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학(慧學) 스님은 진리의 세상에 세번 태어났다. 첫번째는 아버지인 영암(影庵)스님으로부터 불교에 대한 눈을 뜬 것이다. 영암 스님은 여러 곳에서 수행하다 1958년 다 허물어진 망해사(望海寺)를 중건, 태고종 울산분원장도 역임하다 1977년 이른 나이로 열반하였다. 어린시절 형제들과 함께 눈을 떠보면 늘 예불을 하고 나서 참선을 하고 계셨지만 굳이 강권하지는 않으셨다고 한다. <금강경>을 통째로 외면서 종성을 하던 모습에서,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 부처님의 길을 갈 아들이 누구인가를 조용히 물어서 용기있게 손을 들고 대답하자 힘있게 그러라고 격려해줌으로써 어린 혜학을 거듭나게 했다.
두번째는 태고종 종정을 역임하셨던 덕암 스님에게서다. 1979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진학하여 1학년 때 아차산 영화사에서 덕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혜학’이라는 이름을 받아 정식 승려가 되었다. 영화사 바로 아래인 화양사에서 덕암 스님을 시봉하면서 자상한 교육을 받았다. 분규 당시 이야기가 잘 되다가도 돌아서면 묘하게도 입장을 바꿔버리던 상대 스님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출발이 바람직해야 하고 얌전하게 사는 것이 바른 승려라는 말씀을 많이 하였다.
세번째는 군법사로 임관하기 위해서 당시 용주사 주지였던 정무 스님 앞으로 승적을 올린 때이다. 태고종 승려라고 할지라도 조계종의 승적을 가져야 하는 현실적 규칙에 따른 것이었지만 정무 스님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정무 스님은 엄하면서도 매우 자상하셨고, 혜학 스님에게 남다른 애정을 베풀어 주셨다. 덕암 스님께 받은 계(戒)의 중요성을 인정해 주시고 법명도 같은 ‘혜학’으로 그대로 쓰도록 배려해 주었다. 정무 스님은 늘 효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혜학 스님에게 은사인 덕암 스님의 훌륭함을 칭찬하시면서 잘 모시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혜학 스님이 원주에서 군법사로 재직하던 시절, 정무 스님은 여주 신륵사 주지로 계시면서 군법당 불사에 신도들을 동원 지원해 주시고 법문도 해 주시면서 군포교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혜학 스님은, 늘 가까이 모시면서 가르침도 받고 효도도 해 보리라 마음먹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가진데다가 아버지인 영암 스님과 은사인 덕암 스님이 이미 열반하셔서 더욱 그리워지는 스승이 정무 스님이란다.
이렇게 세 분 스님의 조화로운 지도로 거듭난 혜학은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군법사로 임관하여 공군법당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모든 법사들이 다 열악한 환경에서 한창 고민하고 있는 피끓는 젊은이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으로 세상을 살도록 지도하지만 혜학이 처음 부임한 횡성 공군기지는 법당도 무엇도 없는 곳이었다. 사무실만 얻어서 법요집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고 정신교육관에서 매주 법회를 보면서 불교 씨앗을 심어야 한다는 의욕에 찬 생활을 하였다.
이때 같이 임관한 법사 한명이 교통사고로 순직하는 사고를 겪었다. 故 이 동신 법사의 영결식장에서 그 몫까지 더 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열심히 포교하였다. 외곽초소 경계근무병들에게는 지프를 얻어 타고 다니면서 근방의 사찰에서 시주 받은 초코파이와 라면을 나누어 주고 부처님 이야기가 적힌 쉬운 포교자료집을 전달하며 손을 잡아주면 고향의 아버지를 대하는 것 같은 그들의 표정에서 포교하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공군교육사령부에서도 법사로 있었는데 새로 온 훈련병들에게 각 종교를 홍보하는 시간에 신부나 목사는 성경말씀대로 진지한 이야기를 했는데 혜학 스님은 엉뚱하게도 ‘아침이슬’을 불러제켰다. ‘아침이슬’은 당시 금지곡으로 데모할 때나 부르던 노래였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그것도 군부대에서 아무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는데 혜학 스님이 그것을 한 것이다. 천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아침이슬’을 부르는 장면은 당시 그 자리에 있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감동의 도가니였고 그래서 그런지 그후부터 법당엔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자리가 없어서 구석에 앉는 것은 고사하고 법당 밖이고 산기슭이고 사람들로 가득 차서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였다.
혜학에게 법문을 듣고 부처님 진리를 접한 사병들과 장교들이 제대해서 망해사로 찾아와 차 한 잔 마시면서 그 때 이야기를 추억담으로 나눈다. 스님은 지금도, 비록 믿음의 방향은 다르지만 자신의 종교를 한사람에게라도 더 전하여 하나라도 더 포교하고자 노력하며 고민했던 다른 종교 성직자들과도 좋은 인연으로 만나고 있다.(계속)
■관악산 자운암 상임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