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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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꺼지지 않는 마음의 인등을 밝히세요!
나부터 믿고, 믿는 마음서 물러서지 마세요!

마음의 등을 밝히려면…


해마다 초파일이 되면 색색깔의 등을 달아 어둠의 무명을 밝혀서 온 세상을 밝히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지만, 진정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등을 켠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사의 문제들이 더욱 힘들게만 느껴지는 현실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부처님께서 오신 참뜻을 새기면서 마음의 등을 밝힐 수 있는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작년 초파일의 오늘이나 내년 초파일의 오늘이나 삼천년 전 오늘이나 똑같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영원한 오늘입니다. 올해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또 한 번 다지고 다져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금 질문하신 분 말씀처럼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면서 우리가 어떠한 생각으로 이날까지 왔으며 우리가 항상 마음의 인등을 켜면서 꺼지지 않도록 하고 왔던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영원한 하루하루의 오늘을, 우리가 일 년을 하루로서 축소할 수 없다면 하루를 일 초로 축소할 수 없다는 그 점을 여러분은 잘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도리를 알지 못하면, 우리가 지금 더불어 부처님 오신 날을 계기로 삼아서 마음과 또 말과 뜻을 한번 다져 보는 데 역점을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국가와 사회 또는 가정, 그리고 조그맣게 말해서 우리를 위한다면, 또는 우리가 조화를 이루고 승화시킬 수 있는 길이라면, 발전할 수 있는 길이라면 어떻게 해야만이 발전이 되며 승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을 한번 다져보는 초파일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승화시키고 발전하며 조화를 이루면서 태평을 가져오고 국태민안을 가져올 수 있는 문제, 항상 얘기했지만 전력은 언제나 발전소에서 용도에 따라서 항상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설이 본래 돼 있는 탓으로 우리는 용도에 따라서 언제나 쓸 수 있듯이 지금 우리나라의 일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또 국태민안을 가져오게 하려면 용도에 따라서 씀씀이를 쓸 줄 아는, 그러한 한생각을 낼 수 있는 용도, 바로 활용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잘돼서 넘어갈 수 있다면 조그마한 데서부터 큰 데까지 승화시킬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그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올해도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서 다지고 또 다지고 또 다져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그런 여건을 우리 자신들이 자유스럽게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앞으로 또 본다면 경제가 안정되고 또 사람들의 마음이 한데 뭉쳐서 한마음으로서 서로 통하고 한자리를 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어떠한 문제라도 타개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주어지는 겁니다.
예전 시대 모양으로 몸뚱이가 나서서 하는 것은 이 시대에 맞지 않다고 봅니다. 한생각을 해서 어려움 없이 타개할 수 있고, 어려움 없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고 발전할 수 있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그런 마음과 더불어 향을 낼 수가 있고, 또는 한생각을 하면 법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열매를 맺게끔 할 수 있는 맛을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앞날에 있어서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항상 등불을 켜는 이치가 초파일로 인해서 봉축을 하면서 등불을 켜게끔 돼 있나를 상세히 생각해 봐야 될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한마음으로서의 불빛이 항상 꺼지지 않도록 인등을 켤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전력을 꺼내서 빛으로나 광력으로나 얼마든지 활력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고, 그 뜻을 가지고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참선이며 그것이 바로 진리이며,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의 활용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승화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 길이며, 우리 생각에서 나오기 때문에 끈적끈적하게 끊어지지 않는 진리가 아닌가 봅니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수 없었다면 지금 무엇이 됐을까, 어떻게 하고 있을까 이런 거를 한번 생각해 보셨는지요. 우리가 잘하든지 못하든지 생각할 수 있다는 이 점이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그럼으로써 우리가 앞으로 어떠한 문제가 온다 하더라도 타개할 수 있는 마음의 여건이 꺼지지 않는, 즉 에너지가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는 자가발전소가 돼서 그 전력은 나의 씀씀이에 의해서 스스로 나오게끔 돼 있는, 무궁무진하고 광대무변한 불성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조그만 거든지 큰 거든지 한번 스위치를 올리고 내린다면 역력하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어떠한 일이 다가와도 걱정이 없다고 봅니다. 여러분 마음의 불이 켜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음의 불이 켜져 있기 때문에 승화시킬 수 있고 경제를 타개할 수 있고 앞으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그런 여건이 되며, 통일도 할 수 있는 문제가 다가오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우리는 안팎이 맞아야 되듯이, 삼위일체가 맞아야 되듯이 우리가 주인과 나그네가, 즉 말하자면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게끔 돌아갈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나라의 여건이 주어져 있고 또 여건이 맞아서 우리 국민과 더불어 같이 한마음이 될 때에는 스스로 스스럼없이 평화를 가져올 수가 있고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등불을 언제나 꺼뜨리지 말고 주인공이라는 자재력을 그대로 키울 수 있는 그런 여건을 가지세요.
그래서 올해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영원한 날이라고 생각했을 때, 무조건 여러분이 영원한 날이라고 이론으로만 생각하실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영원한 오늘임을 믿으세요. 물질은 변천하지마는 우리의 마음은 절대로 변천할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어디가 어떻다고 하더라도 한생각을 급하면 급한 대로 마음을 내어서 국가가, 사회가, 가정이, 내 몸이 건전하고 건실하고 고에 끄달리지 않고 광명으로서의 우리나라가 부흥하고 우리 민족이 편안하고 어떠한 여건에 의해서도 단호히 물리칠 수 있는 그러한 것은 둘이 아니기에 물리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어디로 가게 될까요?


