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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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공심으로서 함이 없이 살아야
부처는 없기에 이 삼라만상 대천세계에 꽉 찼다



선법가를 배우고 음성공양 하는 뜻은?
선원에서 한마음 합창제를 몇 번째 해 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선법가를 배우고 음성공양을 하는 뜻은 어디 있는지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우리가 보통은 음성공양으로 찬불가를 하는데요, 이건 선법가(禪法歌)입니다. 선법가를 부르면 일체 음파가 법망에 통해서, 이것이 노래라고 하지만 자꾸 부르면 아주 지극하게 염원하는 그런 ‘관(觀)’이 되죠.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기에 달린 거지만 생각을 크게 넓혀라 이거죠. 넓히면 넓히는 대로 나한테 이득이 오고 상대방에게 이득이 간다는 얘기죠. 그러니깐 그렇게 하기 위해서도 선법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단합이 될 수 있으니 이 선법가가 얼마나 좋습니까. 딴 데서도 선법가를 잘 지어서 그걸 법문으로 듣게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 선법가를 부르실 때 보면 너무나 기쁘고, 그 운기가 김으로 올라와서 그냥 불이 하늘을 두루 붙이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넓히는 게 지혜를 넓히는 거와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버리지 말고 한다는 거, 또 ‘모두 공심으로서 함이 없이 살아라.’ 하는 뜻이 바로 놓고 가는 겁니다. 함이 없이 하라. 내가 한단 말 없이, 내가 산단 말 없이, 내가 죽는다 산다는 생각 없이 그냥 놓고 간다면 그것이 바로 벗어나는 길이다 이런 얘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살 때에 허무한 생각도 좀 들고 무상한 생각도 들고 좀 고난이 심하면 살기 싫은 때도 있고 그냥 조용한 데로 가서 좀 있고 싶은 생각도 있을 테고, 여러 가지 가지죠, 뭐.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그걸 응용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는 것도 너 아냐!’ 하고선 딱 책정을 해 놓으면 그게 그대로 화해집니다. 화해지고 넓어지고 그대로 웃어지고 그대로 편안해지고 그런 거죠.
그래서 우리가 될 수 있으면 선법가도 애들한테도 잘 가르쳐야 하고, 지금 애탄지탄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거를 채 뭔지 모르다가 병이 들어서 어쩔 수가 없이 하다 보니 인제 조금 알았다고 그러는 분이 있고, 여러 분이 많죠. 그런데 각 지원에 가만히 보면요, 각 지원의 여러분이 선법가를 통해서 공부들을 얼마나 잘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지원의 여러분이 질문하고 스님들과 토론하고 그러는 걸 보면 공부 잘하고 가시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해 가지고 평상시에 그렇게만 하실 수 있다면 이건 왔다죠, 뭐!
그래서 어느 스님이 국이 짜다 이런 얘기 했죠. 그런데 스님들이 사는 데서는 짜면 그냥 물 타서 먹구요, 싱거우면 간장 타서 먹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이유가 없죠. 그래서 살아나가는 것도 다 그렇게 해라. 전자에 그런 얘기 많이 했죠. ‘내 탓으로 돌려라. 모두가 내 탓으로 돌려야지 남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일체제불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다. 어디에 가서 이 부처 저 부처 찾는 게 아니라 모든 일체제불의 마음들이 전부 내 한마음에 있으니 내 한마음 속에서 다 용도대로 써라.’ 이런 겁니다. 일체 만물이 내 한마음 속에 들어 있으니까 꺼내 쓰는 대로 용도대로 꺼내 써라. 이렇게 간편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해 나가시는 모든 분들이 이 도리를 진정코 알아서 공부해 나가신다면 그 유전성이 폐지가 되기 때문에 악화된 아픔 병세, 이런 것도 없어질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한다고 해서 아주 잘살게 되는 게 아니라 고통을 받지 않고 살고, 또 진짜로만 믿고 그렇게 나가시는 분들은 자연적 웃고 살게 되고 생활도 지치지 않게 하고 가게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자꾸 업보와 인과성 유전성, 모두가 다 무너지니까, 구름이 다 걷히니까 햇볕이 짱짱 비쳐서 내 젖은 모습을 다 말려 준다, 이런 뜻과 같죠.


어디로 돌아가고 있나요?

