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든지 다 놔서 다 버려야
문
법문에서 에너지가 느껴지는데…
마음공부를 한 지는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다 보니까 스님께서 펼쳐 놓으신 법문을 신문이나 인터넷상에서 보거나 듣게 되면 왠지 모를 에너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게 저의 개인적인 느낌인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답
여러분이 어떻게 들었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즉 말하자면 내가 그런 소리 잘하죠. 전깃줄과 전깃줄이 한데 합쳐짐으로서 불이 들어온다구요. 둘 아닌 도리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렇게 되면 지금 물은 예도 없고 대답한 예도 없는 겁니다. 말로 한 게 아니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게 바로 큰 에너지도 될 수 있는 것이죠. 그 생각이 에너지를 불리고 또 쓰고 또 불리고 하는 것에 속한다는 얘기죠.
그래서 우리가 원력이 얼마나 크면, 즉 말하자면 엄마들이 임신을 해서 애를 낳는 거와 같이 이 은하계에서도 그렇게 한번 터지면 수없이 나오는데 그 뒤로 또 그게 모여서 새로 나온 것은 크고 나중엔 늙어서, 사람이 늙으면 옷을 벗듯이 원소가 나오면 그 원소끼리 또 모인다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모두 이루어지는 것인데 우리가 그 도리를 알고 진짜로 믿는다면, 자기 주인공이라는 샛별을 진짜로 믿는다면 연방 통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멀어도 먼 사이가 없고 가까워도 가까운 사이가 없고 가고 옴이 없습니다. 얼마나 가까우면 가고 옴이 없다고 했습니까? 그렇게 돼서 그 에너지는, 금방 우리가 말을 했다면 그 말은 보이지 않게 했는데 보이게끔 나타났다 건져졌다 이익하게 됐다 하는 이런 문제죠.
이런 문제가 조그만 거든 큰 거든 상관이 없는 거죠. 우주 안에 전체가 다 그런 거니깐요.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세상에 이름 모르는 것도 있겠지만 이름 모르더라도 좋아요. 이름을 알고 한다면 벌써 이미 늦어지니까요. 6·25 때 보니깐 사람이 먹고 체했는데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을 때, 그러면 의사도 필요하고 말도 필요하고 그런 건데 그 사람들이 다 없을 땐 어떡하느냐? 그래서 말없이 그 체기가 낫게끔 하는 것이 원력인 것입니다.
문
종교를 믿는 참된 신앙인의 자세
종교간의 갈등이 심합니다. 불교다 기독교다를 떠나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가족 구성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등, 종교가 사람을 참되게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종교에 의해서 아픔과 상처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종교의 참다운 역할과 종교를 믿는 참된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서 가르침 주십시오.
답
우주의 근본이 한 사람 마음에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전체의 공에서 내 마음 자체가 그대로 고정된 게 없기 때문에 이렇다는 것을 알고, 그것도 그거고 그것도 그거다 하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불교라는 것도 이름이고 기독교라는 것도 이름뿐인 것이다’라는 거 말입니다. 그것은 이름뿐이지, 진짜 인간이 공심으로서 공생하고 공식하고 있고 공체로 공용을 하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어느 종교를 믿든지 그건 상관이 없으나 만약에 그 도리를 몰라서 지혜를 펼치지 못한다면 건건이 걸리게 되죠. 마음이 ‘나는 기독교를 믿는다’ 하는 데서 멈춰지기 때문에 그렇고, 자기가 믿는 종교가 절대적이라는 게 있습니다. 불교인들은 불교로서의 절대적이라는 게 있고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건건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기독교인이면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불교인이라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진리가 둘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마음들이 천차만별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또는 체험해서 둘이 아니라는 걸 자기가 스스로서 감지하고 들어가야 되는데 둘이라고 볼 때는 반드시 일은 일어나죠. 상대가 있고 내가 있을 때 싸움이 일어나는 거지 상대와 나와 둘이 아닐 때는 싸움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주쳐야 소리가 나죠.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스님이 아주 도가 높으신데, 마적 두목이 칼을 들고서 “당신 속에 뭐가 그렇게 묘한 게 들었는지, 보물이 들었다는데 당신의 가슴 속에 내가 칼을 넣는다면 안 들어갈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그걸 째 보겠다고 했는데, 가서 째 보려고 하니까 그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추운 겨울 날씨에 고목이 꽃을 피울 수 있겠느냐?” 했습니다. “스스로 봄이 오면 꽃이 필 것을…. 고목을 잘라 봤던들 그 속에서 꽃이 나오겠느냐?” 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 마적 두목도 그 스님한테 마음을 숙이면서 겸손하게 몸도 숙였답니다.
