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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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뿌리를 먼저 믿고 네 뿌리를 먼저 알라
업보를 짊어지고 나온 그 자리에다 되놓아야

여러분한테 항상 해 드리는 말이지만, 여러분이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 물론 자기 바탕을, 자기 뿌리를 지키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계시리라고 봅니다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주인공이라고 하는 그 자체는 바로 각자 여러분의 뿌리입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도 우리 생명의 근본과 생활 자체의 움직임과 서로 말로 전달하고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과 통신으로 전달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종교다 내 종교다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살고 있는 자체가 그대로 진리요, 그대로 법이며, 그대로 활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법이며 불교인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상대가 생겼고 상대성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생활이 어디 있으며 상대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가 독불장군은 없는 것이며 모두가 공생 공용 공체 공식 하고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주면 내가 너를 주면서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곤충에 이르기까지 쓸모없는 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신계에서 물질계로 나오는 도리와 물질계에서 정신계로 드는 도리를 마땅히 알아야만이 상대와 상대가 한데 합쳐져서 불이 들어올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제각기 찾을 것입니다.
저 나무들을 보십시오. 뿌리가 에너지를 모두 가지나 잎으로 공급을 합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뿌리는 인간이 보지 못하고 나무의 뿌리는 나무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등동물이기 때문에, 그래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졌기에, 우리는 나무 뿌리와 나무를 살펴볼 수 있겠지마는 자기 뿌리는 자기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설하고 가르치실 때 ‘네 뿌리를 먼저 믿고 네 뿌리를 먼저 알라. 네 뿌리를 알게 되면 내 뿌리도 알게 될 것이며, 일체 만물만생의 뿌리를 전부 알아서 시공을 초월해서 찰나찰나 돌아가는 그 자체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치신 겁니다. 그 도리를 모른다면 가르치신 사람도 노예가 되고 배우는 사람도 노예가 될 것이며, 기복으로 “날 좀 살려 주세요. 날 좀 되게 해 주세요. 날 좀 안 아프게 해 주세요. 명이 길게 해 주세요. 좋은 데로 가게 해 주세요.” 하고 아무리 외쳐 봤자 나로부터 내 집에 전화를 놓지 않는다면 통신이 되지 않을 것이고 또는 막히는 것입니다. 전화를 받을 수도 있고 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막혀서, 나로부터 막히면 일체가 다 막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기복으로 여직껏 했으니까 개선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개선해야 할 일도 많고 관습에 의해서 고쳐야 할 일도 많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뿌리가 해 나간다는 것을 모르겠거든 나무들을 보세요. 뿌리가 아니라면 나무의 가지와 잎새가 어떻게 푸르게 살 수 있으며, 푸르게 살려면 반드시 자기 뿌리를 자기가 믿으면서 오직 거기서 나오는 거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기 뿌리라는 얘기입니다.
주인공 한다면 ‘주인’은 아주 특별한 에너지일 것이고, ‘공’은 여러분이 마음내서 움죽거리며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서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모두가 하나도 없습니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고 먹는 것조차도 하나도 고정된 게 없으니까 찰나찰나 공해서, 화해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어떤 것에 착을 두고, 어떤 것에 욕심을 가지며, 어떤 것에 집착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것을 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자녀들이나 부부지간이나 부모지간이 잘못된 일을 한다 하더라도 ‘왜 저렇게 잘못하고 가나?’ 이렇게 생각이 된다 하더라도 모든 건 자기 뿌리 주인공에 맡겨 놓고 ‘너만이 그렇지 않게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질 때에, 그리고 부드러운 말과 부드러운 행동, 부드러운 뜻을 가지고 항상 자기 탓으로 돌리며 사랑한다면 미움이 없어지고 증오가 없어지고 화목해짐으로써, 돈도 생명이 있는 것이므로 ‘저 집에 들어가면 시원하고 재밌겠구나.’ 하고 스스로 들어간다 이 소립니다.