현대불교신문을 통해서 좋은 법문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 이제는 육신의 옷을 벗어야 할 시기가 되고 보니 내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평생 꽃 한 송이도 허투루 꺾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아무쪼록 생을 마무리하는 이 시기에 삶을 복되게 할 수 있는 한 말씀 해 주신다면 감사히 받아 지니겠습니다. 가르침 주심에 거듭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그 도리를 알지 못하고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실 겁니다.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가는데 어질게 생긴 큰 눈에 눈물을 흘리면서 소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걸 보았습니다. 근데 그걸 보면서 나는 그 소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보고 나도 울었습니다. 금방 그 소는 모든 무명을, 소의 무명을 벗고 그 의식을 내 가슴에다 모두 안아 주니까 내가 돼 버렸습니다. 내가 돼 버리고 그 소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그랬으니 한 찰나에 바로 못난 이 사람이 된 거죠.
그 눈이 참 그렇게 어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네 고기는 남의 약이 되지마는 네 마음은 바로 내 마음이니 네 몸은 모든 사람들에게 약이 돼 줘라. 그리고 네 마음은 내가 되면 되지 않겠니.’ 이렇게 해 놓고서는 거기서 한 바퀴 굴려서 내놨으니깐, ‘너는 그렇게 어질고 착한 것이 어쩌다가 소 옷을 입어서 남들이 부리고 때리고 채찍으로 치게끔 돼 있었니?’ 하고 불쌍히 생각했습니다마는, 그 소가 둘이 아닌 까닭에 언제나 그저 각각 보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온 것을….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애기를 못 낳는다고 달라고 그랬어요. 그걸 한번 생각을 해 봤는데요, 열 달이 되니까 아주 아들을 떡두꺼비같이 어질게 낳았거든요. 그러니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하는 거는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아신다면 과거는 지금 짊어지고 나왔으니까, 컴퓨터에 입력이 돼서 지금 짊어지고 나왔으니깐 없고, 미래는 아직 가지 않았으니깐 없을 테고, 현실은 자꾸 돌아가니깐 그저 한마음이죠. 그저 자꾸 돌아가니까 공했느니라 한 겁니다. 그냥 아주 없어서 공한 게 아니라 자꾸 들어갔으니까.
그것도 궁금하실 게 없어요. 그게 궁금하시거든 내가 지금 어떡하고 살아가고 있나 하는 그것만 아시면 어디로 갈 걸 다 아실 겁니다. 그리고 꽃 한 송이도 허투루 꺾지 않고 살아오셨다면 좋으신 데로 가시겠군요. 그래서 과거에 사신 거는 현실이고 지금 현실에 사시는 건 미래일 것입니다. 그러니 좋으실 테죠.

한 발을 내디디려면…


스님, 어떤 사람이 밝은 경지를 체험했는데 거기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내다가, 또 머무르지 않으려는 마음 속에서 또 다른 생각이 나오니까 그걸 의심하다가, 한 발 내딛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하면 다시 어떻게 해야 한 발을 내디딜 수 있겠습니까?

