 그 자리에 되놓는다면 입력된 자체가 없어집니다. 컴퓨터에 입력을 해놓으면 입력한 대로 나오지 그 외에 다른 게 나오지 않는 것처럼, 살아나오며 입력된 모든 것이 자동 컴퓨터에 의해서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생활 속에 자꾸자꾸 나옵니다. 좋은 일도 나오고 언짢은 일도 나오고 애고도 생기고 병고도 생기고 뭐 일이 한두 건이 아니죠. 그런데 그렇게 생기는 이치가 무엇이냐? 과거에 죄를 많이 지어서 내가 이렇다고 하는데 그건 바로 여러분 몸속에 있는 겁니다. 입력이 돼서 그런 거니까 과거도 찾지 말고 미래도 찾지 말고 현실에도 모든 게 공했으니까 그 입력한 데다가 다시금 맡겨 놓는다면 과거에 입력된 자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팔자 운명, 영계성, 인과성, 유전성, 업보성, 세균성 모두가 무너지는 것이죠. 그러면 지금 공부하며 사는 현재가 그냥 입력이 돼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려있습니다. 어떡하면 사는 동안 애고나 병고에 끄달리지 않고 자유스럽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 종교가 왜 생긴 줄 아십니까?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러 가지 종교가 생겼다고 봅니다. 그러나 불교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생명이 불(佛)이고 말로 전달하고 통신으로 전달하고 뜻으로 전달하고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이 되고 무의세계 유의세계, 죽은 세상 산 세상이 전부 연결이 되고 곤충에 이르기까지 연결이 되는 그 자체가 바로 교(敎)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든지 가톨릭을 믿든지 알라신교를 믿든지 간에 불교 안에 있는 거지 어느 한 곳에 따로 국한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왕지사 칼을 뽑았으면 그 칼로 내 동료들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모든 일체 만물의 은혜를 갚고, 정법을 배워서 일체 제불의 은혜를 갚으며,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의 은혜도 다 갚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최상승 공부를 하는 겁니다. 현대 과학이 아무리 발전이 됐다 하더라도 과학자들이 은하가 될 수가 없고 태양이 될 수가 없고 위성이 될 수가 없고 저 나무가 될 수가 없고 곤충이 될 수가 없고 모든 일체 만물만생이 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일체 만물만생이 다 내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소원에 따라서, 원자에서 입자가 나가고 분자로 화해서 모두에게 응해주시는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 만 개도 되고 이 세상을 꽉 차도록 곤충에 이르기까지 응해주시는 뜻입니다. 만약에 소가 무명을 벗겨달라고 애원을 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발원한다면 부처님은 곧 소 속에 들어가서 그 소의 무명을 벗겨줄 겁니다. 부처님 마음이 그 소 속에 들어가면 한 찰나에 소의 무명이 벗겨지고 돼지 속에 들어가면 돼지의 무명이 벗겨집니다. 사람의 차원에 따라서 원하는 대로 그렇게 찰나찰나 나투시는 그 만 가지 법은 헤아릴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말로 하려면 바로 평등공법의 문 없는 문으로 오고 감이 없이 응해주시는 천차만별의 이름을 가진 여래라고 합니다. 또 부처님이라고도 하구요.