그리고 한마디 해 드릴 것은, 금속이 안 쓰이는 데가 없으며 전력이 안 쓰이는 데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바로 마음으로 전달이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데에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이 되고, 보이는 물질세계에서는 말로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안 보이는 마음으로써 전달을 해 나가고 모든 것을 거기 놓고 간다면 식구들의 방마다 불이 들어오듯이, 내 마음 속에 불이 들어오고 광명이 생기고, 에너지가 생겨서 자유스런 삶의 보람을 느낄 수가 있는 자유스런 마음이 생길 겁니다. 그래서 집안이 화목해짐으로써 모든 병고와 액난, 유전성, 영계성 또는 세균성, 인과성 등등이 다 녹고 바로 합쳐버린단 말입니다. 바다의 물은, 골짜기의 물이든 연못의 물이든 빗물이든 구정물이든 핏물이든 고름물이든 다 수용을 합니다. 말없이 말입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도 폭넓고 지혜롭게 정신계와 물질계를 포함해서 바로 중용을 할 때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인간이 이렇게 자유롭고, 이렇게 성스럽고,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하는 느낌을 느끼면서, 허망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무상함을 생각하게 되며 몸은 흩어졌어도 영혼의 근본은 흩어지지 않으니 우리가 살아나가면서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말하느냐,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모습이 바꿔질 뿐이지 영원한 것입니다. 그 영원한 우리의 삶이 이 몸뚱이가 죽으면 죽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닙니다. 모습만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주어질 뿐이지 영원한 것입니다. 주인공이 뿌리라면 그 뿌리를 통해 사대육신이 움죽거리게 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오장육부와 삼백육십의 골절과 팔만 사천의 털구멍을 통해서 삼백육십의 뼈마디와 팔만 사천의 세균, 즉 몸속에 자생 중생들이 각자 여러분의 신하가 돼서 자유스럽게 들고 나면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서 에너지는 한 구멍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또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네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이 자기 영혼에 한데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영혼의 근본이 아버지에겐 뼈를 빌리고 어머니에겐 살을 빌려서 정자 난자를 통해서 형성이 됩니다. 형성이 돼서 임신이 됐을 때는 그 조그마한 세균 하나에 보이지 않는 인과가, 즉 말하자면 악업 선업이 한데 뭉쳐서 자라고 있습니다. 자라는 대로 그게 화해서 이 몸뚱이 하나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러분이 ‘나는 무슨 죄를 졌나. 나는 무슨 업이 많아서 이런가.’ 하시지만 내가 볼 때는 딱하긴 딱하지만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에 나오는 것이니 바로 그것이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업식으로 하여금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더 잘 아시겠죠.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든, 어떠한 용건에 따라서든 병고다, 액난이다, 화가 난다, 짜증이 난다, 영계성이 생긴다, 세균성이 생긴다, 업보성이 생긴다, 인과성이 생긴다 하는 것도 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지금 현실에 나오는 것입니다. 나오는 것이 어떻게 해야만 없어지겠습니까. 그 나온 자리에다 되맡겨 놔야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자기 나온 자리는 바로 통신처도 되고 생산처도 되고, 여러 가지 무명을 녹이고 업보를 녹이고 모든 일체 만법의 근원을 우리가 되찾을 수 있고, 내가 어디서 나왔는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알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구멍이 아니면 어떻게 면제될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뿌린 거는 내가 받듯이 내가 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해결을 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입력된 것이기 때문에, 즉 정신계에서 입력이 된 것이기 때문에 정신계로만이 그것은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근본이 없으면 생각을 낼 수가 없고, 생각을 낼 수가 없으면 목석이고, 몸을 움죽거릴 수가 없으면 무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이란 바로 각자 여러분의 뿌리이며 말 그대로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이 없다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잘해야 할 것도 없고, 못한 것도 없습니다. 빌어먹는 건 기복인데 빌어먹어서 될 일입니까? 문간에 서서 농사 지은 것 좀 달라고 한다면, 그저 한 술 걸리면 얻어먹고 한 술 걸리지 않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농사 짓고 내가 추수를 해서 내가 먹는 것은 당당히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습니다. 주인공은 에너지요, 시공을 초월해서 화해서 돌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고 여러분 자체가 주인공인 것입니다. 자기가 벌여놓고 자기가 행하고, 자기가 말썽 떨고, 자기가 구덩이에 들어가서 구덩이에서 나오려고 울고불고하면서 누구 탓을 합니까.
