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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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순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짜로 싹은 제 뿌리를 믿어야 합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1: 스님, 낙태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됩니까?
▲스님: 아주 간편하게 그냥 낙태라고 한마디로 해버리네! (대중 웃음) 사방에 붙어 들어오는 게 낙태인데, 허 참! 허허허. 이거 봐요, 낙태를 한 번 시키려면은 그 영혼 자체가 인간으로서 화했을 때 어떤 영혼이 어디에서 왔나를 알아야 하고, 그렇죠? 그리고 집안 조상들은 어떤 문제의 연관을 가졌나, 이거를 알아야 대처를 해요. 그렇기 때문에 낙태를 지금 산부인과에서 한다지만 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크나 작으나 많으나 적으나 그 수효가 따로 없어요. 예를 들어서 만약에 자기 주인공에 모든 것을 일임하고 낙태를 시킨다면은 그거는, 즉 말하자면 물질적인 형상은 낙태를 시키고 그 영혼은 건져서 자동적으로 다시 재생이 돼나가니깐요. 용광로에 넣으면 무조건 녹아서 모두 가공돼가지고 저절로 생산이 돼서 나간다. 이런 거를 아니까 용광로에다 다 넣거든요. 용광로에다 다 넣는다면 그냥 자동적으로 생산이 돼서 나가요. 생산이 돼서 나갈 때 어떤 걸로 나가느냐가 문제죠. 즉 말하자면 용광로가 금의 용광로냐 무쇠의 용광로냐, 여기에 따라서.
여러분도 공부하면서 차원이 다 있습니다. 없는 게 아닙니다, 역력합니다. 여러분이 다 알기 때문에 나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 못하는 이유가 있죠. 말을 하면 아니 되니깐요. 그러니까 여러분, 낙태라는 문제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낙태를 한다 하더라도 첫째는 물질세계에 사는 사람의 그 삶을 위해서, 둘째는 그 영혼을 건지기 위해서, 셋째는 내가 넓혀서 지혜롭게 대치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 그러니까 모든 게 삼합이 맞아야 되듯이 모든 걸 거기다 놓고 가면 공부가 완전히 된 사람은 금의 용광로일 테고, 금 용광로에 넣어도 브로치가 되느냐, 목걸이가 되느냐, 반지가 되느냐, 귀걸이가 되느냐의 문제가 또 있죠.
그런데다 습이 덜 떨어지고 참 도리의 완성이 되지 못한 사람들에 한해서는, 갈팡질팡하는 사람은 그것이 금 용광로가 아니라 무쇠 용광로가 돼버려요. 그건 자동적이에요. 오신통 자체가 컴퓨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들어가면 쇠로 재생이 돼서 나가죠, 또.
사람들이 많고 많아도 차원이 다 있습니다, 다 얼굴이 다르듯이. 요만큼도 똑같은 거는 없어요. 묘하죠. 그렇듯이 우리가 이렇게 한마디를 방편으로 했으면 천차만별이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생명을 걸고 공부하셔야 됩니다. 생명을 건다고 해서 뭐 금방 죽을 거 살아나고, 금방 살아날 게 죽는 게 아닙니다. 죽을 사람은 방 안에 가만히 앉았어도 죽습니다. 그러니까 절에 다녀도 죽더라, 이러진 마세요. 허허허. 그러니까 죽고 사는 거 개의치 마시고 그냥 열심히 하시되 낙태라는 것도 그러한 요소요소가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그리고 또 이런 게 있죠. 낙태에 대해서 한마디 또 할 게 있는데, 부모든지 자식이든지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산 목숨을 죽인다 이럴 때는 주인공에다 놓고 하면 무명을, 그 짐승의 무명을 벗겨주고 사람으로서 한 찰나에 되는 겁니다. 한 찰나에 사람의 용광로로 들어가서 재생돼서 사람으로서 환토를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그렇지 않고 마음공부를 아주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무조건 생명을 그냥, 그걸 건지지도 않고, 둘 아니게 건지지도 않고 그냥 생명을 죽이니까 살생이 되는 겁니다.