그러니 여러분이 공부하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소리를 하니까 이 생각이 나네요. 이 마음은 바다도 없기 때문에 배도 소용이 없고, 마음은 저 높은 산이 있다 할지라도 높은 산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미국을 간다고 한다면 산과 물을 넘는다고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미국도 한 찰나요 요 문지방 너머도 한 찰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승과 저승을 한 찰나에 넘나들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이 세상 자체가 바로 죽은 세상 산 세상이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 생활을 하시면서 잘 아시겠죠. 나쁜 일을 하면 교도소에 가고 경찰서에 가고 이런다구요. 그런데 남이 모르게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남이 모른다고 해서 지옥이 아닌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은 것을 여러분 마음속에서 알기 때문에 그게 바로 마음의 지옥고입니다. 마음의 지옥 때문에 현상세계에 나오는 것이니 입력된 것을 안 받을 도리가 있나요. 한치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은 거는 여러분이 꼭 받게 마련이고 여러분이 좋은 일을 하신 거는 여러분이 좋은 결과를 꼭 받게 마련이니까 누구를 뭘 하나 줬다고 해서 내가 줬다고 하지 마세요. 내가 살렸다고 하고, 내가 많은 걸 갖다 주었다고 하시지만 그게 아닙니다. 남을 갖다 준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은행에 왜 돈을 갖다 넣습니까? 그 은행 사람들 잘 먹고 잘 살라고 갖다 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되찾아 쓸 양으로 은행에 맡기시죠? 그거와 똑같습니다. 늘 이렇게 일러드려도 여러분은 희미하게 그저 들을 때만 안다고 하지 마시고 좀 심사숙고해서 다시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이 말 한마디에, 이 행동 하나에, 이 마음먹고 행동 한 번 하는 데에 세세생생이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세세생생이 달려있는가 하면 자손 대까지 내려가면서 영향이 있는 겁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천 년 만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한다지마는 정말 눈뜨고 귀 뜨인 사람한테 한 번만 띄기만 하면 천지를 진동하고도 남음이 있는 도리입니다. 그래서 조그만 거라고 우습게 생각하고 크다고 크게 생각을 하지 마시고, 조그마한 데에서도 말 한마디에서도 천 냥 빚을 갚는다 하는 속담의 말처럼 진중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런 말의 뜻이 아마 거기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경험을 해보니까 그래요.
이걸 어떻게 속속들이 여러분한테 말로 다 하리까. 내가 스스로서 깨우친 건 내가 아는 것이지 여러분이 아시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이 공부를 하시면서 느끼고 체험하면서 반야줄을 잡고 놓치지 마시고, 항상 생활하는 데서 행선으로서 하십시오. 참나를 믿고 진짜로 그 속에서 의식적으로 나오는 그 자체가 헛생각으로 나오는 거니까 그것을 번뇌망상이라고 하지 마시고, 헛생각으로 나오는 것을 마음에서 나오는 줄 알고 속지 마시고, 속지 않기 위해서 선장의 주장자에 모든 것을 다 맡겨 놓으십시오.
맡겨 놓으면 다시 입력이 되면서 나오기 때문에 모두가 재생이 되고 구정물이 나올 것도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번 주장자에 굴러 나오는 그 마음은 바로 법이 되지만, 여러분이 그냥 의식적으로 나오는 생각대로만 하신다면 그거는 중생의 마음이기 때문에 걸리게 되므로 잘되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분이 파산될 지경에 처했다고 하면서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하길래 막 야단을 쳤습니다. 왜 당신네들이 그렇게 해놓고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며, 그것도 처음에 그렇게 됐을 때 말을 하지 못하고 망하기 직전에 와서 얘기하느냐구요. 좀 생각들이 있어야죠. 야단은 쳤지만 내 마음도 안됐죠. 하지만 그대로 보냈어요. 며칠 있다가 오더니 그게 어떻게 뒤집어져서 잘됐다고 좋다고 하고 왔는데 말입니다, 나는 그래도 안타까운 게 뭐냐 하면 한순간 괴로운 거는 면했는데 다음에 또 그런 게 닥쳐오면 어떡합니까, 네? 자기가 해야 알 일을 남한테 자꾸자꾸 얘기할 수가 있습니까?
