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나, 다들 눈에 두터운 콩깍지가 씌었으니
속담에 “제 눈에 안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별로 매력도 없는 사람을 멀쩡한(?) 사람이 죽자고 쫓아다니지요. 이런 사람을 두고,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말하는데, 이 표현은 불교적 진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 나름의 안목을 통해’ 특정한 대상에게서 ‘아름다움’을 확인합니다. 그것은 객관적이고 투명한 시선이라기보다,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이미지에 홀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에도 같은 통찰이 있지요.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
무주위체(無住爲體)
주관적 안목이 그 사람의 토대(住)입니다. <금강경>은 이 토대를 경계하라고 되풀이 되풀이 타이르고 있습니다.
혜능도 <금강경 구결>의 서문 첫머리에서 “무주위체(無住爲體)”라고 했습니다. 번역하자면, 즉 “네 토대를 허무는 것이 불도의 관건”이란 선언입니다.
자아의 토대(住)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는 앞에서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세 필드에 열여덟 요소가 있습니다. 감각과 인식의 ‘기관’, ‘대상’, ‘내용’이 그것인데, 불교는 이들을 각각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 그리고 이들을 뭉뚱그려 18계(界)라 부릅니다. 사물이나 사건의 자극에 의해 감각 기관은 이를 수용하고 또 거기 감정적 의지적으로 반응합니다. 이것이 반복되고 패턴화 되면서 견해(見解)라 부르는 편견(?)이 형성됩니다. 성격 혹은 인격은 이 과정을 통한 강화의 결과인데, 이 자아는 다시 외계에 대한 자극을 선택하고, 거기 반응하는 양상을 결정합니다. 각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는 상(相)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이 상이 만든 마음속의 흔적과 찌꺼기를 업(業)이라고 합니다.
상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성계와 무학의 사례를 들면서,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고 했습니다. 돼지 눈, 부처님 눈이 상의 주관적 ‘동인’이라면, 그 눈에 보이는 돼지와 부처님은 그 상관물로서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임제(臨濟)는 이 둘을 인(人)과 경(境)의 연관 도식으로 진실을 밝히고자 한 적이 있고, <대승기신론> 또한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상호 의존과 동시 성립을 말하고 있다는 것만 우선 귀띔해 둡니다.
물고기 집, 지옥의 고름, 천상의 감로수
우리가 보는 세계는 자아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관심과 시선이 다르다면 세계는 전혀 다르게 보이겠지요. <법화경>은 이런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 물이 있다. 이 물은 모든 사람에게, 나아가 모든 지각 있는 생명체에게 꼭 같이 보일 것인가. 아니다. 물고기에게는 ‘집’으로 보일 것이고, 지옥에서는 ‘고름’으로 보일 것이며, 천상에서는 ‘감로수’로 보일 것이다.” 물은 목마른 사람에게는 마실 것으로 보이겠지만, 화학자에게는 ‘H2O’로 보일 것이고, 경제학자에게는 공짜라는 뜻에서 ‘비경제재’의 이름을 붙일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환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환상의 콩깍지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 사이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빠져 있는 공통의 늪입니다. 우리는 늘 돈이 되는지만 살피고, 제가 좋아하는 것만 쫓아다니며, 저 유리한 대로 세상을 해석하며, 그밖에 관심이 없는 것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 속의 ‘우상’에 따라 사물을 바라봅니다. 이 문제를 본격 다루고 있는 사람이 철학자 베이컨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있는 우상을 네 가지로 들었습니다.
베이컨의 네 가지 우상
가장 알기 쉬운 것이 1) 동굴의 우상(the idol of cave)입니다. 인간은 자기 가 만든 주관적 환상의 세계 속에 갇혀 산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기호나 관점이 보편적이고 건강하며 합리적이고 전체적이라는 무의식적 착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동굴에 빛이 들어오지 않는 중증인 경우가 많지요. 기이한 것은 다른 사람 속에서 이 특징을 발견하기는 쉬운데 자신에게서 그것을 깨닫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늘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음은 2) 종족의 우상(the idol of tribe)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차원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 공통된 생물학적 특성으로 하여 갖게 된 우상을 가리킵니다. 지금 말한 대로, 세계가 인간이 보는 대로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도 여기서 생겼습니다. 이 점은 알기 어렵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환경이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턱없는 인류의 오만도 그런 예에 속합니다.
세 번째는 3) 시장의 우상(the idol of market)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쓰는 언어가 대상과 일치할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언어는 우리가 ‘사실’에서 읽은 ‘이미지’에 붙인 ‘이름표’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실재를 드러내기보다 감추며, 비추기보다 왜곡시킵니다. 불교는 이 측면을 극단적으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언어에 대한 불신과 위험을 선명히 드러냅니다. 어떤 불교학자는 불교의 이 같은 인식을 언어혐오증(lingua-phobia)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이 세상을 혼란시키고 비참을 증폭시키는 원흉인데, 그 첨병이 바로 언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아는 집단적 개인적 우상들 타파하는 노력
마지막으로 4) 극장의 우상(the idol of theater)이 있습니다. 이것은 타자의 권위를 승인하는 맹목성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극장 무대에 왕이나 제사장이 홀을 들고 오가는 장면에서 연상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재래의 문화적 습관이나 전통에 의해 대상에 대한 일정한 태도와 가치관념을 주입받습니다. 이 훈육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이루어집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와 교사의 가치관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곧 제재가 따르고 충실히 지키면 적절한 보상을 받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는 한 사회의 이념을 자신 속에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그의 ‘세계’의 집단적 토대가 됩니다. 그 집단 속의 개인은 이 기반에서 너무 멀리 떨어질 수 없습니다. 개성에는 분명한 한계가 주어집니다. 이 우상은 집단과 종족의 오랜 지혜의 소산이지만, 그것을 진리라고 고집해서는 안 되지요. 그랬다간 다른 문화와 문명과의 충돌과 갈등을 피할 수 없습니다. 베이컨은 개인이나 그가 속한 집단의 가치관, 문화, 이념, 종교를 배타적으로 고집하는 것을 극장의 우상이라고 불렀습니다.
불교는 이 모든 종류의 ‘우상’을 깨뜨리고 걷어내도록 권합니다. 이들이 똬리 틀고 있는 한, 우리는 차가운 <사실>과 만날 수 없고,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영원의 고요와 평안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관적 환상과 우상에 고착되어 있다면, 타자를 용인할 수 없고, 그것은 치유할 수 없는 갈등과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