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잘못 쓰여진 문장들을 읽고 있다
라쇼오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앞의 살인 사건 현장의 세 주인공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관심’에 따라 사태를 왜곡하고, 사람을 의심하면서 그것을 객관이며 진실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왜곡과 의심의 뿌리는 깊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 환망(幻妄)의 오염을 피할 수 없기에, 무시이래의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고도 부릅니다.
세계에 개입하는 자아 활동을 줄여야
이 말을 듣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아하,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간의 근본 진실과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을 반 너머 캐치한 것입니다. “나는 그동안 모든 것을 내 식으로 판단해왔다. 그 바탕에는 나의 존재를 보존 확장시키려는 무의식적 동기가 깊이 작용한 듯하다. 이제부터 나도 모르게 밴 나의 편견과 습관, 관심과 이해관계 등의 개입을 반성하고, 사태를 공적 지평에서, 전체의 관점에서 읽는 훈련을 해 나가야겠다.” 이렇게 작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붓다의 제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합니다. 세계에 개입하는 자아의 활동을 제어하고 통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깥의 영향력을 줄이고, 내적 자유의 폭을 확대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전통적으로 팔정도(八正道)로 알려져 있고, 또는 이를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으로 정돈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그 각각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혜’에 대해서만 논의하기로 합니다. 불교의 ‘지혜’는 가령 노장이나 유교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각자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성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경우 계율이나 선정이 지혜의 바탕이기는 하나, 지혜가 없이는 바라밀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 점을 소승의 아비달마, 그리고 대승의 반야중관은 한 목소리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연계가 있습니다. 콘즈는 그래서 아비달마를 ‘옛 지혜학파’, 반야중관을 ‘새로운 지혜학파’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아비달마의 오래된 지혜
소승 아비달마의 지혜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비달마는 “나의 것, 나에게 속한 것”이라는 ‘소유’의 환상부터 깨기 시작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속한다’가 객관 세계의 자연스런 속성이라고 했습니다만, 불교는 이런 말에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닭이나 소는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가 있다고 해서, 우주를 지배하는 특정한 인격이 꼭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스피노자는 만일 돼지들이 신을 생각한다면 그 신은 아마 돼지를 닮아 있을 것이라고 시니컬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소유’는 세계 자체에 속한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에 의한 강제입니다! 아비달마는 그래서 ‘나’로 시작되거나, ‘나’를 포함하는 모든 문장들을 잘못 쓰여진 것으로 판정합니다. 그것은 오류투성이의 작문과 같습니다. 그런 다음, 모든 문장을 ‘나’를 뺀, 순수 객관적 서술로 바꾸어 나갑니다. 그리하여 나(我)의 개입이나 오염이 배제된, 순수 객관적 사태들, 즉 제법(諸法)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우리는 가령 “나는 오늘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보냈다”는 문장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아비달마는 이것을 매우 부정확하고, 들뜬 문장이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고쳐줍니다.
1) “두 ‘물체(色)’가 있다.” 그리고 2) “사랑한다는 감정과 슬프고 아쉬운 감정(受)이 있다.” 3) “눈물을 흘리는 한 물체가 다른 손 흔드는 물체를 지각(想)한다.” 4) “떠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충동(行)’이 있다.” 5) “이 사건을 ‘의식(識)’하는 과정이 있다.”
사태를 객관적으로 적어나가는 기술
이렇게 아비달마는 자아에 의해 오염된 인식을 정화하여 객관적 사실만으로 분해 정리해 나갑니다. 앞의 글에서는 그 객관적 사실 가운데 ‘다섯 무더기’, 즉 오온(五蘊)만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비달마는 모든 주관적 판단과 상념들을 이렇게 객관적으로 분석해나가는 훈련을 시킵니다. 그건 흡사 ‘나’를 ‘타자(他者)’처럼 말하고 적는 기술(技術)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보고 웃는 사람도 있고, 참 드라이하다고 느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 봤자 아픈 상처가 어디 가냐고 비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 효과가 있습니다. 각자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픈 상처는 문득, 시간이 흘러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떠나보낼 때는 눈물이 강을 이루다가도, 곧 죽을 것 같다가도, 시간이 가면, 그 무모한 정열이 우스워 보이기도 합니다.
아비달마의 분석은 적어도 그 치유의 시간을 단축시키고, 실의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이 훈련이 깊어지면, 나중에는 사태가 생김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해방을 얻습니다. 아비달마의 분석은 무아(無我)를 각인시키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기 위한 지혜의 방편입니다.
이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문제를 ‘자기 밖에 두는’ 훈련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사물의 점착성으로부터, 그리고 자아의 과도한 준동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내적 평화와 유대를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실제 우리가 고민하고 안타까워하는 문제들의 상당 부분은 내 손을 떠나 있거나, 사소한 문제들이기 십상이지요. 문제의 7할은 쓸데없는 걱정이고, 나머지 2할은 내 손을 떠나 있고, 직접 이럭저럭 할 수 있는 일은 채 1할이 안된다지 않습니까. 거기 집중해서 할 바를 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잘 안 된다고요. 실제 고승들은 어떤 일의 충격이 잔류하는 기간이 아주 짧고 후유증은 거의 증폭이 안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 훈련이 효과가 있음을 증명하는 실례가 아니겠습니까.
처칠의 독백
어떤 문제에 부닥칠 때, 자아의 과도한 개입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빤히 보이는 적절한 길을 놓치고 사태를 걷잡을 수 없는 불행으로 몰아넣는 경우가 어디 한 두 번입니까. 특히나 정치를 맡은 사람들, 권력이 무거운 사람들의 결정에 있어 이 같은 ‘자기 비우기’는 결정적인 덕목입니다. 처칠은 ‘폭풍의 한가운데’서 아일랜드와의 조약을 마무리한 다음,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적과의 투쟁은 끝이 났다. 이제 남아있는 문제는 자신과의 투쟁뿐이다. 그러나 자신과의 투쟁만큼 어려운 싸움도 없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역사는 때때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이 바로 눈앞에 열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훨씬 나아 보이는 해결책은 그대로 내버려둔 채 그토록 느린 속도로 수많은 좌절을 겪어 가면서 한걸음 한걸음 힘들게 전진해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에 최선이라고 믿는 바를 위해서는 자신이 신봉하던 원칙까지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못을 박습니다. 이 충고를 남 위에 선자, 특히 정치하는 인간들은 가슴 깊이, 언제나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