마음이 숙여지면 몸도 저절로 숙여지죠. 그 마음이 근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얼어붙으면 겨울과 같습니다. 아주 잔뜩 얼어붙은 얼음과 같아서 마음이 녹질 못하죠. 그러나 우리가 마음이 봄이라면 산천초목은 조화를 이루고, 향기롭게 푸르고 말입니다. 물은 유수와 같이 흐르고,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그렇게 흐를 뿐입니다. 그와 같이 마음도 봄이라면 그렇게 푸르고 조화를 이루면서 도도하게 강물은 흐를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맥이나 동맥이나, 우리 마음이 편안해야 오르락내리락할 때 몸에도 이롭고, 벌써 어떠한 감정이 나서 그것을 편치 못하게 생각을 하고 내가 그것을 잊지 못하고 꼬부리고 있을 때는 그것이 차차차차 조금씩 쌓이다 보면 병이 되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음이 항상 봄이라야 됩니다. 봄이라야 생동력 있게, 즉 말하자면 저 산천초목이 푸르듯, 소나무가 겨울 여름이 없이 항상 사철 푸르듯이 마음이 항상 청새와 같이 푸르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지혜로우니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듯이 그렇게 당당하게 삶을 보람되게 느끼면서 살게 되는 겁니다.
마음공부라는 것은 한 쪽을 버리는 게 아닙니다. 나쁜 것은 버려야만이 불법이라고 하는 거, 또 좋은 것만 해야만 불법이라는 거,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이런 것이 종교가 아닙니다. 진리를 파악하고 우리가 그 진리에 의해서 순응하면서 항상 자유스럽게 내가 찰나찰나 나투면서 생동력 있게 그것을 용(用)을 하면서, 계발하면서 좀 더 삶의 보람을, 우주의 섭리를 한꺼번에 쥐고서 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여러분이 다 각기 가지고서 나가는 것이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저께도 말하고 그저께도 말하고 만날 앉으면 되풀이하는 말입니다만, 되풀이를 삼 년을 하고 나도 영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다가 삼 년이 되던 해에야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되풀이 안 하겠습니까? 되풀이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거는, 어차피 우리는 되풀이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쳇바퀴 돌듯이 그렇게 되풀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면서 우린 역력히 가고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체 만물이 다 물질적인 자체가 허망한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이 그렇게 계발되면서도 아주 화합적이고 화합하면서 자비스럽게 나갈 수 있는 생동력,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을 다 공용으로서, 공심의 능력으로서 앞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는 문제가, 어저께가 오늘이고 어저께 한 것을 오늘 갖다가 함으로써, 둘이 아님으로써 내일의 개발이 오늘의 개발입니다. 오늘의 내가 한 생각 내지 않았다면…, 나쁘게 냈든지 좋게 냈든지 내일에 있는 것입니다.
내일이라는 것은 꼭 하룻밤 자야만 내일이 아니라 지금 일을 저질러 놨든지 또는 일을 잘해 놨든지 수습을 해 놨든지, 바로 오늘 해 놨기 때문에, 지금 해 놨기 때문에 이따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해 놓은 것이 이따가 다가오는 거, 어저께 해 놓은 것이, 아까 해 놓은 것이 지금 다가오는 것, 이것이 모두가 삼심이 바로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평상시에 살고 있는 생활이니만큼 그 생활을 떠나서는 불법도 없고 기독교도 알라신도 모두 종교라는 것은 이름이지, 생활을 떠나서 진리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나 떠나서 부처는 없는 것입니다, 각자.