이 공부는 한 발을 내디딜 것도 없고 들이디딜 것도 없는 공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경지가 이만하면 됐다, 또는 내 경지가 이만하지 못하다 이러한 생각까지도 놔야 됩니다. 공부라는 것은 참 엄청난, 따지고 본다면 너무 엄청난 공부입니다. 정말이지 모든 우주의 혹성들이나 별성들도 다 왕래할 수 있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한생각을 해서 한다면, 정말 지진이 나는 것도 어떤 때는 만약에 나라면, 이 땅도 전부 생명이 있는 겁니다. 전부 세포가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통신이 되고 모든 것이 내가 될 수 있는 문제죠.
그러니까 공부라는 거는 그렇게 한 발 디뎌 놓는 게 공부가 아니고 한 발 내려놓는 것도 아니고 또 내 경지가 이만하다 하는 것도 아니고 저만하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기가 자기를 발견했으면 내가 내 소릴 들었을 때에, 내 소릴 듣는다면 그때서부터 실험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둘 아닌 실험! 실험으로 들어가는 거죠. 육조 스님도 16년을 그렇게 실험했고 달마 선사도 9년을 면벽을 하면서 실험을 했습니다. 각자 조사들도 그렇게 했죠.
그런데 지금 어떤 분들을 가만히 보면요, 한 소식 얻어 가지고선 실험도 하지 않고 갓난 어린애를 낳아 놓고 키우지 않는데 어떻게 사회인이 됐겠습니까? 갓난 어린앨 나았으면 길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배우고 길러야 되죠.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한 소식 얻었다고 그냥, 즉 말하자면 경서하고 한데 합쳐서 그게 통했다고 하다가 보면 한계가 생기죠. 한계가 생기면 그 경서를 보지 않고는 도대체 설법이 나가지도 않죠. 설법이 나가지도 않는 반면에 그게 그냥 법이 안 되고, 법설이 안 되고, 한데 떨어지는 거죠. 예를 들어서 설법을 한대도, 말없다 하더라도 그게 충전이 되게끔 하는 거죠. 충전이 되면서 그 말도 하면서 그렇게 나가는 거지 말만 하고서 이론으로 또 떨어진다면 그 사람들한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과 더불어 같이 이렇게 충전이 되면서 전기와 광선 자력도, 자력은 무한의 자력이며 자석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력도 자가발전소라야지 자가발전소가 아니라면 전기가 나갔다, 꺼졌다, 고장 났다 이런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의 전력이라는 것은, 자가발전소라는 것은 꺼지고 켜지고 이런 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하시는 데는 무전통신기도, 지금 요런 데서 그냥 무전통신을 하는 게 아니라 전체 어디고 생각했다 하면 가고 오는 사이 없이 가고 오고 통신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미국엘 가서, 내가 통했다면, 난 통하지도 못했지만 말입니다. 미국에서 만약에 “스님! 지금 이러이러하니 어떡했으면 좋겠습니까. 나 좀 살려 주세요.” 할 때 어떻게 가야 되겠습니까. 뭐 여권 받고 비자 받고 하려면 벌써 죽은 뒤에 가야죠. 그러나 마음은 빛보다 더 빠르기 때문에 거길 그대로 그 당시에 그냥 가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치신 그 뜻은, 49년을 설했고 행으로 보여 줬고 그랬는데도 우리는 그 뜻을 모르고 항상 무슨 크니 작으니, 여자니 남자니 하면서 논설이 붙고 투기를 하고 질투를 하고 아집을 가지고 온통 그러는 거예요. 왜냐? 모든 것이 벌레하고도 나하고 도반인 줄 알아야 된다 이거죠. 여러분이 모두가 부처인 것으로 볼 줄 알아야 된다는 얘기죠. 왜냐하면 나는 높고 너는 얕다 이런다면 벌써 그건 글렀습니다. 왜 똥 친 막대기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부처가 어떤 거냐고 하니까 그렇게 말씀하셨듯이, 또 여러분의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에 부모라는 이름만 가졌지 그게 심부름꾼이지 부모입니까? 그러니까 그와 같다는 얘기죠. 그런데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에 어려서 유리창을 깨뜨려도 아이 부모가 물어줘야죠, 부모의 책임이니까. 그와 같이 언제나 한 발 내려디뎌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붙을 자리가 없는 이유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업보도 지은 게 없고 원죄도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붙을 자리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르침 주십시오.