낙태시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로 다 그렇습니다. 지나가다가 뱀 한 마리를 죽여도 꼭 그렇습니다. 이거는 요만큼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를 죽였어도 에누리가 없는 겁니다. 개구리도 자기 어미를 알고 자기 애비를 알고 자식을 알고, 우리와 똑같은 살림살이를 하고 있는 거고 마음들을 그렇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원한이 없겠습니까? 식구들을 다 때려죽여 보세요. 거기에 언제든지 두고 보자 하는 그 마음이 철통같이 들어있을 겁니다, 아마.
그러니깐 낙태시키는 것도 이런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다 문제가 되어지죠. 정말입니다. 또 짐승이나 어떠한 고기를 물에서 잡아서 그냥 죽이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산 짐승을, 산 것을 사다 먹지 마라, 산 것을 사다 먹지 말되 죽은 것도 네 살로 생각을 해라,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맡기고. 그래서 기도할 때 ‘주인공,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라. 채소들을 끊어다 먹는 것도 생명을 죽이는 거지 생명을 안 죽이는 겁니까? 그러나 연쇄적으로 먹고 살게끔 다 돼 있는 것이니 차원이 아주 낮은 거는 높은 놈한테 잡혀 먹히게 돼 있어요. 진리가 그렇게 돼 있으니깐요. 그러되 내 생명으로 알아라 이거죠. 그럼으로써 모든 걸 빨리빨리 진화시킬 수 있고, 빨리빨리 화할 수가 있고, 빨리빨리 창조력의 자유스러운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이거죠.
그러니까 이치에 닿지도 않는데, 자기한테 아쉬움도 없는데 포수가 나가서 총질을 한다거나 낚시질을 한다거나 이래가지고 죽일 필요가 없죠. 반드시 두 가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두 가지가 있어요. 할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서 생명을 죽인다거나 이런다면 반드시 주인공에 일임하고서 그대로 하셔야 그 무명이 벗겨질 수 있죠. 그래 첫째는 무명을 벗겨주니까 자비고, 또 그 살은 약으로 대치를 하니까 자비고, 전부 다가 더불어 같이 자비다 이 소립니다.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아예 살생이 되고 인과응보가 되고 업보가 되는 겁니다.
▲질문자1: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전생에 배운 공부, 예를 들면 역사나 외국어 실력 같은 것들을 그냥 가지고 태어난다면 다시 그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옛날에 율곡 선생님은 태어나자 우는 소리가 글 읽는 소리로 들렸다고 그러고, 또 일곱 살 때 시를 지은 것을 보면 전생에 공부한 것을 그냥 가지고 태어난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전생의 것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다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이 생각을 어떻게 봐야 됩니까?
▲스님: 부처님께서 전생으로부터 부처님 될 그 이름을 타고났다 이랬는데 왜 그렇게 고생을 했소? 하하하. 이거 봐요, 무(無)의 세계에서 아무리, 전생에 유(有)의 세계에서 공부를 잘했다 하더라도 바로 탑은 쌓아야 탑이죠. 예를 들어서 다 알아도 다시 한 번 방편으로 나와서 그 길을 더 멋지게 걸어야 돼요. 얼른 쉽게 말해서 더 고생을 해야 돼요. 더 그거를 열심히 해서 보여줘야 모든 사람의 마음들이 한마음이 될 수 있지, 아니 보여주지 않는데 어떻게 한마음이 될 수 있겠소? 그러니까 율곡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소?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전생에 배웠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소? 이런 게 있죠. 전생에 다 알고 했으면 그만큼 지혜가 넓고 물리가 터져서 그냥 하나를 보면 벌써 열 가지까지, 벽을 치면 봇장까지 울린다 이럴 수는 있죠.