그러니 모두가 능력이 없어서 그런 점도 많지만, 그전에도 그런 얘길 했죠. 서대문 위에 능금나무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쪽을 지나서 얼마 안 가면 산모퉁이에 그전에 일본 사람이 짓고 살던 집이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집에 사람이 들어가면 방에서 죽는 게 아니라 꼭 바깥에 나와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흉가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도리를 아는 사람은 그 집에서 잘 지냈는데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팩팩 그렇게 죽었다는 얘깁니다. 나중에 그 도리를 그래도 웬만큼이라도 알아서 한데 뭉칠 줄 알고, 한데 뭉쳤다가 다시 펼 줄 알고, 폈다가 다시 웅그릴 줄 아는 사람이 들여놨다 내놨다, 내논 것도 없고 들여놓은 것도 없이 들이고 내는 것이 유유히 자유스럽게 하는 사람이 그 집을 사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그 집을 사 가지고 들어가서 살게 된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애들을 유학도 보내고 그 집을 팔아 가지고 딴 데서 살지만요. 그 사람네가 그 집을 흉가에서 살 수 있는 집으로 면해 놨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우리의 마음 한생각에 달려 있는 건데 우리가 능력이 없으니까 부딪치고 당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런 것을 어떻게, 부처님이 이 자리에 계시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고 여러분의 깨달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못났든 잘났든 여러분에 의해서 나고 드는 것이 공에서 나왔다 공으로 든다는 걸 아셔야 된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바깥에서 찾는 게 아니라 안으로 찾으며 모든 것을 안으로 굴리면서 내고 들이는 것이 내 안으로부터 나가기 때문에 또 오관을 통해서 내고 들이는 것이, 바로 오관은 문이란 말입니다,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전부. 그래서 잘 정돈하고 생각해서 처리하는 것이 책정한다고 그러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한생각에 일체 신이 들어 있으니까 이 종교를 믿는다 해도 아니요 저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아닙니다. 단지 내가 생각하기에 달린 거다 이 소립니다.
내가 그 도리를 안다면, 내가 예수님이 될 수 있고 마리아가 될 수 있고, 내가 부처님이 될 수 있고 법신이 될 수 있고 보신 화신이 다 될 수 있는데 구태여 그것을 나누어서 말할 건 없죠. 허나 그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좋겠는데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면 서로가 저쪽에서 조금 세면 이쪽이 집니다. 우환이 생기죠. 저쪽에서 세면 이쪽이 우환이 생겨요.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으로서 만약에 부처님의 참 뜻을 잘 파악할 줄 안다면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주인이 되든, 기독교 믿는 사람이 세를 들었든 그것을 다 커버해 나갈 수 있어요. 그걸 다 나로 돌려서, 하나로 돌려서 갈 수 있는데, 아무리 불교를 믿는다고 미워해도 이쪽으로 와서 화살이 맞을 수 없어요. 그건 자기의 생각들이지. 오히려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이쪽에서도 자비심이 없고 법으로 나간다면 화살은 여기 왔다 다시 그쪽으로 되갑니다.
그러니까 ‘자비의 보살행이라’ 이러는 것은 내가 그 도리를 완전히 안다면 그 화살이 나한테로 온 것이 그리로 다시 가서 맞게 하지도 않고, 항상 굴리면서 완화시키고 부드럽게 만드는, 큰 강물에 똥물이 들어가든 흙물이 들어가든 빗물이 들어가든 항상 한 강물이 되듯이, 그렇게 마음의 지혜를 넓히고 상대를 이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도량이 크다면 아무하고 같이 살아도 상관이 없는데, 도량이 넓지 못하다면 무슨 일들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을 봅니다. 가만히 보면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금 있는 데 무쇠가 갈리 없고 또 무쇠 있는 데 금이 갈 리 없고, 세상 진리가 그러하지 않은가 이렇게 봅니다. 사람의 마음이 바로 생각하는 대로 지혜가 넓고 적고 이런 데서 오는 차원에 따라서 여러분이 그렇게 살림살이를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문
바람을 거스르는 향이 있다는데…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바람을 거슬러 가진 못하는데 거슬러가는 향도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지요?
