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주자학의 반쪽이 불교라니
저는 지금 북경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호텔 안이나 주변에는 내 웹하드에 접속할 인터넷이 보이지 않고, 잘 아는 청화대학 교수의 방에 갔지만, 이번에는 한글 파일을 열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깔려있지 않았습니다. 어렵사리 한국학생에게 노트북을 빌려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연재가 앞뒤가 없어지고, 불쑥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제 3차 다산학대회에서는 이틀간 다산학을 둘러싼 많은 논점들이 부닥치고, 해석들이 난무했습니다. 거기서 오고간 내용에는, 놀라지 마십시오. 불교 얘기가 한 축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산이 조선의 주자학을 넘어 실학의 새 시대를 연 선구자라는 것은 다들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시겠지만, 다산이 주자학을 비판한 논리가 바로, “주자학은 불교다”라는 것입니다. 조선조가 주자학의 이념에 젖어 불교를 그렇게 괴롭히고 탄압했는데, “그 주자학이 불교와 같다”니, 이런 생뚱맞은 얘기를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오늘은 이 문제를 둘러싼 곡절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주자의 불교 교판
주자는 아시다시피 중국의 12세기 송대를 살았습니다. 북방의 이민족인 요나라와 금나라에 치여 남쪽으로 쫓겨와 살았던 지식인으로서 나라를 다시 찾아야겠다는 열정에 불타는 열혈청년이었습니다. 또 한편 그는 당시에 크게 유행하던 선불교의 영향을 받아, 깨달음을 통해 일대사를 이루려는 개인적 열정도 함께 갖고 있었습니다.
김지하 시인의 말에 빗대자면, 그는 요기와 코미사르의 두 열정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처음 당시에 유행하던 대혜(大慧)의 선을 접하고, 화두를 통해 명상을 하면서 인생의 진실과 세상의 이치를 한꺼번에 깨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가 불교 경전에 어느만큼 정통했는지는 모릅니다. 그가 <주자어류(朱子語類> ‘석씨편(釋氏篇)’에서 인용하고 있는 불교 경전들은 범위가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42장경> 등의 초기경전과 <반야경>, <수능엄경> 정도… 그가 주로 읽고 씨름한 것은 선(禪)의 문헌들입니다. 그의 교판(?)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불교를 세 단계로 정돈합니다. 첫 단계는 <42장경> 등의 일상적 교훈을 담은 이야기로 주자는 이때가 불교가 가장 건전했을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부터는 좀 부정적입니다. 그는 공(空)을 중심으로 한 대승의 가르침이 중국에 들어와 번성하던 이때를 불교의 일차적 타락(?)이라고 평가합니다. 심지어 그는 대승은 노장의 사고를 교묘히 다른 방식으로 차용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최근 토마스 머튼 등도 중국불교가 노장의 어머니와 인도불교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훌륭한 아들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선과 화두의 번성입니다. 주자는 불교가 이 단계에 와서 합리적 수행과 도덕적 교화이기를 그만두고, 황당한 얘기를 심각한 표정으로 선포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신랄한 비판을 해 나갑니다.
주자학이 배운 불교
각설, 주자는 그러나 이 표면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핵심에 깊고 본질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요점은 주로 ‘사회적’ 측면에 관한 것이지 이른바 ‘진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신성한 절에서 고리대금도 하고, 술도 만들어 파는 등의 병폐를 지적합니다. 나아가 한 청년이 가족을 버리고 머리를 깎는 것을 윤리적으로 비난하고, 또 그가 사회로부터 절연하여 자기만의 공간 속으로 유폐되는 것을 사회정치적 관심에서 우려합니다.
그러나 주자는 불교의 진리적 측면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제 이 말에 다들 당황하실 것입니다. 상식은 “불교를 부순 자리 위에 주자학이 서 있다”고 믿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자는 불교를 부순 적이 없습니다. 만일 부순다면, 그의 철학 또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다산은 이 지점을 선명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도 “주자학은 불교다”라고 내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천천히 다시 이 문제를 따져봅시다. 주자와 불교가 만나는 지점, 다시 말해서 주자가 불교의 근본을 체화한 자리가 어디일까요. 그때 주자가 든 예가 바로 차가운 옹달샘의 비유입니다.
옹달샘은 다만 맑고 투명해서 거기 “아무것도 없습니다.” 즉 샘은 다만 공(空)입니다. 주자는 세상이 그리고 우리의 본성이 공이라는 불교의 근본 언설에 전폭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의지와 욕망으로 하여 뒤틀려 있으나, 그 근본은 본래 맑고 향기로운 본성을 누구나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일은 우리 속의 이 공의 실재를 찾아가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 주자학과 불교는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용어는 좀 바뀌었습니다. 공(空)이 무극(無極)으로 바뀌었고, 불성(佛性)이 본성(本性)으로 바뀐 것이 그렇고, 업장(業障)이 기질(氣質)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연기(緣起)는 조리(條理)로 바뀌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수련법도 불교의 핵심을 차용했습니다.
발견으로서의 구원
제가 언젠가 팔정도 가운데 정념(正念)을 해설하는 자리에서, 이 사티가 위빠사나의 바탕이며, 또 주자학에 수출도 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정념은 주자학에서는 경(敬)으로 탄생했습니다. 좀 심한 억지가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자는 경을 해설하면서 아예 서암 화상의 주인공 화두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경(敬)이란 상성성(常惺惺), 즉 늘 깨어있는 마음의 각성상태라고 분명히 짚어두었던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경(敬)은 유교 안에서 예전에는 어른이나 하늘에 대한 헌신을 뜻했습니다만, 주자는 이것을 과격하게 자기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투명하게 바라보는 심리적 각성상태로 치환했고, 나아가 이 훈련이 주자학 수련의 핵심 가운데 핵심이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 따라 퇴계가 평생을 이 일에 매달린 것을 다들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주자는 그 경의 지속적 파지(把持)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본성(性)을 만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아, 또 덧붙여야겠군요. 성(性)이란 일반적으로는 특정한 심리적 경향성을 말합니다. 그것은 어떤 실체의 특성(用)이지 그 자체 어떤 실체(體)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주자는 이 성을 경향성으로부터 실체로 전환시켰습니다. 그 뒷면에 또 불교가 있습니다.
이렇게 주자학이 불성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발견’으로서의 구원을 자신의 체계의 중심에 세운 점에서, 그는 ‘반쪽’이 아니라, 근본을 불교로부터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선의 선비들이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다산뿐만이 아니라 그 전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가령, 율곡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금강산을 내려오면서, 주자가 그랬듯이 다른 반쪽을 더 강조하면서, 불교더러 유교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