그러니깐 여러분이 자식들이 공부를 못한다 뭐 어쩐다 이런 거를 생각할 때 과거는 지나갔으니깐 없다, 과거의 업보를 생각하고 그러지 말고 과거의 업보는 내 몸속에 다, 여러분이 악업 선업 모자라는 의식들을 다 가지고 있어요, 지금. 그러니까 그저 내가 살면서 닥치는 대로 그냥 거기다가 놔라!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 그러고 그냥 되놓는 거죠. 그래야만이 앞서의 입력된 게 없어지거든요.
그러니까 과거라고 멀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어저께도 내가 탄생하기 이전과 똑같다 이겁니다. 거리가 가깝고 멀고가 없다! 일 초 전만 하더라도 과거예요, 벌써. 그만큼 빠르기 때문에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 전체가 가설이 돼 있는 거예요. 그거를 진짜로 느끼지 못하겠걸랑 공부 열심히들 해요. 아무리 전자에 잘 쌓아졌던 탑이 있다 하더라도 이 생에 다시 탑이 쌓아져야 더 잘, 전자에는 오층 탑이었었는데 십이층 탑으로다가 잘 올릴 수도 있는 거거든요. 누구나가 다 쳐다보게 다 알고, 다 배우고, 다 보고 그래야만이 한마음이 돼주지, 보여주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그거는 목석인가요? 오히려 전자에 알았다고 할 수가 없죠.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이라고 최초에 나와서 이름을 만들어놨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지 다 깨우치면 부처입니다. 하하하. 그래서 부처가 꽉 찼죠.

▲질문자2: 육신의 근본 뿌리가 있음을 알려주신 스님께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마음내는 도리, 무선통신에 대해서 누차 감로법을 많이 들었습니다만 무지의 탓으로 다시 한 번 여쭙고자 합니다. 신록의 계절에 산불로 인해 산이 헐벗고 있습니다. 그런 것과 곧 다가오는 태풍으로 인한 물난리와 3월 29일과 4월 10일에 있었던 조계종 법난 사태에 대해 역대 조사 스님께서나 현존해 계시는 부처님께서는 마음 도리로써 협상하는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럴 때, 무지한 저희들로서는 어떻게 그러한 천재지변이나 그러한 사태에 마음을 내야 될지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스님: 이것은 그대로 진리에 순응하는 일이죠, 그대로. 사람들이 넓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는 게 없으면 가는 게 없듯이, 우리가 그런 거를 다 불상사라고 하지만 그게 불상사가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해드렸지만 태양열과, 즉 온기라고 합시다. 그 온기가 밑 물 찬 데까지 서로 대치를 해주지 않는다면 살 수가 없고 또 그 소용돌이가 치지 않는다면 위의 것이 못 살고 아래 게 못 삽니다. 그래서 밑의 게 위로 올라오고 위의 게 밑으로 내려가야만이 같이 먹고 삽니다. 서로 주고 서로 살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다 더불어 모든 생명들이 있기 때문에 물도 사는 거지 생명들이 없으면 물도 죽는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 인간들이 살아나가는 데도 역시 그렇습니다. 인간들뿐만 아닙니다. 물에서 사는 거든지 들에서 사는 거든지 곤충에 이르기까지 다 그렇죠.