답
질문 잘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섯 가지 마음의 계향(戒香)을 마친다면 자재천(自在天)에 들어 아주 자재로이 계율을 더했다 덜했다 할 것도 없을 것이고 지옥에 떨어진다 안 떨어진다도 없을 것이니라. 성불을 한다 못한다도 없을 것이니라. 여자 남자도 없을 것이니라. 길고 짧음도 없을 것이고 어제 오늘 내일도 없을 것인데, 그 까닭은 수행을 다 끝마쳐야 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내가 나왔으면 일체를 내 탓으로 돌리고 일체 만법을 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다면 증오도 미움도 없을 것이고, 세상 법에 누(累)가 되게 하지도 않을 것이며, 계율을 지킨다 안 지킨다도 없이 계율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둘째,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니까, 모든 게 나로 인해서 생기고 들고 나고 하는 걸 알게 돼 있는 것이죠. 그래서 잘못되는 것도 거기서 나온 것이니 잘되게 나오는 것도 그 자리라고 믿고, 잘되는 거는 감사하게 놓는, 패기 있게 물러서지 않는 그 마음이 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 마음이 듦으로써 지혜로운 마음이 생긴다 이겁니다. 그래서 내면세계와 물질세계를 둘로 보지 않는 관찰 체험, 그렇게 해 가는 것이 셋째입니다.
또 넷째는, 그렇게 둘이 아니게 관찰을 하고 체험을 하고 가니까 그냥 자동적으로 자생중생의 수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얽히고설킨 그 무명이, 묶여 있던 것이 스스로 풀어진다 이겁니다. 묶였던 게 스스로 풀어지고, 풀어지니까 여여하게 다스리고 나갈 수 있다. 그러니까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도 나에게 닿기만 하면 그 무명이 무너진다 이거예요.
다섯째,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삼라만상, 그 만물만생을 마음으로 항상 느끼죠? 느끼고 보살핌이 항상 밝아요. 여여하고 항상 밝고 걸림이 없어요. 그래서 구족(具足)함을 해탈지견향! 거기까지 마쳐야만이 여자 남자도 없고, 더하고 덜함도 없고, 즉 말하자면 성불을 한다 못한다도 없고, 지옥에 떨어진다 안 떨어진다도 없고, 계율을 잘 지킨다 못 지킨다도 없이 자재천(自在天)에 들어서 자유롭게 나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가고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하는데, 거슬러 가는 향이 있느냐고 물었죠? 그랬는데 그것은 다섯 가지 계향을 마치고 난 뒤에도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믿음이요, 둘째는 전체 놓는 겁니다. 우리들이 지금 놓고 가듯이 말입니다. 어떤 거든지 다 놔서 다 버리는 거다 이겁니다. 다 놓는 거예요. 다 놔서 다 얻는 것을 둘째라고 한다, 다 놓게 되면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문제가 나와요.
셋째는 다 놔서 다 얻었다면 모든 일체 중생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천차만별로 달라고 하더라도 조건 없이 줄 수 있는 그런 것이 완결돼야 바로 바람을 거슬러 가는 향도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다면 그냥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기만 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바람을 거슬러 가는 향도 그 다섯 가지의 계율(戒律)을, 마음의 계향을 다 마치고, 또 세 가지 조건까지도 마치고 난 뒤에야 거슬러 가는 향이 있으니 그때 가서는 거슬러 간다 거슬러 가지 않는다도 없는 것이죠. 사방팔방에 모든 향음이 어느 법계에나 어느 중생에게나 닿지 않는 데가 없기에 종소리가, 종을 치면 종소리가 났는데 그 종소리를 일체 만물이, 만물만생이 다 듣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 모두가 우리 마음의 문제라고 하는 겁니다. 마음을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데 문제요. 발전시키려면 이롭게 발전을 시켜야 됩니다. 그럼으로써 그렇게까지 마친 사람에 한해서는 사방이 툭 터졌을 것이요, 지붕도 없을 것이요, 땅도 따로 없을 것이요. 그러니 평등공법(平等空法)이면서 활궁공법(活宮空法)이면서 또는 수레공법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을 때는 평등한 공법(空法)이요, 맷돌 얘기 가끔 하죠? 맷돌 추는 움죽거리진 않아요. 곡식을 갈아 낼 때에 맷돌 추가 움죽거리는 게 아니라 힘만 가하죠.
그런데 마음으로 다스려서 거기 놓는다는 게 어느 물건이든지 다 맷돌에다 넣어서 갈아 내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그 추는 바로 움죽거리지 않는 불성을 말하고, 움죽거리고 돌아가서 갈아 내는 것은 법을 말하고, 또 할 수 있는 마음 자체의 다스림은 바로 갈아 내는 이걸 말하죠. 그래서 그걸 종합해서 주인공이라고 이름했으니 진짜 여러분의 실상이면서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자신을 무시하지 마시고 ‘나는 몰라서 그렇고, 업보가 많아서 그렇다.’는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세요. 자꾸 의식적으로 돌아가니깐 말입니다.