우리는 지금 찰나에 이렇게, 우리가 지금 땅에 발을 붙이고 산다 이러지만 그 사는 게 지금 고정됨이 없이 막 찰나찰나 돌아갑니다. 그걸 표현할 때, 아버지가 됐을 때는 의연히 아버지 노릇을 합니다. 그런데 “여보!” 하고 아내가 부를 때는 의연히 남편 노릇을 합니다. 그렇게 돌아가다가 “얘, 아무개야!” 하고 부모가 부를 때는 의연히 자식 노릇을 합니다. 이렇게 찰나찰나 돌아가는 이치 속에서 그 마음은 체가 없어서 그저 찰나찰나 돌아가는 이 판국에 거기 업보 붙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업보가 있다 하면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서 ‘나는 업보로 인해서 이렇다!’하니까 업보가 붙는 거지 업보는 붙을 자리가 없는데 거기 어떻게 업보가 붙습니까? 과거는 바로 현재에 짊어지고 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현재에도 공해서 돌아갑니다. 그런데 거기 업보가 붙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또는 죄 붙을 자리도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것에 끄달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그런 데서 끄달린다면 바로 차원은 3차원의 차원도 4차원의 차원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 업보가 붙을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아시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내놔 보십시오, 거기 붙을 자리가 있나. 금방 아버지 노릇 하고 금방 남편 노릇 했는데, 방귀 뀌면 뿡 소리는 났는데 도대체 간 곳이 없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 병 붙을 자리가 없다 하는 것을 완전히 터득을 하시고 물리가 터지시려면 나부터, 나부터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나부터 믿고 믿는 마음에서 물러서지 마시고요. ‘주여, 잘해 주십시오.’ ‘부처님이여, 잘해 주십시오.’ 이럭하면 벌써 둘이 돼요. 그러면 그 업보가 붙게 되는 거죠. 일체를 그 자리에서 한다는 믿음과 더불어 모든 생명들과 둘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도를 구하고 있는 건가요?


참다운 공부를 하려면 젊은 나이에 삭발염의를 하고 출가를 해야만이 된다고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의 도리를 실천해 나가다보니 실질적으로는 절에 안 들어가도 제 스스로 지금 도를 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소견이 올바른 것인지 가르침 주십시오.

그 도리를 제대로 알면 됩니다. 그런데 처자식을 자기가 인연지어 놓고 그것도 버리고 먼 데 가서 좋은 거 찾자고 가는 것도 자기 마음이 잘못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왜 머리를 깎느냐. 승복은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무(無)의 세계와 유(有)의 세계를 한데 합친, 바로 중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순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승복 색깔이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고, 머리를 깎은 거는 이 세상, 어지러운 무상한 세상을 깎아 버린 겁니다. 무상하다 하는 거는 무상한 것을 구태여 그렇게 놔 둘 필요가 있나 해서 그냥 깎아 버린 겁니다. 그걸 수효로 헤아릴 수도 없죠. 그런데 우리가 왜 입산을 하고 그러느냐. 여러분보다 우리가 위대하죠. 왜 위대하냐. 높고 낮음은 없지만 높은 건 높고 얕은 건 얕죠. 평등하지만 너는 너고 나는 나인 거죠. 그런 관계상 우리는 가정을 버리고, 형제를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탁 나와서 입산한 것만 해도 여러분보다 90%가 위죠.
또 하나, 둘째로는 모르는 중생들이 벌써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은 사람을 보고 “스님! 날 좀 구원해 주시오.” 하지, 아니 승복도 입지 않고 머리도 안 깎고, 공부를 했다고 그래도, 공부 못 한 사람들도 그걸 볼 줄 알면 꿰게요? 자기네들하고 똑같은데 거기 가서 나 좀 구원해 달라고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중생을 건지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천체를 구하려면 법을 구하고, 또는 이 세상의 중생들을 제도하려면 보이는 데 방편으로써 이렇게 깎아야 되고, 우리가 공부하려고 깎아야 되고, 나중엔 알아 가지고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또 기르지 못하고. 그러니까 중 되기가 점점 갈수록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은 모르실 겁니다.
그러니 잘 생각하세요. 자기 몸뚱이가 화두요, 자기 몸뚱이가 움죽거리는 게 바로 보현이요, 자기가 생각 내는 게 법신이요, 자기가 가만히 앉았는 게 부처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어떤 분들은 세속에서 움직이게 되면 자연히 죄를 낳는다고 하면서 산 속에 들어가서 살아야 된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다 하면서도 함이 없이 하는 것이 바로 죄를 안 짓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오든 지금 발자취를 짊어지고 가고 오십니까?
그래서 차와 운전수와 기름을 비유하자면, 차는 여러분의 몸과 같고 운전수는 여러분의 마음과 같고, 기름은 여러분 낳기 이전, 즉 말하자면 주처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불성입니다. 불성으로 치면 됩니다. 탁 붙이면 불이 번쩍 일어나듯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차와 운전수와 기름과 그렇게 배합이 됐다는 얘깁니다. 그게 화두예요. 그리고 그거를 화두라고 알면 그냥 우리 살림살이가 참선이구요. 그래서 생각이 있으면 나는 조용하게 좀 앉아 있고 싶다 그러면 앉아 있는 거고, 내가 서서 좀 명상하고 싶다 그러면 명상하고, 졸립다 하면 자고, 똥 누고 싶다 하면 똥 누고…. 아, 그런 게 그대로 여여하니, 그게 삶이요, 그게 참선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부활절에 대해서