우주가 돌아가고 있는데 저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디로 간다고 하는 그 사람 자체가, 그 성품은, 그 말은 어디로부터 좇아 나왔습니까? ‘지금 어디로 갑니까?’ 했잖아요. ‘어디로 갑니까’ 하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은 어디로부터 좇아 나왔습니까? 만약에 마음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그 마음은 또 어디로부터 나왔습니까? 무조건 자기 주인공을 믿고, 벌써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이 나오고 있고 자기 성품으로부터, 자기 마음이라고 합시다. 자기 마음으로부터 모든 일체 만법이 움죽거리고 있으니 거기에 무조건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거길 믿고 또 감사하게, 우리가 좋으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 거기 맡겨 놓는 겁니다. ‘참 감사하구나.’ 이렇게 하고, 또 안되는 거면 ‘어휴, 안되는 것도 당신이 끌고 가는 거, 당신이 길잡이가 돼서 잘 끌고 가야 당신의 심부름을 하지 않느냐. 내 손은 당신의 손이요, 내 몸은 당신의 몸이니 당신이 이끌고 가.’ 즉 운전수가 차 끌고 다니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부터 알아야 그 도리를 알게 돼요. 그냥 내가 이해를 하고 이론으로서 맞아 들어가게 할 양으로 해서는 안 돼요. 둥그런 통에 네모진 뚜껑 덮는 거나 똑같은 일이에요.
그러니까 무조건 자기 주인공을 믿어요. 지금 질문하는 그 자체, 그것이 벌써 고정되지 않죠? 하루 종일 얘기하고 왔는데 지금 여기선 그 말을, 질문을 했어요. 그랬는데 벌써 그렇게 돌아갔거든요. 그러니까 고정됨이 없다구요. 고정됨이 없이 자기가 그렇게 수없이 말을 하게 하고 수없이 움죽거리게 하는 그 장본인 자체가 공했다니까요, 모두가. 그러니까 이름이 공했다고 하고 행이 그렇게 공해서 돌아가니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성으로서의 자동성이죠. 자동 불성. 그러니까 그것부터 ‘아! 내 자동성 그 자체 주인공이 바로 나를 억겁 전으로부터 끌고 왔구나.’ 이런 것도 떠나서 ‘아! 자동 불성이 있기 때문에 엄마 아빠의 정자와 난자를 통해서 나의 그 씨가, 뿌리가 삼합이 한데 합쳐져서 바로 이 세상에 나왔구나. 그렇다면 나온 거를 이끌고 가는 것도 역시 참나가 나를 끌고 다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모든 거를 다 믿어야지.’ 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예가 있었거든요. 어느 청년이 아주 어릴 때 부모를 일찍 여의고서 얻어먹으면서 돌아다니게 되었거든요. 그랬는데 그 아이가 어느 결에 가다가 고만 배가 고프니까 빵을 하나 훔쳐 먹게 됐어요. 그러니까 고만 쫓기게 됐던 거죠. 그 주인한테 쫓기게 되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쫓기다 쫓기다가 그만 우물로다가 들어가 버린 거예요. 자기가 죽는다 안 죽는다를 떠나서 그냥 쫓기다 보니 급하니까 우물로 다 뛰어들은 거예요. 뛰어들어 보니까, 물에 뛰어들어 보니까 자기 한 길이 넘는단 말입니다. 옛날에 그 우물은 이렇게 돌로다가 쌓아 올렸거든요. 그래서 그 물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돌을 양면을 딛고서 돌을 붙잡고 있으면서 생각한 거예요. 급하니까 생각한 거예요.
무슨 생각을 한 줄 아세요? 자기가 그냥 물속에 빠지면 죽겠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더러 한 소리예요. 엉겁결에 자기더러 한 소리예요. ‘아유, 너는 우물에 빠졌는데 말이야, 너는 어떻게 해서 나를 살리련?’ 하고 소리친 겁니다. ‘나 좀 살려 줘’ 하고. 그런데 바깥으로 생각을 하고 ‘살려 줘’ 한 게 아니라 아무도 없으니까 ‘나 좀 살려 줘’ 한 게 바로 자기더러 한 거예요. 바깥으로 했으면 살아나지 못해요. 그러나 자기 마음 안으로 들이대고선 ‘나 좀 살려 줘’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살려 줘’ 하니까, 그 마음속에 모습 없는 참자기는 모습을 수만 개로 낼 수도 있거든요. 살아서 돌아다니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딱 들어간 겁니다. 들어가서 그 사람이 바로 그 애가 된 거예요. 애가 돼 가지고선 보니까 우물에 괜히 가고 싶은 겁니다, 목 마르고…. 그러니깐 지나가던 사람이 그냥 우물로 간 거지요. 우물로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뜨려고 가서 보니까 사람이 걸쳐져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 물 먹고 싶은 마음이 싹 없어지고 그 두레박 줄을 튼튼하게 그냥 다시 꽈 가지고는 그걸 들이 밀어 가지고는 그 아이를 건져 냈단 말입니다.
그때 그 아이가 생각한 거예요. ‘아하, 내 모습은 이거 하나지마는 내 이 모습 없는 모습은 수천 개도 될 수 있구나.’ 하는 걸 그때에 그 아이가 거기에서 느낀 거예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을 다 구제를 하고 그랬대요. 있는 사람한테서 자기가 좋은 일 좀 해 주고 얻어다가 없는 사람을 주고 이렇게 해서 항상, 자기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훌륭한 소년도 있었어요. 그러니 바깥으로 찾는 자는 절대 이익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주인공 발견과 화두 수행