그러니까 그것이 잘못돼서 그런 게 아니라, 산에서 풀을 다 태우는 일들은 곤충이나 모든 생명들이 다시 새 뿌리 새 싹이 나와서 다시 먹게 하기 위한 도리도 됩니다. 이 모두가 천연적으로 자연적인 활동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까 어느 누구가 잘못해서 불이 났다, 이러기보다는 더불어 같이 살기 위해서다 하는 그 말을 하고 싶어요. 그러면 태풍이 와서 사람이 많이 죽는데 그거는 어떤 일로 그러냐 이러겠지만 넓게 본다면 그거 역시 마찬가집니다. 어떤 사람은 외아들을 데려갔다, 이렇게 하죠? 그런데 그것도 쓸모가 있기 때문에 외아들을, 외아들이고 아니고 간에 쓸모가 있기 때문에, 다시 대치해서 다시 내보낼 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깐 죽는 것도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사는 것도 그냥 사는 게 아니에요. 한 치도 이거는 벗어날 수 없이 살고 있는 겁니다. 그냥 자동적으로 자유스럽게 사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공기주머니를 한 발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 반면에 모든 걸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는 거죠. 우리가 공부하는 이치는 그런 것을 다 순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크게 그릇이 돼라는 얘기죠. 그럼으로써 대치를 다 할 수 있고 그런 거죠.
▲질문자2: 그런데 산불이나 그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저희들은 안타까운 마음이 간절합니다.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도 마음 도리로 어떻게 산불을 좀 끄게 해달라는 그 한마음을 사실상 주인공 자리에다 맡깁니다. 맡기면서 갈 수만 있으면 차로 가서 불을 좀 껐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생겨서 말씀드립니다.
▲스님: 그거는 그것대로 인간세계에서의 마음들이겠죠. 그러나 곤충까지도 살리는 게 못 되고, 마구 이렇게 하면 상당히 피폐해가죠, 생명들 생체가. 그러니까 한 번씩 그렇게 해줌으로써 살 수 있는 기반을 세울 수 있다 이런 것도 되고요. 타 죽는 게 있다 하더라도 타 죽는 게 아니고 진화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야죠. 그 껍데기가 죽었다고 그래서 속의 씨까지 죽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냥, 때에 따라서는 그것도 두 가지 여건이 있겠죠. 태워서 안 될 게 있고 태워서 될 게 있고, 꺼서 될 일이 있고, 안 꺼도 괜찮을 일이 있고 그렇죠. 그러니깐 될 수 있으면 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치해서 끌 일이라면, 아주 시급하게 끌 일이라면 비가 오게 하시면 돼요.
▲질문자2: 감사합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저의 사견에 대한 스님의 정견을 듣고 저의 마음 정립을 하고자 합니다. 저번 법형제 법회 때, 법형제 형님께서 나오신 지 며칠 안 되신 분입니다. 스님을 친견을 해야 되는데 어떻게 친견을 해야 되며 정성금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해서 제가 제 나름대로, 이건 또 말을 잘못하면 누가 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제 생각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단 스님을 뵙고자 하는 지극한 마음이 있으면 뵐 수 있는 것이고, 정성금을 스님께서는 물질로 보는 것이 아니고 형님의 마음을 보시니까 일단 마음에서 마음에 넘쳐서도 안 되고 모자라서도 되지 않는 금액을 올리시면 되겠습니다.” 하니까 일단 알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러고 또 요번 5월 1일, 법형제 법회 때 공교롭게도 정성금에 대한 이야기가 또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성금 금액을 정해가지고 나왔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나 깜짝 놀라가지고 이거는 이러한 자리를 빌려서 스님의 정견을 들어야겠다는 그러한 마음에서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만, 금액까지 정해졌을 때는 이게 무슨 말씀이 잘못되지 않았느냐, 제가 집사람한테 듣는 이야기로는 스님께서는 금액이 많든 적든 정성금이 일단 오는 것 같으면 필요한 사람한테 도로, 빌려서 온 것 같으면 당신의 아픔이 내 아픔이기 때문에 그 정성금을 도로 돌려주시고 또 그마저도 사양할 때는 그 마음만 받으신다 는 걸 제가 누차 들었습니다. 그래서 금액이 정해졌을 때는 잘못하면 큰 누가 될 것이다. 그래 제가 그렇게 얘기했죠. “스님께서는 금액에 구애치 않고 그 사람의 마음을 받으십니다.”라고 일단 말씀드렸죠.