다빈치 코드라는 책을 보다가 부활절의 의미가 궁금해서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부활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축제일로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달걀에 서로의 소망을 담은 정성스런 그림을 그려 서로 교환하는 의식을 행한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키고 있는 부활절은 춘분(3월 21일경) 후의 최초의 만월 다음에 오는 첫째 일요일이어서 보통 3월 22일부터 4월 26일까지 지켜진다고 쓰여 있더군요. 참으로 의아한 게 서양 사람들이 양력도 아니고 음력을 기준으로 해서 정확한 날짜도 없이 나라마다 종파마다 해마다 다른 부활절을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리의 차원에서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죽고 태어나고 생사를 두고 하는 말도 거기에 관계가 있다고 보죠. 부활절이다 하는 것도 사람이 죽었다가 태어나는 것, 살아나는 걸 부활이라고 그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영원히 살아 있는 겁니다. 부활절이 오늘만 부활절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부활절이 있었고 지금도 언제나 죽은 게 아니기 때문에 오늘도 부활절이요 내일도 부활절입니다. 우리는 오늘만 부활절로 생각해선 절대 안 됩니다. 영원한 오늘입니다. 어저께도 오늘로 짊어지고 나왔고 내일도 다시 오늘로 짊어지고 나옵니다. 과거도 미래도 바로 오늘이니까요. 오늘은 영원히 오늘 오늘 오늘 오늘! 영원히 오늘 오늘입니다. 오늘 오늘, 오직. 부처님 오신 날에 메시지를 써 달라고 그래서요, “영원한 오늘이야. 우리가 살아 있고 우리가 모두 불에 타서 다 없어진다 해도 그 자체의 영혼만은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에 영원이야, 영원히. 영원히 오늘이야, 오늘.” 그랬습니다. 여직껏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살아 계시는 한 예수도 부처도 다 살아 있는 겁니다. 그게 부활절이죠.
오늘도 부활절, 내일도 부활절입니다. 오늘만이 아니에요. 생각을 고렇게 얍삽하게 가지시지 말고 느긋하게 넓게 포용력 있게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데 그거를 잘 지킬 수 있다면 항상 살아 계시는 걸 알고 자기와 둘이 아니다라는 걸 알게 되면 항상 밝게 살아나가고 거짓이 없을 거고 시간도 지킬 거고 도의 의리도 있을 거고 아주 깊은 자기도 있을 것입니다. 어때요? 남한테다 뒤집어씌우기 이전에 자기가 좀 다 쓰면 좀 어떻습니까? 자기가 이 세상에 났으니깐 자기 탓이지 누구 탓입니까, 그게, 다. 그러니 오늘 오늘 하루하루를 항상 부활절로 생각을 하십시오. 그러면 좀더 사람이 달라지고 우리가 앞으로 밝게 살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생기지 않을까요? 왜? 날마다 충전이 되니까요. 어때요? 일 년 내내 충전이 안 되다가 그래 부활절 하루만 충전을 해 가지고 살겠습니까? 제 말이 틀립니까, 안 틀립니까?
저는 오직, 내 마음은 하나도 버릴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에 따라서 예수를 생각하면 예수가 되는 거고 성모 마리아를 외우면 마리아가 되는 거고 구원을 받으려고 앨 쓰는 사람이 있다면 아, 그거 돼 주지 뭘 그래요? 그건 마음입니다, 네. 또 “아이구, 관세음보살!” 가난해서 그렇다면 좀 관세음보살이 돼 주고 또 좋은 데로 못 가서 앨 쓴다면 지장이 돼 주고 아파서 앨 쓴다면 약사가 돼 주고 아, 그러는 거지, 뭐 거기에 이름대로 따로따로 있는 겁니까, 어디?
그러니까 내가 말을 잘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진리가 그러해요. 우리 종교인들이 알아야 할 일이 바로 그거예요. 날마다 우리가 부활절로 생각한다면 항상 충전이 되죠, 새롭게 새로 충전이 되고. 그러니 지나간 거를 산다고 하고 그러지 마시고요,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게 그냥 생명이 다시 화해 가면서 탄생을 하는 겁니다. 알아지는 것도 탄생이거든요.
200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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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