제가 주인공 자리를 발현한 것은 아니지만 일체를 주인공에 맡기며 생활하다 보니까 마음이 편해짐을 느낍니다. 그런데 주인공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종종 ‘주인공은 누구인가.’ 하거나 ‘주인공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화두를 염합니다만, 스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난 자체가 화두이니 화두를 따로 염하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 혼란스럽습니다. 마음이 편할 때 주인공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과 화두를 염하는 것이 바른 수행인지 알고 싶습니다.


아니, 화두가 따로 있나요? 내 몸이 수박이라면 ‘요놈이 뭘꼬?’ 하고 평생을 돌아봐야 맛을 못 봐요. 맛을 몰라. 그냥 무조건 넘어서야 된다 이 소립니다. 무조건 이 마음의 칼로 쪼개서 맛을 봐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에 모든 것은 맡겨 놓고 ‘당신만이 당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다!’ 하고 아예 무조건 들어가는 거예요, 그냥 수박 속으로. 수박을 놓고 ‘이게 뭣고’ 하기 이전에 그냥 수박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무조건.
이 수박을 내 몸뚱이라고 합시다. 수박을 놓고 요놈이, 이 주인공이라는 놈이, 요놈이 뭘꼬 한다면 이게 물론 관이라고도 할 수 있고 참구라고도 할 수 있죠. 그런데 지금 세상은 훌떡 넘어서야 할 세상이에요. 그렇게 빨라요. 우물쭈물하다가는 자전거에 치이듯이, 우물쭈물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그냥 잘라 먹고 넘어가라 이겁니다. 부처님이 앞에 있어도 그냥 먹고 넘어가라 이 소리예요. 일체 만법을 다 거기다가 맡겨 놓고 넘어가는데, 고놈만은 왜 놓지 못하고 고놈만 고놈이 뭘꼬 하느냐 이 소립니다. 고놈이 뭘꼬 하기 이전에 그냥 그놈도 꿀떡 집어삼키고 넘어서라 이겁니다. 그럼 맛을 알게 될 거다 이거예요, 고놈 맛을. 고놈이 뭘꼬 하고 아무리 그래 봤자 그냥 울타리 밑에서 맴도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놈을 꿀떡 집어삼켜서 먹고 넘어서서 길을 걸어라 이겁니다.