그러니까 자기 주인공에 오직 몰두하려는 큰 용단과 신심, 용맹심을 일으켜서 일체 만법과 또는 만물의 활용을 여러분 각자가 들이고 낸다는 사실을 단호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이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혼의 근본이다 하면, 근본이라는 것은 에너지요, 영혼이라는 것은 그 에너지를 담아 가지고 있는 통과 같습니다. 그 통은 마음을 내게 하되 마음을 어떻게 내라 하는 것은 없습니다. 마음을 내게 하되, 마음은 또 자기 몸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몸을 다스리는 데는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팔만 사천의 몸속에 있는 자생 중생들이 나의 마음의 신하가 돼서 움죽거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이 말입니다, 업으로 인해서 자기가 지은 대로 나오는 거에 속아서 자꾸 떠벌이고 해서 되겠습니까. 자기 속에서 보는 거와 듣는 거와 냄새 맡는 거와 감각 지각을 모두 소유하고 있기에 나오는 것이 잘된 건가, 안되는 건가 안팎을 다 판단해 보고 생각을 해서 ‘잘못된 것도 그 속에서 나온 거니까 잘되게 하는 것도 너밖에 없어.’ 하고 거기다 맡긴다면 정신계로 직접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무명도 업보도 다 제거하는 직결문입니다. 마음이 편안한 살림살이를 가져오는 직결문입니다. 생명의 수명을 좀 길게 한다거나 짧게 한다거나 그런 자유로운 마음도 역시 거기만이 직결문입니다.
이 직결문을 두고도 ‘아이고, 나는 죄가 많아서, 나는 뭐가 어떻고, 이런 거는 안되고, 이런 거는 되고….’ 하는데 그건 여러분의 습관 때문이고 살아온 관습 때문입니다. 마음이란 체가 없어서 우주 바깥에도 한 찰나에 갔다가 올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 앉아서 여러분의 가정에 한번 다녀와 보십시오. 뭐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도 다 알고 어디에 뭐를 감춰 놓은 것까지도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오늘 무슨 반찬을 해 놓고 왔는지도 보고 올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이 지구 바깥은 못 벗어납니까. 여러분이 연못에서, 우물에서 ‘여기가 제일이다’ 이러고는 바다로 안 가는 것뿐입니다. 모습이 있는 거는 움죽거리는 대로 한계가 있지만 마음이라는 건 한계가 없는 겁니다.
아까 얘기하던 것 마저 해야죠. 에너지 주머니, 마음 내는 거, 마음내게 하는 거,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포함되어서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낼 때에 잘못된 거라면 ‘나는 모르지만 당신만이 올바르고 잘되게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놓고 또 잘되는 건 감사하게 놓아서 새 물로 바꿔 쓰란 말입니다. 안되는 거는 구정물과 같지만 체가 없는 거고, 되는 것도 체가 없어서 그것이 훌떡 돌아서 현실에 새 물로 바꿔 쓰게끔 나온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왜 자기 주인공을 믿지 못합니까. 영혼의 근본을 믿어야 마음을 내 주고 마음은 육체를 움직이면서 지혜를 넓히고 다스리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절간에 가 보면 소 고삐를 쥐고 소를 끌고 가는 형상을 보게 되는데 그게 마음 다스림을 표현한 겁니다. 마음 다스리는 법. 소 위에 올라앉아서 피리를 불고 가죠? 그 자체를 화엄경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왜 화엄경이라고 하느냐. 여러분이 지금 자기가 영혼의 근본을 짊어지고 생활을 하는 것이 피리 부는 소리거든요. 아시겠습니까? 피리를 불긴 불되 피리소리를 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묶어 놓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저 종소리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생활 자체도 잡을 수 없고,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면서도 아주 영원히 그대로 실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만날 허망하데요. 뭐가 그렇게 허망합니까. 이 세상에 걸망 하나 짊어지고 캠핑 나와서 한철 놀다가 가는데 자기가 어떠한 캠핑을 하고 가든지 그것은 여러분이 마음 다스리고 생활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시죠. 모두들 죽으면 그만이라고 그러지만 그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소같이 게으르게 살았다 합시다. 그런데 게으른 것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깨우쳐서 콧구멍이 막힌 소를 타고 다니면 소가 돼도 상관이 없는데 말입니다. 용도에 따라 생각해서 다스리고 나가지 않고 몸뚱이가 게을러서만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정신력이 게으른 것도 좀 생각해 볼 점이 있지 않으냐 이겁니다. 생각을 안 하고 이 도리를 모르고 진리를 파악 못하고 얻어먹으려고만 그러고, 자기가 생산해서 먹으려고 생각을 안 하니까 마음의 발전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요 다음에 죽어서 뭐로 태어나느냐 하면 소로 태어나게 돼 있어요. 미련하고 게을러서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그랬으니까요. 그리고 망종스럽게 개처럼 살았다면 개 모습을 또 쓰고 나오고 독사같이 살았다면 독사 모습을 해 가지고 나올 것입니다.