자기가 뿌린 것 자기가 거두고 자기가 뿌려서는 안 될 일이라면 냉정히 끊고 해야 할 일이면 단호히 해야죠. 이렇게 할 수 있는 마음의 자유를 얻어야만이, 이 세상에 조금도 어김이 없이 자유스럽고 즐겁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이겁니다. 이 공부는 이 세상을 다 주고도 살 수 없는 공부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무렇게나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과학자들만 얘기할 게 아니라 종교인들도 가만히 보십시오. 모두 바깥으로 끄달리고 다닙니다. 지금 자기 나무뿌리가 썩어서 죽어 가는데 다른 나무 큰 나무, 남이 볼 때 좋은 나무를 보고서 그냥 살려달라고 하니, 그 나무가 이쪽으로 와서 내 싹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이 모두가 어리석은 줄 알고 냉정하게 인생을 돌아다볼 줄 알고 자기가 어디서 와서 지금 무엇을 하고 걷고 있는지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왜 두 발을 만들어 놨습니까? 기울지 않으라고 두발이 있지 않습니까? 한 발이 없어 보십시오. 절룩발이죠. 왜 두 손을 만들어 놨습니까? 한 손이 없으면 병신일 뿐만 아니라 한 손으로 물건을 들을 수가 없어요. 한 손으로 집을 거나 집죠. 이러니 한 다리 병신, 한 팔 병신, 한 귀 병신, 한 눈 까막눈이라면 여러분이 살기가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한쪽 눈이 없고 한쪽 귀가 없고 한쪽 손이 없고 한쪽 발이 없기에 그것을 몽땅 다 겸해서 가지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입고 다니는 옷은 기워 입든 꿰매어 입든 얼룩얼룩 하든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옷 빛깔은 그렇다 하더라도 정갈스럽게 정돈해서 다녀야 해요. 신발도 그렇고 양말도 그렇고 머리도 그렇고, 정돈이 되지 않는다면 바보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렇게 보인다면 벌써 상대방에게 무시를 당하는 겁니다. 이건 어디에나 다 그렇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왕지사 이 세상에 나왔으면 좀 더 시대에 순응하면서 옳은 법을 배우면서 내 몸도 아주 정갈스럽게 정돈해서 다닐 줄 아는 그런 행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럼 이쯤하고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자1: 먼저 한마음도리를 공부하게 돼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오늘 질문을 드리게 되어서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들은 각자 태어나면서 모습과 의식들도 제각각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 머리가 둔한 사람, 제각각 소질과 재능이 다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날까지 진화되어 오면서 가지고 온 습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바른 생각인지 한말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그거야 말씀하시나마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차원에 따라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곤충에서부터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그 차원은 자기가 마음의 개발을 하는 대로, 발전을 하는 대로 차원이 정해지는 것이니까 누구나가 모르면 차원이 낮고 알면 차원이 높고 이런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 간에도 천차만별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공부를 하시라고 하는 거죠.
▲질문자1: 예, 잘 알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볼 때 학식도 많고 직책도 높고 돈도 많아 남한테 베풀고 살다가 죽는 사람과, 비록 배움도 없고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하지만 이 마음공부를 하다가 가는 사람하고 그 차이는 어떤지요.
▲스님: 물질의 많은 재산이 있어서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여 그것이 50%라서 50%의 공덕을 받는다 할지라도, 이 마음공부를 하면서 마음으로서의 공덕을 베풀었다면 그것은 헤아릴 수가 없는 공덕입니다. 없고 있고는 떠나서 마음의 보시란 세세생생을 건지는 거고 무명을 벗겨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시를 하되 물질적인 보시만 했다면 아무리 보시를 했어도 공덕은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좋은 일을 했다고는 하지만 공덕은 될 수 없습니다.