기독교인인데…

저는 결혼한 지 10년 된 주부입니다. 저의 친정은 기독교 집안입니다. 저 또한 결혼 전까지는 교회에 다녔습니다. 결혼 후 절실한 불자인 남편을 따라 절에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몇십 년 믿었던 종교를 하루아침에 버리기에는 너무나 힘이 듭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초하루, 보름에는 절에 가서 부처님께 무릎 끓고 앉아 있다가 오곤 합니다. 부처님께 다가가자는 남편의 다그침이 불편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고, 어디서부터 차근차근 발을 놓을지 길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타력 신앙으로서 산신을 따로 찾는다거나 칠성을 따로 찾는다, 지장을 따로 찾는다, 어떠한 거를 따로 찾는다면 그건 당신네들이 지어서 귀신으로 사는 겁니다. 미신으로 살기 때문에 죽어서도 그 업식을 벗어나질 못하고 또 귀신으로 등장을 해야 하니 그 업식을 또 가지고 나와서는 수억겁을 거치는 거죠. 여러분이 오셔서 시주를 많이 하고, 정성을 많이 들이고, 그렇게 해서 돈이나 벌어서 이렇게 해서 살려면 내가 여기 이렇게 있지도 않을 것이고,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서 짓밟겠다 그렇게 생각을 한 거거든요. 여러분도 다짐하고 다짐해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그렇다고 해서 몸뚱이가 어딜 가지 말란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생각 자체가 법당에 들면 그 법당에 수만 부처님이 있다 하더라도 둘이 아니요, 내 주인공 안에 다 계시고, 그 몸은 내 몸이요 그 마음은 내 마음이요 그 불성은 내 불성이니 어찌 둘이겠나. 어딜 가더라도 그 자리가 내 자리요, 내 자리가 그 자리이니, 어디 딴 자리가 따로 있을 법이 있기나 한가.
그래서 여러분이 시집을 가거나 장가를 가도, 때에 따라서는 시집 쪽에서 불교를 믿으면 불교로 따르고, 시집 쪽에서 기독교를 믿으면 기독교를 따르고, 따르되 타력 신앙으로 믿지는 말고 내 주처에, 내 가는 데마다, 기독교의 강당에 앉았어도 네 자리가 내 자리고, 불교의 법당에 와 앉았어도 네 자리가 내 자리니까, 그 신조를 잊지 말고 지조를 가져라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기독교, 불교를 따져서 종교를 이름을 짓고 싸운다면 부처님이 가르친 뜻을 하나도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벌레처럼, 짐승처럼 이렇게 윤회에 말려서 수억겁을 거쳐도 벗어날 길은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한테도 그런 말을 가끔 합니다만 ‘부처는 없다. 부처가 없기 때문에 이 삼라만상 대천세계에 꽉 찼다.’ 이겁니다. 만약에 부처 하나로서 규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이 그 뜻을 가르친 게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가 없기 때문에 부처가 꽉 찼지, 만약에 부처가 있다면 부처가 꽉 찼을 수도 없고 과거 현재 미래를, 삼세를 넘나들면서 그대로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이름이요, 부처 없는 것이 부처라는 뜻은 그것은 아주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세계의 왕을 준대도 바꿀 수 없는 그런 보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생활 속에서 남편이, 아내가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서로 감싸 주면서, 언제 적의 부부였기만 한 게 아니거든요. 형제이기도 했다가 딸이기도 했다가 아버지이기도 했다가, 수만 개로 나투면서 수만 이름을 가지고 이날까지 나왔는데, 여러분이 여자로 태어난 것이, 즉 여자로 태어난 것이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건 어머니예요. 그래서 육을 기르고, 정신을 길러 주는 아버지는 태양과도 같고 바람, 공기와도 같다 이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같이, 항상 같이 있는 겁니다. 자식과 부모의 마음은 항상 같이 돌아가고 있어요. 여러분이 자식을 낳고 보니까, 속을 썩고 보니까, 여러분의 그 조상, 전자에 길러 주신 부모 생각 나는 분들도 있고, 안 나는 분도 있겠지만, 그거를 굳이 말을 안 해도 아시겠지만 말을 한마디 합니다.
누구를 막론해 놓고 자식이 의지만 하고 그냥 살다가 그 후에 자식을 낳고 속을 썩이고, 또 속을 안 썩이고 행복하고 이래도 양면을 다 가지고서 우리가 볼 때 ‘아휴, 우리 부모가 나를 기르고 우리 형제들을 기를 때 이러이러했고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하고 삼분지일은 알 수 있다는 얘깁니다. 삼분지일을 알고 있으면 다 아는 거죠. ‘아하, 내가 자식을 낳고 보니까, 쟤가 하는 걸 보고 이렇게 속을 썩다 보니깐 아이구, 우리 부모도….’ 하고 알 수 있는 거죠.
그러니 지금 부모만 아니라 여러분한테 그렇게 자비로운 부모의 마음을 가졌던 마음, 여러분이 또 자식을 두고 그렇게 했던 마음이 한데 합쳐서 뭉쳐진 그 여의주 구슬, 그 보배, 그것이 불성 자체를 응합니다. 그 불성 자체를 믿고, 그 속에서 그 중생들이 다 같이 있느니만큼 같은 마음으로, 한마음으로 만드십시오. 그렇게 한마음으로 만들어서 걸림이 없다면 바로 그게 보살인 것이고 그것이 자비인 것이고, 그것이 부처인 것이고 그것이 참답게 불법을 실천해 나가는 불자의 길이니까요.