그러면서도 저의 경우를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공부하는 과정에서 저 혼자 수습을 하지 못하는 게 있어서 죄송스럽게도 두 차례 친견을 했습니다. 저번 달에 한 것까지 세 차례 했습니다만 저는 정성금을 올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가운데서는 항상 감사하고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스님께 제 나름대로 올리고 싶은 금액이 정해졌습니다. 언젠가는 과자 값으로 드려야 되겠다 하는 마음으로 정해놓고 있었는데, 저번 달에 제가 조그마한 사업체를 하기 위해가지고 어려운 일에 부닥쳤습니다만 그 일이 허가를 받게 되는데 한 5%에서 10% 정도로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여 허가를 못 받게 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공부를 해가지고 하려고 했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또 친견을 했습니다. 친견하면서 조그만 저의 마음의 표시를 드렸습니다. 그러고 내일이면 건축 허가를 받아가지고 착공에 들어갑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 지금 말씀을 길게 하셨으니까 한번 짧게 해보십시다. 그렇게 또 누가 묻걸랑은 그러세요. ‘네 마음대로 해라!’ 하하하. (대중 웃음) ‘적게 하든 많게 하든 너희들 마음대로 해!’ 이렇게요.
그러고요, 이렇게 하는 거를 내가 굳이 말씀해드릴 일이 있습니다. 내가 이 일만 되면 꼭 시주하겠다는 금액을 자기네들 마음으로 정해놓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 건 대체적으로 없지만. 그런데 드문드문, 처음 오셔서 얼마 안 되는 그런 사람들이나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자기 마음으로 금액을 정해놓고 그게 됐는데도 그거를 안 한다 이거죠. 이러면 그거는 됐다 하더라도 딴 게 문제가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얼른 쉽게 말해서 남의 물건은 가져가고 물건 값을 안 갚으니까 그렇단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액을 지어놓고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지 마라 이 거예요. 단 하나 있다면, 그저 잘되면 자기 마음으로, 잘되면 어떡하든지 불사도 하고 좀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다만 얼마라도 자기가 새 돈으로 정성껏 담아서 하면 대치가 될 것을, 그냥 그렇게 자기가 만들어가지고 고생을 하는 거죠. 만들어가지고 고생을 하는 여러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뿐만 아닙니다. 사람이 생활 속에서 살아나가는 것도 그렇게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어놓고 죽겠다고 옵니다. 이거 정말이지 어렵습니다. 길잡이 노릇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옛날부터 사람 셋 끌고 가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러더니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스님 앞에 갈 때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묻걸랑 마음대로 하라고 이렇게 하세요. 자기네들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자기네들이 할 일이지!

▲질문자3: 저는 설악산 기슭에서 왔습니다. 여기 다니는 신도님께서 『한마음』이라는 책자를 보내줘 가지고 그걸 수도 없이 읽었습니다. 그래도 제 나름대로 이제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읽고 또 읽고 하다가 만날 여기를 한 번이라도 와서 법회하시는 걸 듣고자 수없이 별렀는데 오늘 처음 와서 스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제가 의문되는 점은 저의 손녀딸이 지금 두 살인데요, 구개열이라고 입 천장이 열려가지고 지금 백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거든요. 의사 선생님은 언어장애가 올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원인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돼서 그 어린 것이 그렇게 되는지 그게 궁금해서 왔습니다.
