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범(乘梵) 스님은 선암사의 상선원인 칠전선원(七殿禪院)의 선원장이자 선암사 주지인 지허 스님의 맏 상좌다. 지허 스님이 선암사의 대선지식이었던 선곡 스님의 지도와 소개를 받아 해인사 용탑선원, 통도사 극락선원, 동화사 금당선원, 주안 용화사 선원 등에서 안거를 한 것 빼고는 조계산을 떠나지 않았듯이 상좌인 승범 스님도 동진출가 이래 선암사를 벗어나보지 않았다.
선암사에서 이력을 마치고 금산사에서 개설한 화엄학림에 가서 공부한 기간을 빼고는 선암사 바깥 땅을 밟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것을 생각하고 말해도 조계산과 선암사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을 한다.
선암사를 한 번이라도 가 보았던 사람이라면 스님이나 신도를 막론하고, 또 불교인이나 비불교인을 가리지 않고 선암사 안내 또는 불교 강의를 들었던 스님 중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사람으로 승범 스님을 첫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사람들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스님이다.
어느 날 승범 스님의 처소가 있던 심검당에 스물 대여섯 살로 보이는 아가씨들이 들어가더니 깔깔대고 웃어대는데 도저히 웃음을 그칠 수 없다는 기세였다. 무엇 때문인지 궁금해 하는 나에게 아가씨중 하나가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내 입에서도 웃음이 배시시 배어 나왔다.
승범 스님이 뒤뜰에다 꽃씨를 심어 놓고 꽃말 표지판을 세워 놓았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꽃이름: 봉숭아, 꽃말: 여루어서 못살것소…”
이렇게 써 놓았으니 아가씨들이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보통 사람이라면 봉숭아의 꽃말인 ‘부끄러움’을 예사로 적었을 것이나 평생을 전라도 그것도 선암사에서만 살아온 사람이라 사투리로 써 놓았던 것이다.
“‘여루어서’가 뭐예요?” 물으니 “아, 그것도 몰르요. 부끄럽다는 말 아니요, 고것이.”
“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맛이 있소잉. 잭재금 지 나름의 얼굴로 소리를 해대는디…” 그러면 아가씨들이 “잭재금이 뭐랑가요?” 묻고, 승범은 “아, 제 각각이라고 꼭 한자를 써야 알아묵것소?” 하면서 하나 둘 전라도 사투리를 가르쳐 주었다.
선암사가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叢林)인데다가 옛 모습을 손상치 않고 간직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찰이다 보니 수련대회나 성지순례 및 연수 차원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모두다 선암사 역사 및 전각에 대해 안내를 받고자 한다.
안내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보니 지쳐서 빼기도 할 법한데 승범 스님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전국의 관람료 사찰에서 선암사 승범 스님 만큼만 열정적이고 자세하면서도 재미있게 설명을 해 준다면 국민의 절반 이상이 불교를 믿게 되었을 것이라는 미확인의 신념이 있을 정도다.
선암사를 찾은 대중들을 대웅전에 앉혀 놓고 선암사 창건 유래와 역사를 이야기 해주고 대웅전 뜰방 위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안내를 하면 누구나 귀를 쫑긋 세운다. 물론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가 사람들의 귓전을 사로잡는다.
“부처님이 주장하신 가장 중요한 것이 뭐다요? 나는 누구인가? 나를 알아라. 그런 말이 바로 이녁의 꼬라지를 알아부러라~ 그 말 아니요?”
우리나라는 종교의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여러 종교가 포교나 선교활동을 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종교간의 갈등이 사회문제화될 소지가 있어서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간 대화의 모임을 이끌어 가고 있다. 케이씨알피나 크리스천아카데미 그리고 유알아이(URI) 등의 모임이 그것이다.
작년에는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평화고리라는 작은 모임을 연차적으로 진행하면서 젊은 종교인들이 여러 곳을 순례하는데 선암사를 마지막 코스로 잡아서 참배할 기회가 있었다. 서로 종교가 다르기는 해도 불교 예법 등을 알아보기 위해서 108배를 하고 난 뒤에 선암사 안내 및 불교이야기를 승범스님에게 듣기로 하였다.
그런데 여러 날을 보내고 여러 종교의 성지를 거쳐 오면서 사람들이 다 지쳐서 108배만 대충 하고나서 잠이나 빨리 잤으면 좋겠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승범 스님 앞에 앉았는데 스님 자신도 “한 이십분이나 하면 좋겠지요?”하고 의사를 물으면서 시작했는데 그 이야기가 어찌나 재미있고 유익하던지 청중들이 지금까지의 모든 피로가 한꺼번에 다 가셨다는 듯이 밝은 모습으로 웃으면서 “ 더 해 주세요~”를 연발해 저녁 11시가 넘어서야 모임이 끝났다.
행사가 끝나고 난 뒤 쓰는 설문 조사에 가장 재미있었던 곳과 가장 유익한 곳으로 선암사를 쓰고, 가장 기억나는 사람으로 승범 스님을 적었음은 물론이다. ■관악산 자운암 상임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