진정한 욕망이란…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이해하자면 개인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기업이나 국가나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불가에서 얘기하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참된 욕망이라는 건 어떤 것인가 알고 싶습니다. 특히나 윤리와 도덕이 타락한 혼탁한 사회 속에서 참된 삶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욕망의 기준이 어떤 것인지 스님의 높으신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진정한 욕망이라는 것은 더함도 덜함도 없어야 하는데 우리가 정신계와 물질계를 둘로 보지 않는다면 둘 아닌 행동을 하게 됩니다. 반드시 그건 중용으로서 행을 하지 그냥 작용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행동을 하는 게 아니고 중용을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팎을 다 겸해서 전자와 전자가 양면에 있다면 한데 갖다가 붙이면 불만 들어올 뿐이죠.
그래서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는 것은 항상 부처님의 법에 누가 되게 해서도 아니 되고, 가르치는 스님네들한테 누가 되게 해서도 아니 되고, 셋째는 자기에 누가 되게 해서도 아니 된단 얘깁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모든 게 자기 탓입니다. 나쁜 일이든지 좋은 일이든지 생기는 것이, 상대성 원리가 어디에서부터 생겼습니까? 나로부터입니다. 그러니까 내 탓으로 돌려야죠. 모든 거는 내 탓으로 돌린다.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깐 부딪침도 있고 상대도 생겼고 세상도 벌어졌고 우주도 벌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내 탓으로 돌리면서, 내 탓으로 돌리게 되면 화목을 도모할 수도 있고 의리와 도의를 절대로 허탈히 생각을 안 하게 됩니다. 저절로 말입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행동과 부드러운 말로 항상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감사함을 느끼고 돌아가는 것이 이름해서 계향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이 내면에 자기 자성선을 세우고, 즉 말하자면 선이 중심이 되고 찰나찰나 돌아가니까, 공해서 돌아가니까 공(空)입니다. 그래서 여러분한테 주인공이라고, 각자 여러분이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름은 여러 가지겠죠. 하지만 대체적으로 대의적으로 주인공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사회에서도.
그러니 자기 주인공에 나쁘게 돌아가는 것은 안팎을 비롯해서 나쁘게 생각이 나오고 나쁘게 닥치고 이러는 것은 ‘나쁘게 나오게 하는 것도 너니까 좋게 돌려서 나오게 하는 것도 너 아니냐!’ 하고 거기다가 놨을 때, 잘해 나가고 안에서도 좋은 마음이 생기고 바깥에서도 좋은 행을 하고 좋은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하고 이럴 땐 감사하게 놓고, 그 깊은 내면세계를 떠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이름해서 정향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계향 정향만 잘 해도…. 우리가 향을 피워 놓고 초를 켜 놓고 아무리 빌어 봤던들 공덕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로 나를 이끌어 가고 진짜로 나를 이익하게 하는, 그리고 업보를 타파하고 과거의 모든 것을, 번뇌 망상 생사윤회…. 모든 것을 타파할 수 있는 그 에너지는 바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반면에 일체제불과 일체 중생은 둘이 아니어서 이 모두가 마음으로 전달하고 통신으로 전달하고 말로 전달하고, 이게 ‘교(敎)’입니다. 풀 한 포기 생명도 바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근본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불(佛)’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것은 어느 한 군데 국한돼 있는 게 아니라 포괄적으로 삼천대천세계가 돌아가는 그 진리를 불교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불교 안에 있는 것이지, 바로 불교가 따로 마구니 소굴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종교도 있습니다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짓는 대로 바로 악업이 정해지는 거니까 선업도 정해지는 거고, 자기가 자동적인 컴퓨터이기 때문에 아니라고 아무리 절래절래 머리를 흔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가 해 놓고 입력이 돼서 슬슬 나오게 돼 있습니다.
이 마음속에 말입니다, 마음으로 왜 다스리라느냐. 옛날에 어느 수좌 스님께서 팥죽을 동짓날 쑤다가, 그것 다 아실 겁니다. 팥죽 방울이 끓어서 오르니까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하고 쳤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몸뚱이가 팥죽 솥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 팥죽 솥의 팥죽 방울이 나오는 거지 딴 데서 오고 뺏어가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망상도, 또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깐요. 그러니 거기에 속지 말라 이런 겁니다. 속지 말고 그냥 놔라. 미리 ‘어, 이것도 팥죽 솥에서 나오는 거니까 이것도 너로구나.’ 하고 탁 눌러 놓고, 이것도 눌러 놓고 그런다고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지금 얘기했듯이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만 특별히 마음의 향으로 지킬 수만 있다면 그대로 자동적으로 지켜지면서 모든 공덕이 자기한테 스스로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렇게 분수없이 일을 저지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이란 게 있는 겁니까?

