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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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가난한 여인의 등불/이미령(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동냥으로 겨우 마련한 초라한 등불 밝힌 여인
정성 다해 ‘성불’서원…밤새 꺼지지않고 빛나

부처님 오신 날을 준비하는 기간 내내 저는 절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강의 시작하기 전 종무소에 앉아서 등을 달러오는 신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식구들 숫자를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등이 몇 개 필요한지 세어보는 이, 좀더 값이 싼 등이 없는지를 낮은 소리로 묻는 이, 절대로 둘째 이름이 맏아들 이름보다 먼저 적히면 안 된다는 이, 깜짝 놀랄 거금을 등 값으로 ‘쾌척’하는 이…. 부처님 오신 날을 즈음해서야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이겠기에 바라보는 재미가 꽤 컸습니다.
그런데 저는 즐겁고 기꺼운 마음으로 등을 접수하는 사람들 사이사이에 그리 밝지 않은 표정을 띠는 사람들을 종종 만났습니다. 그들은 종무소 직원이 접수하면서 “초파일에 절에 오셔서 법문도 들어 보세요”라고 권하면, 등 값만 받으면 되지 뭘 그런 주문까지 하느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등을 접수하는 짧은 시간 내내 그들의 모습은 마치 우는 아이 달래려고 마지못해 떡 하나 더 쥐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스님이나 절의 종무소 직원들에게 강제로 주머니를 털리기라도 하는 듯 등을 다는 것을 무척 억울해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액난을 당하면 허겁지겁 커다란 굿판을 벌이고 허리를 굽히면서도 무속인들을 비천하게 여기는 이중심리가 초파일 등접수처에서도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어김없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 어떤 절에서는 정성껏 내시라며 등값을 정해놓지 않기도 한데, 더 헷갈린다며 “차라리 등 값을 정해놓고 팔지…”라는 볼멘 목소리는 역시 터져 나옵니다.
찌푸린 얼굴로 절에 찾아와 마지못해 지갑을 열고 접수한 뒤에는 대웅전 문고리조차 잡아보지 않고 총총히 떠나는 ‘불자’들의 뒷모습을 보고 부처님은 어떤 마음이실까요?
초파일 연등과 관련해서 빠지지 않는 일화가 있습니다. 바로 거지 여인 이야기입니다. 동냥으로 입에 풀칠이나 하며 나날을 보내던 거지여인은 프라세나짓왕이 석 달 동안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옷과 음식과 침구와 약을 공양하였는데 그날 밤에는 또 수만 개의 등불을 켜 연등회(燃燈會)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하염없이 부러웠습니다.
‘나도 등불을 하나 밝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난 가진 게 하나도 없는데….’
결국 여인은 동전 두 닢을 겨우 동냥하여 등불을 밝힐 기름을 샀습니다. 여인은 그 기름으로 등불을 켜서 부처님이 다니는 길목을 밝히면서 “보잘것없는 등불이지만 이 공덕으로 내생에는 나도 부처님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밤이 깊어 다른 등불은 다 꺼졌으나 동냥으로 겨우 마련한 그 등불만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고 밝게 빛났습니다. 등불을 끄려고 애쓰는 아난 존자에게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부질없이 애쓰지 말라. 그것은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켜진 등불이다. 그러니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등불의 공덕으로 그 여인은 오는 세상에 반드시 성불(成佛)할 것이다.”
자기보다 하천한 여인이 겨우 등불 하나 밝히고서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프라세나짓왕이 한걸음에 부처님께 달려가 자기는 수 천 개의 등불을 켰으니 자기에게도 수기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으로부터 보기 좋게 거절당하였습니다. (근본설일체유부 비나야 잡사)
요즘 같아서는 거지 여인의 등은 정말 하잘 것 없고 초파일 당일에 법당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경내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냉대를 받다 버려질 게 뻔한 등입니다. 하지만 수 천 개의 등을 밝힌 왕도 받아내지 못한 당당한 보장을 부처님에게서 받아낸 등불입니다.
커다란 보시를 한 사람을 보고 한없이 기뻐하고 부러워한 그 마음, 하지만 자기도 할 수 있는 한 정성을 다해 보시를 하려는 결심, 그리하여 작은 등불을 밝히면서도 그 속에 담은 ‘부처가 되고 싶다’는 서원. 이 세 가지가 담겼기에 왕이 밝힌 수 천 개의 등불보다 더욱 빛이 났던 것입니다.
남이 하니까 따라서 등을 사고, ‘좋다니까’ 등을 달고, 정작 자기 자신이 가장 소망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고, 등을 왜 밝히는지 이유를 알아볼 마음조차 내지 않고, 값을 흥정하고 돈을 내밀고 장부에 기재된 것을 확인한 뒤에 총총히 떠나가 버리는 오늘날 불자들의 가슴 속에 거지여인의 등불이 빛을 비추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년 부처님 오신 날에는 모든 이의 등불이 거지여인의 등불처럼 이 침침한 사바세계를 밤새도록 환히 비추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0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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