그렇듯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소로 태어났든 개로 태어났든 독사로 태어났든 간에 약간은 들어 있거든요. 사람의 의식이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는 아무개’라고 짖어도 사람들은 모릅니다. 또 그 개도 자기가 개라는 걸 모르니까 알리려고 짖을 수밖에요. 그러고는 내가 이렇게 했는데 하면서 막 짖어대요. 그런데 말입니다, 의식은 사람이라 해도 개 모습이니까 개 대접밖엔 못 받아요. 개 대접밖에 안 해 줍니다. “이놈의 개! 왜 이렇게 짖어?” 그러고 말입니다. 아는 소리를 하느라고 짖어도 “이놈의 개! 왜 이렇게 짖어? 배가 고픈가 봐.” 하고 딴소리나 하고 개 대접을 하게 돼 있죠. 그런데 개, 독사, 소뿐이겠습니까? 그렇게 살면서 독사의 습이 생기고 개의 습이 생기고 소의 습이 생겨서 영 길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천 년 만에 한 번 물 위에 뜬 구멍 뚫린 뗏목 하나 만나기처럼 극히 어렵다 한 것이 그 뜻입니다.
여러분! 말로만 배우려고 하지 마시고 요만한 것이라도 실천을 하고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하시고 가신다면 아주 훌륭한 실행이 나오고 능력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이거를 말로 배우려고 그런다면 몸 떨어지면 말 떨어지고 입도 떨어져요. 그러니까 아주 소용없는 거죠. 여러분의 진실한 생각이 만물을 창조해 낼 수도 있고 가정을 발전시킬 수도 있고 또는 국가에 보탬을 줄 수도 있고 모든 만 국민들에게 은혜를 갚을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지수화풍으로부터 곤충에 이르기까지 내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고 그 곤충으로부터 인간까지 부처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니다 하신 겁니다. 여러분의 오장육부를 보십시오. 중생과 부처가 둘이겠나. 그 자생 중생들을 마음으로 다스려서 천백억 화신으로 화하게 만들어 놓는다면 바로 삶의 보람이요, 자유인이요, 부처요 진정한 만물의 영장도 될 수 있고 이 세상을 모두 한 주먹에 넣고 자유자재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마음을 소중히 생각 안 하고 아무렇게나 헌 걸레처럼 써요. 어떻게 마음을 그렇게 씁니까. 마음을 그렇게 쓰니까 말도 함부로 나가죠. 자식이 일 주일째 안 들어오고 속을 썩이고 바깥에 나가서 일을 저지르니까 “그놈의 새끼, 벼락도 안 맞어. 그냥 차에라도 치여서 죽지.” 이러고 욕을 한단 말입니다. 그게 보통일 겁니다, 아마. 무슨 원수로 태어나서 그러냐고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업은 더 두터워지게끔 돼 있습니다. 끼리끼리 만나게 됩니다. 상점에 가면 배는 배대로 놓여 있고 사과는 사과대로 놓여 있고 금은 금대로 놓고 넝마는 넝마대로 놓고 무쇠는 무쇠대로 있습니다. 세상을 보세요. 사람들도 정치인은 정치인들대로, 공업 계통은 공업 계통대로, 천문학 계통은 천문학 계통대로, 물리학 계통은 물리학 계통대로, 과학 계통은 과학 계통대로 스스로 자기네들끼리 인연에 따라서 모이게 돼 있습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이 부부 인연을 맺는 것도 자식 인연을 맺는 것도 부모 인연을 맺는 것도 그러합니다. 끼리끼리 모이는 것입니다. 그거는 억지로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사는 대로죠. 자기가 마음이 금이면 금방에 모일 것이고, 자기가 마음이 걸레라면 걸레끼리 모이고 깡통끼리 모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깡통끼리 모이게 되면 조금만 건드려도 ‘덜러덩’ 조금만 건드려도 ‘덜러덩’, 꼭 수라장 같죠. 집안이 혼동스럽고 들어가기만 하면 벌써 문 바깥에서부터 상이 찌푸려지죠. 요만한 거 하나 가지고도 문제를 삼아 가지고 말입니다. 그렇게 끼리끼리 모이는데 어떻게 업보를 다 없애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업보를 짊어지고 나온 자리에다 되넣는 겁니다. 짊어진 것 없이 짊어진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업보가 나온 자리에다 되입력을 해서 넣으면 입력하는 대로 앞서 입력된 것이 그냥 솔솔 무너져 버립니다.