어리석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기독교에서 하는 기도라는 것과, 또 불교에서도 관세음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데, 기도라는 그 자체가 그걸 많이 해 가지고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럼 욕망이란 건 기적을 찾는 건데 그 기적이란 게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기적은 없습니다. 기적이 없다는 이유를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한생각을 잘 하면 그대로…. 이거 보십시오, 예전에도 얘기했습니다만 어느 사람이 감방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화가여서 그림도 아주 잘 그리고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애들을 넷이나 두고 두 다리를 자르게 됐습니다. 뼛속으로 썩어 들어가서. 다음 날 아침 새벽에 잘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는 애기를 업고 그냥 울면서 울면서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너가 있다면 네가 그 두 다리를 자르지 않게 할 것이고 너가 없다면 두 다리를 자르게 할 것이다. 너는 즉시 아침에 가서 다시 한 번 진찰을 해 달라고 그래라. 그런다면 알 바가 있을 게다. 네가 있으니깐 그것도 있는 것이지 기적은 없다. 네가 바로 하는 것이지 기적이라는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다, 이게.” 그랬더니 가서 정말 진찰을 해 달라고 울고불고 그래서 다시 해 보니까 발목 아래로 내려가 있더라는 거예요, 썩어 들어가는 것이. 그게 모두 기적이라고 하겠죠.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 진실한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라는 얘기지 그런 일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그러니깐 30%는 의사의 손을 빌려야 하지만 70%는 여러분이 바로 충당해야 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기적이라는 것을 말하자면 한두 건이 아니지만 여러분이 그렇게 하시는 거지, 할 수 있는 재료가 있다는 거지, 아니 기적은 무슨 기적입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사람이, 또 만물의 영장이 또 자신, 신이 있고 여러분 자신이 바로 우주의 전체의 근본을 바로 직결이 돼 있는 여러분의 직결 장소가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기적이라는 언어가 붙지 않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기적이라는 언어가 붙지 않는다 이 소립니다. 잘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군데다 놓고 빌지 말라 이 소립니다. 나를 잘되게 해 달라, 뭐 산신한테다 놔야 되고 부처님한테다 놔야 되고 칠성한테다 놔야 되고 신중당에다 놔야 되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고, 거기 한 군데를 안 놔서 우리 아들이 잘못되면 어쩌나?’ 이렇게 간약한 여러분의 약한 마음에 의해서 그 우환과 가환은 끊일 날이 없이 거기에 아마 대두될 겁니다.
여러분도 부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그 자체 불(佛). 그러나 여러분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인과가 되고 업보가 되고 그렇게 해서 그 수많은 중생들이 한데 모여 있기 때문에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니니라.’ 이런 겁니다. 몸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과 지금 해 나가는 그 마음이 바로 둘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깐 여기에서 그 많은 마음이 일어나는 거를, 의식이 일어나는 거를 거기에 맡기고 지켜보세요. 모든 걸 거기 맡겨 놓고 지켜보세요.
그러면 거기서 실험을 할 수 있고 체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하나 터득을 하고 가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기적이라는 이름은 없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그렇게 여여하게, 정말이지 광대무변하게 해 가지고 갈 수 있는 그 능력이 부여됩니다.
여러분이 만물의 영장이며 ‘자신(自神)’이며 우주가 직결돼 있는 바로 처소며 가설이 돼 있는 근본인데 어찌 그것이 기적이라고 하겠느냐 이겁니다, 모두 여러분이 갖추어 가지고 있는 것을. 그러니까 타의에서 구하지 마시라고 늘 간곡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2004-11-17
 
 
   
   
202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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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