▲질문자2: 스님의 가르침대로 일체 만물을 스승으로 삼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더욱더 오래 참구를 했어야 하는데 급하게 나왔지 않나 싶습니다. 세 가지 질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까 스님 말씀 중에 답이 한 가지 나왔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그 문제는 집에도 갔다 올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왜 내가 가보지 않은 집에는 못 가겠느냐 하는 그런 의문을 늘 가지고 있었는데 아까 심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노라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공부를 하는 중에, 유마 거사가 나오는 내용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공부한 사람이 먹는 고기 한 점은 즉시로 천도가 된다는 그런 구절이 있는데 혼자 참구를 좀 했지만 그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스님의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스님: 여러분이 고기를 잡술 때에 내 살이 되지요? 내 살이 되니까 벌써 사람으로 인도환생하지 않았습니까? 간편하게 생각을 하시라고 그러는 겁니다. 고기 한 점이 소 한 마리와 같습니다. 그것을 먹을 줄 아는 사람한테는 소가 무명을 벗고, 먹을 줄 모르는 사람 앞에는 살생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고기를 먹을 줄 아는 사람에게는 그 살은 내 살이 되고 그 마음은 내 마음이 되고 그 생명도 내 생명이 되니 살생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바로 입에다 넣고 씹어서 넘기는 찰나에 벌써 소 무명은 벗겨지죠. 사람으로 화해서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한 찰나에 무명을 벗고 화현을 하니까요.
▲질문자2: 저는 좁은 소견에, 의식이 딴 데로 떠났는데 그렇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고기 한점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해왔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주관에 대해서 스님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신지, 즉 우주가 어떻게 생겼으며 또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요. 과학적인 많은 이야기가 있지마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직 설명이 되지 않은 부분이 있고 그래서 가르침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스님: 그거는 마음에 따라 클 수도 있고 마음에 따라서 작을 수도 있고, 우리 몸뚱이 하나가 우주일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만약에 몸뚱이 안에 오장육부를 생각한다면, 요만한 벼룩 한 마리가 그 속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그런다면 얼마나 그 덩어리가 크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벼룩이라면 그 우주가 얼마나 광대하게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물질의 크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주 속에 들은 별성들을 형성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모든 거를 생산해 내고 들이고 또 생산해 내고 들이고 이러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를 생산을 할 때 셋 넷을 생산하고 거두어 들일 때 또 싹 거두어 들이고 해서 우주가 생산이 되고 작용을 하고 살죠. 한치도 빈틈없이 쉬지 않구요. 우리가 지금 쉬지 않고 숨을 쉬듯이. 그러니까 크고 작은 것을 생각할 수가 없죠. 왜냐하면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분들 중에는 마음이 큰 분도 있고 작은 분도 있고 옹졸한 분도 있고 이해심 많은 분들이 있는 것과 같아요. 그거를 보신다면 우주의 생산처도 컸다가 줄었다가 생산해 내고 또 커지고 끌어들이고 이럽니다. 그러니까 컸다 작았다 컸다 작았다 작용을 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우주가 이만하다고 내가 얘기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게 한순간에 또 적어지고 또 여러 개가 되고 이러는데 어떻게 그걸 말로 크다 작다 하겠습니까. 우주도 한두 개가 아닌데요.
▲질문자3: 저는 초등학교 3학년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부딪치는 일들이 많이 있어서 제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때 마음으로 잘 타일러주고 싶은데 너무 부족해서 아이들한테 잘해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혼낼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건지 어떻게 지내는 것이 좀 더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건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스님: 강단에 설 때는 반드시 ‘주인공! 아이들을 잘 이끌어줘야 하잖어!’ 하고서 모든 것 거기다 맡기고 하세요. 그렇게 믿어야 해요. 당신 껍데기가 당신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하여튼 여러분! 공부하시는 분들이 처음 오신 분들을 잘 인도해주십시오. 관하는 법도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요. 병고로 관해야 할 일이 있고 애고로 관해야 할 일이 있고, 차원이 다 다르거든요. 그러니까 똑바로 잘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러한 문제들도 있어요. 번연히 정성스럽게 내 마음의 주인공을 진짜로 믿고 죽든지 살든지 거기에 믿고 그렇게 해라 하면 꼭 딴 짓을 하는 겁니다. 딴 짓을 해가지고는 나았다가 더 죽게 만들어 놓고 그렇게 관하는데도 안 낫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노릇을 어떡합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똑바로 좀 일러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81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