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승용차 FM 라디오에서 낯익은 가락이 들린다. 외국 노래여서 가사는 알 수 없지만 콧노래로 따라 부른다. 그것을 번안한 노래말이 지금도 자욱한 최루탄 냄새와 함께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무릎을 꿇고서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단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어둡고 우울한 흑백필름 시대의 추억이다.
한국인의 의식 구조 속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최후의 선택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치욕의 끝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청나라 태종 앞에서 보인 삼전도의 굴욕, 명분과 목숨을 바꾼 삼학사의 절개가 시퍼렇게 유전되고 있다. 가락을 흥얼거리면서 지난 11월 8일자 신문에 소개된 무릎 꿇은 일왕(日王)의 사진이 추억의 스크린에 겹쳐진다.
아키히토(明仁) 일본 왕이 강진으로 피해를 입은 니카타현을 찾아 피난민 숙소에서 무릎을 꿇고 난민들을 위로하는 모습이 전세계에 소개되었다.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천황’이 필부들 앞에서 보인 행동이니 그 파급효과는 절대적이다. 재난을 당한 난민들의 고통과 아픔이 한방에 날아갈만한 외경스러운 정경이다. 고통보다 괴로운 것은 무관심과 외면이다. 공허한 말재주로 사태를 무마시키려는 행태는 분노와 증오를 증폭시킨다.
사실 일본인들에게 무릎을 꿇는 행위는 일상사이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속내가 다른 것이 일본인의 속성이다. 일왕은 일본인들이 만든 상징물이다. 상징을 통해 서로 이익과 질서를 얻어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상징화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권력과 제도도 상징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왕이 보여준 행동은 일상사가 아니다. 술수와 쇼도 아니다. 불교적 시각으로 본다면 하심(下心)의 실천이다.
시(詩)를 쓰는 어느 선배가 청년 시절에 겪은 일화가 생각난다. 비 오는 날, 평소 은사로 모시는 원로 시조시인을 만났다가 헤어질 때, 노시인은 한사코 우산을 청년에게 건네주며 “자네는 훌륭한 시를 쓸 젊은이네. 비를 맞게 할 수는 없네. 나는 훌륭한 시인을 키운 스승이라는 기쁨을 누릴 것이네”. 노스승은 청년 시인에게 우산을 건네주고 당신은 비를 맞으며 갔다고 한다. 그 은혜에 보답코자 선배는 형형한 눈빛을 잃지 않고 시를 쓰고 있다.
자신을 낮추는 일은 어렵다. 알음알이와 지위와 아상이 그것을 가로막는다. 창처럼 날을 벼려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라고 강요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타도의 대상이라고 부추긴다.
가을에 벼들은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 다투어 머리를 숙여 온 들판을 보면 마치 좌선삼매에 든 선객들을 보는 듯 하다. 알이 토실토실한 놈일수록 햇빛을 이웃에게 양보하며 깊숙이 머리를 숙인다. 게중에 드문드문 섞여있는 쭉정이들은 겨울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고개를 쳐들고 있다. 농부는 일단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벼를 벤다. 그러나 창고에 쌓이고 밥상에 올라 한껏 윤기를 자랑할 수 있는 것은 하염없이 고개를 숙였던 알곡들이다.
힘든 일을 겪을 때 진정으로 다가와 손을 잡고 위로를 베푸는 지도자가 그립다. 고통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든 세상일의 대부분은 지도자, 가진 자, 아는 자, 어른된 자의 책임이다.
‘네탓이오’에만 열을 올리는 세상, 화합과 사과에 인색한 인심, 상대를 향해 쏘아댈 화살만 벼르고 있는 이 나라의 풍경을 바라보니 일왕의 행동이 무겁게 다가온다. 우리는 무릎 꿇는 것은 죽음보다 더 어려운 것이라는 과거 시대의 공식에 지금도 얽매여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