문
함이 없이 하라는 뜻은?
함이 없이 하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정확한 뜻을 알고 싶습니다.
답
여러분이 가정에서 살아가면서 한 식구라도 원망을 하고, 식구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모두 남의 탓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내 탓은 하나도 없어요. 어떤 경우에서건 상대방의 탓으로만 돌아갈 때가 많죠. 근데 따지고 보면 각자 자기가 있기 때문에 그 모두가 있다는 거를 알아야 남의 탓을 안 하게 됩니다. 잘했든 못했든 말입니다. 그렇게 안다면, 우리가 다시 이 세상에 나올 때 더불어 둥글려서 나오고 또 그걸 따라다니면서 구경하고 이러지 않고도, 몸을 가지고 그렇게 애 쓰지 않아도 살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찰나찰나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거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함이 있이 하며, 우리가 삶이 있이 사는 겁니까? 삶이 없이 사는 겁니다. 함이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모두가 공했다고 했죠.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고통을 받고 살고 이렇다는 게 하나도 없어질 겁니다. 왜냐하면 뻔히 알기 때문에 함이 없어요.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맡겨 놓고 사시라고 말하는 것도 여러분이 이거 해야겠다 저거 해야겠다, 이거를 원망하고 저걸 원망하고 이거를 생각하고 저거 생각하느라고 사는 재미가 없이 살아요. 그게 사람이 어디 사는 겁니까. 그러니까 생각은 안 하더라도 저 건너 산이 보이면 내 정원으로 생각하고 거길 갈 수 있고 그래야 되겠죠.
이런 소리 하면 좀 이상스럽게 생각이 되겠지만, 어떤 선지식이 병원에 가서 다리를 수술하려니깐 몹시 아프더랍니다. 그래서 거기다 다릴 떼어 놓고 자기는 산으로 올라갔답니다. 올라갔더니 얼마 있다가 깨어나시라고 자꾸 건드리더랍니다. 그래서 시간이 됐나 보다 그러고 얼른 와서 자기 몸에 다시 들어가서 보니깐 다 됐더랍니다. 그래서 아픈 걸 면했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냥 말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거 경험을 해 보지 않고는 이런 소리 못합니다. 그것뿐이 아니라, 어찌 말로 새록새록 다 하리까. 사람 사는 데 이런 게 있다고, 이런 삶이 있다고 단정 지어서 몇 마디도 할 수가 없죠.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죠. 귀정지어 놓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닿다가도 생기는 일이기 때문에 닿다가 생기면 가다가 뗏목이 걸쳐 있으면 그냥 한다 안 한다도 없이 그거 치우고 갈 겁니다.
문
49재와 100재에 대해서…
사찰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분을 위해서 49재와 100재를 지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49재와 100재를 왜 해야 하는지 그 진의를 알고 싶습니다.
답
사십구재의 의미는 다들 알고 계실겁니다. 그런데 사십구재라고 뜻하는 것은 우리가 전체를 갖다가 놓고 볼 때 동서남북이 한데 합쳐서 사방천, 이렇게 할 때는 법으로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서 법정에 들어가면 질문을 하죠? 문제의 답변을 받고 전부 쓰고 그렇게 해서 모두 그걸 가지고 법을 청하죠. 그거와 같이 49재는 경찰서에 들어가서 문의 받고 나서 그 뒤에 무죄로 나오든지 유죄가 돼서 들어가든지 하는 것와 같습니다. 그런데 100재다 한다면, 공부한 사람들이 알고 본다면 죄다 죄가 아니다 이런 것도 없습니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렇게 되죠. 그래서 49재 지내고서 100재 날은, 그 분뿐만이 아니라 모든 조상들을 한데 모아서 재를 지내라고 그러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아주 생각을 복잡하게 하지 마시고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이익하게 생각을 하셔야 돼요. 살아오던 대로 이게 그르고 저게 옳고 하면서 일일이 따져서 복잡하게 살지 마시고 아주 간편하게 생각하시면서 뛰어넘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