내가 여러분한데 이보다도 더 자세한 얘기를 해 드릴래도 여러분은 살아나가는 얘기로만 짐작을 하지 그 외의 건 얘기를 해도 못 알아들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가정, 몸, 사회 이런 걸로부터 알아 가지고 체득을 하시란 말입니다. 우리가 보람을 느끼고 영원하게, 저 나무 한 가장구를 봐도 ‘너는 어떻게 지냈어?’ 하고 서로 통하고 재밌게 살 수 있는 건데, 산에 올라가서 좋은 꽃만 보면 그냥 꺾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너무 잔인하게 자기 생명을, 자기 목을 가차없이 꺾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나는 우는 걸 봤습니다. 꺾으니까 진이 쭉 흐르는데 그게 인간의 피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 놓고 보는 것이 아름답지, 꺾으면 조금 있다가 시들 것을 그렇게 꺾어서 뭘 합니까.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그런 것뿐만 아니라 모든 자체가 다 그래요. 한번 걸망 짊어지고 한철 나러 왔다가 그저 인연에 따라서 모여 살다가 인연 따라서 또 헤어질 거를, 헤어져서 또 다른 구름과 같이 모여서 이 세상에 또 나오고 그럴 거를 그렇게 아귀다툼을 하고 놀러 다닐 필요가 뭐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한철 캠핑을 와서 같이 바깥에서 만난 인연들입니다. 하루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놀다가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아요. 인생살이가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그렇게 짊어지고 다녀야만 하겠습니까. 마음의 양식이 있다면 우리는 남한테 꾸러 다니지 않고 무겁게 짊어지지 않고 도둑 올까 봐 겁내지도 않고, 강도 들어올까 봐 걱정하지도 않고 인명피해 될까 봐 걱정하지도 않고 아주 발랄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굶는다 하면 어디서든지 또 오게끔 돼 있거든요. 왜냐? 내 몸뚱이 속의 신장들이 자기 굶기려고 안 가져오겠습니까. 여러분 몸뚱이는 여러분 자생 중생들의 집합소예요, 집합소. 집합소에서 ‘나 배 고프다’ 하면 꼭 심부름을 해 줘야 되거든요. 입을 빌려 주고. 그러니까 여러분은 잘 생각하셔서 불교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불교라는 것은 대명사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불교다 하면은 전체 곤충에 이르기까지, 풀포기 하나까지 생명이 있는 것을 불(佛)이라고 합니다. ‘불’이라는 것은 불바퀴가 크고 작은 것이 돌아가는데 전체 불바퀴가 또 돌아가는 게 있거든요. 그래서 불바퀴는 생산처도 되는 것입니다. 생산처. 그리고 ‘교’라는 건 여러분이 보이는 데서 말로 전달을 하고 듣고 또는 마음과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데서 전달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런 나무들은 서로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되는 거거든요. 우리도 그거를 알아야 됩니다.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말없이. 말없이 다스리는 오장육부의 모든 생명체들이 의식을 통해서 내가 마음먹은 대로 듣고 있다는 얘깁니다. 내가 도둑질을 하러 가겠다 한다면 도둑질을 하게끔 그냥 따라 주고, 내가 좋은 일을 하겠다 한다면 좋은 일을 하게끔 또 따라 줍니다. 그러니까 악도 선도 그 자리에서 나옵니다. 내 마음먹은 대로, 요구하는 대로. 시장에 가셔서 여러분이 달라는 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은 주지 여러분이 달라 하지 않는 것도 그냥 우정 맡깁디까.
