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직에 유불書 꿰뚫고 禪旨갖춰 선지식 행세
황벽 선사와 법거량한 후 제자돼 선종사 빛내
황벽 선사의 시호를 추행( 行)에서 단제(斷際)로 바꾸게 할 만큼(지난 호에서 자세하게 이야기 했다)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배휴 거사는 관리로서의 정치행정 능력뿐 아니라 스승과 교단을 외호하는데도 최선을 다했다. 게다가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정법의 안목까지 갖추어 ‘진짜 거사’가 갖춰야 할 것을 모두 갖춘 전형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그런 팔방미인이었기에 〈전등록〉 한 켠을 당당하게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전등록〉에는 많은 거사들이 등재되어 있다. 하지만 개인적 깨달음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선종사적인 의미까지 갖춘 인물은 흔하지 않다. 그 속에서 선종사적으로 가장 의미있는 한사람을 나에게 고르라고 한다면 두말 않고 배휴 거사를 추천하겠다.
그런 배휴 거사도 황벽 스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실 안하무인의 아만통이었다. 높은 벼슬자리 그리고 유불서(儒佛書)를 꿰뚫고 있는데다가 선지(禪旨)까지 갖춘 그야말로 ‘나름대로’ 선지식 행세를 해왔던 까닭이다.
그가 젊은 시절 신안지방 태수로 있을 때 그 고장의 대안정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조사당으로 안내되어 ‘국보급’ 영정들의 미술사적 의미를 자랑스럽게 한참동안 침을 튀기며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선기(禪氣)가 발동해 대뜸 물었다. “영정은 볼만한데 그 큰스님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큰스님들의 마지막 간 곳을 묻는 질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우리의 본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묻는 말이다. 그러자 말문이 딱 막혀버린 그 스님은 얼굴이 벌개진 채 안절부절 하였다. ‘선사급 고위 거사’는 예나 지금이나 스님네를 긴장시킨다.
마침 그 때 황벽 선사는 복건성 황벽산에 모여있던 대중들을 모두 버리고는 대안정사로 들어와 노역하는 무리들과 함께 섞여서 숨어 살고 있었다. 한 산중의 방장을 스스로 그만두고 신분마저 숨긴 채 평대중으로 그것도 가장 힘든 하소임을 자청하여 살고 있을 무렵이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주위의 말에 배휴는 스치는 예감이 있어 한번 뵙기를 청하였고 곧 선사와 대면하게 되었다. 그 소문이 나자마자 삽시간에 산중대중이 우루루 몰려왔다.
갑자기 조사당이 법거량하는 곳이 돼 버렸다. 이제 영정을 보관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제대로 선사를 모신 법당이 된 것이다.
“이 영정들은 정말 볼만한데 그 때의 고승들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순간 지켜보던 스님들과 따라 온 수행원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과 침묵이 흘렀다. 그 순간 선사는 큰소리로 태수의 이름을 불렀다. “배상공!”
할은 선사들이 기선을 제압할 때 흔히 쓰는 수법이기도 하다. 아만이 탱천한 태수를 잡는 방법은 고함이 제일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거사는 귀가 멍멍해졌고 얼떨결에 “예!” 하고 공손하게 대답을 했다.
(이럴 때는 더 큰 목소리로) “그렇다면 상공은 어디에 계시오?”
고승 간 곳은 그만두고 네 갈 곳이나 걱정하라는 말이다. 남의 본래면목은 그만 두고 당신의 제대로 된 모습이나 찾아보라는 말이다. 상근기의 예리한 태수였기에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리고 제자가 되었다.
진흙의 양이 많으면 만들어지는 불상 역시 크기 마련이다. 의심이 많을수록 깨달음도 깊어진다고 했다. 큰 아만은 큰 귀의로 이어졌고 큰 사람은 큰 일을 하기 마련이다. 그는 한눈에 황벽 선사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아보고서 스승으로 모셨다.
강서성 종릉 제2 황벽산에 총림을 마련하고 수행대중이 운집토록 하여 단월로서 외호에도 힘썼다. 그리고 직접 스승의 법문을 정리하고 교감하여 〈전심법요〉 〈완릉록>을 출판하였다. 그런데 어록간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능적인 일이 아니다. 황벽선사어록을 펴낼만한 안목갖춤이 전제돼야 한다. 뒷날 이러한 모든 인연이 무르익어 걸출한 제자 임제 선사를 배출하게 된 토양이 된 것이다. ■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