▲스님: 진리의 뜻에서 보면 어리고 늙고 이런 게 없습니다, 평등합니다. 자기가 과거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끼리끼리 모이기 때문에 그렇게 오는 겁니다. 자기 속에, 자기 몸속에 다 들어있거든요. 그러니깐 누구가 갖다 준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관(觀)하라고 할 때, 모든 것을 용광로에다가 놔라 이런 겁니다. 그렇게 그 모든 걸 일임시킨다면 앞서의 인과응보가 무너지면서 새 사람이 될 수가 있다 이런 거죠. 그러니까 언어의 지장이 있을 것이다 하더라도 그 언어의 지장이 없도록 관하세요. 관하는 것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진짜로 싹이 제 뿌리를 믿어야 되는 겁니다. 싹은 제 뿌리로 인해서 사는 거니깐 싹이 제 뿌리를 믿고 제 뿌리에 모든 걸 맡겨놨을 때 그렇지 않도록 하는 것도 너밖에 없다고 맡겨놨을 때 바로 몸속에서 모든 의식들이 모자라는 걸 채워주고 작용을 해줍니다.
▲질문자3: 그 길을 몰라서 이렇게 왔습니다.
▲스님: 예, 그러니까 관하시는 거를 똑바로 스님네들한테 물어서 가세요. 내가 ‘여쭤봐서 가세요.’ 이러려고 그러다가 그냥 ‘물어서 가세요.’ 이랬어요. 이게요, ‘물어봐서’라고 할 수도 있는데 왜 내가 ‘여쭤봐서’라고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느냐 하면, 정말 그 한마디에 일생 동안을 말에 장애가 올 거를 대치할 수 있으니까, 그게 대치만 된다면 돈 주고 살 수 있는 겁니까? 그러니까 여쭤보라고 할 수밖에요.
여기 우리 스님네들이 금덩어리입니다. 신도님들도 금덩어리고요. 금은 금방에 모두 모이죠? 무쇠전에 모이지 않습니다. 하여튼 그렇다고 해서 우린 금이고 딴 사람은 금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금은 금인데, 다 금인데 어떻게 살아나가느냐에 따라서 무쇠도 되고 넝마도 되고 그렇죠.

▲질문자4: 저는 광주지원에서 왔습니다. 작년에 해남, 장흥 그쪽으로 갈 기회가 있어서 가봤는데요, 산 곳곳이 굉장히 민둥산이 되어 있고요, 소나무가 전부 다 빨갛게 죽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지난번에 스님께서 광주 대법회 때 오셔가지고 운주사에 가셨을 때도 제가 뒤에 같이 따라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면서 보니까 소나무들이 곳곳에 많이 죽어 있어서 뒤에 가면서도 ‘스님께서 저걸 보시고 한마음 내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계속 있었거든요. 그런데 앞서 텔레비전 뉴스를 들어보니까 전국 각지에까지 다 그 병이 번져가지고 경관도 다 해치고 몇 십 년 된 소나무들이 다 죽어가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스님: 그것은 나라 나라마다 다 다르겠죠. 옛날부터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소나무는 국보나 다름없다 하는 이야기요. 사철 사는 거기 때문에 소홀히 볼 수 없는 것이 소나무입니다. 사철나무도 되고요. 그 여러 가지로 볼 때 그것은 아주 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어떠한 문제가 좋지 않다 좋다를 떠나서 소나무가 더 빨리 알고 있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때에 따라서는 돌장승도 알고 있다. 돌장승도 알고 사람들도 전부 거죽으로는 모르나 속의 근본은 다 알고 있다는 얘깁니다. 마음들이 서로 그렇게 해서 통신이 돼서 서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돌아간다. 그러니까 그것은 나라가, 국민이 어떻게 생각을 잘 하느냐에 따라서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이든 국민이든 전부가 다 한 사람이고 다 한 국민이죠. 다 같은 마음들이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서 그런 일들이 예전부터 많이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 가서도 누운 부처님을 보고서 내가 얘기해드렸지마는 그 누운 부처는 누운 부처가 아니고 앉은 부처도 아니고 선 부처도 아닙니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말한 거를 뒤로 돌려서 다시 똑같이 할 수도 없어요. 그리고 내가 한 말은 뒤돌아보지 않아요. 내가 한 게 아니기 때문이죠. 하여튼 열심히 잘 관하셔서 일체가 다 마음들을 잘 쓰도록 이렇게 합시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80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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