여러분이 달라는 대로 주는 겁니다. 오장육부 시장에서는요. 그러니 나쁜 거를 달라고 하든, 좋은 거를 달라고 하든, 금방 쓰고 없어질 걸 달라고 하든 그건 상관이 없어요. 달라는 대로 그냥 주는 거니까요. 어떤 때는 참 안타까울 때가 있는데 눈은 왜 뚫어 놨습니까! 귀는 왜 뚫어 놨습니까! 어떤 분들은 “스님, 아니 이렇게 가게가 안될 수가 없습니다. 망했습니다. 어떻게 잘 좀 해 주실 수 없습니까?” 하고 말하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나한테 말할 게 아니라 귀가 있고 눈이 있고 두뇌가 있으니 지금 시점에서 될 장사인가를 봐야 하고 자리가 그 물건에 해당이 되는가도 봐야 하고 또는 지금 빨리빨리 소비가 될 수 있는 물건인가, 그 동네는 어떠한 가를 잘 살펴서 해야지, 가게를 내놔도 빨리 빠지기도 하고 또 잘되기도 하고 이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거를 생각 안 하고 빚이라도 얻어서 아무 데나 덜컹 얻어 놓고 물건하고 상관이 없이 그러니까 망할 수밖에 없죠. 그러니 자기네들이 해 놓고 그렇게 밝지 못하게 사니 고생을 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누구한테다 한탄할 게 하나도 없고 여러분이 각자 좀 더 마음으로서 믿고 다스려서 나를 좀 계발시켜서 지혜를 넓히고 삶의 보람을 찾고 화목을 찾고 진실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진실하게 살아도 얼마 놀지 못할 거를 허망하게 나를 아무렇게나 굴려서 재미있게 못 살지 말고 재미있게 살 생각들을 하세요.
내가 여직껏 설법한 것을 아신다면 실험을 통해서 실천을 한번 해보는 것이 바로 경험을 얻을 수도 있고 체험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떠한 거든지 그렇게 실험을 통해서 생활 속에서나 나가서 과일을 사든, 시장을 보든, 누구하고 만나든, 누구하고 어떠한 싸움을 하든, 말다툼을 하든 내가 지금 여기서 말씀해 드린 대로 실천을 한번 해 보시면서 실험을 해 보세요. 그러면 체험이 꼭 될 겁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물과 바람과 흙과 불이 뭉쳐져 있고 우리가 또 그것을 먹고 삽니다. 그리고 곤충에 이르기까지, 풀 한 포기까지 이 지구에 붙어서 사는 한 지구도 우리의 수명과 같습니다. 좀 빠르고 더디고 이럴 뿐이지. 그러니까 그대로 부처님 법이며, 우리의 생활이에요. 우리는 우리 마음으로서 발전을 하고 계발을 하고 창조력을 기르고 그렇게 해서 삶의 보람을 느끼라는 거지, 어떻게 말로 산 사람들이 듣고 보는 것만 가지고 다라고 하겠습니까. 물질세계의 50%만 가지고 그러지 말고 물질세계의 50%에 정신세계의 50%를 충당한다면 100%로 중용을 하면서 창조력을 기르면서 얼마든지 자유스럽게 보람을 느끼실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법이 그렇게 단순하고 기복으로 목탁이나 치고 복 달라고 비는 것이 불교가 아니에요. 불교라는 것은 어느 한 군데 국한돼 있는 게 아니고, 불교라는 것은 전체 진리인 것이며 생명은 근본이요, 하다못해 풀 한 포기도 생명이 존재하니까 불이죠. 교라는 것은 전체가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되고 통신과 통신이 전달이 되고 말과 말이 전달이 되는 것이 바로 ‘교’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서 사랑을 하면서 잎이 푸르고 꽃이 피어 열매가 열리고 그 열매는 다시 또 씨가 되어 그 씨가 또 열매가 되어서 다들 먹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 바로 그 원리입니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성 원리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상대성으로 서로가 서로를 전달하면서 이렇게 살아나가는 것이 불교이자 불법입니다. 그러니까 지구가 버스라면 버스 안에서 걸상 하나 가지고 내 종교니 네 종교니 하고, 내 거니 네 거니 하고 그러지 맙시다. 자기 자신들을 발전시켜서 정신세계에서 물질세계로 나오고, 물질세계에서 정신세계로 들고 양면이 같이, 정맥 동맥이 돌아가듯 이렇게 같이 끊임없이 초월해서 돌아간다는 이 사실을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69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0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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