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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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선객의 영가를 천도하다/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스승에게 깨침 인가 못받자 홧병나 죽은 ‘오시자’
영가 나타나 공포 유발…스승 법문 듣고 천도돼

담당문준 선사가 수좌로 있는 절에 ‘오시자(悟侍子)’라는 선객이 있었다. 소임이 시자였던 모양이다. 게다가 아는 소리를 더러 하니까 주변에서 ‘깨달을 오(悟)’자를 별명으로 붙여주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우연히 지객실에 들렀다가 인기척이 나서 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갔다. 그 때 화대 소임자가 장작불꽃 휘젓는 것을 보고는 경계가 달라졌다. “이제 드디어 내가 깨쳤구나!” 그리하여 곧장 방장실에 인가를 얻고자 쫓아올라갔다. 그러나 그에게 되돌아온 것은 ‘아니다’라는 답변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며 옥신각신하다가 쫓겨났다. 이럴 경우 제대로 된 공부인이라면 더욱 분심을 일으켜 용맹정진해야한다. 하지만 오시자는 기대가 너무 컸던 탓에다가 마음까지 여렸다. 그 바람에 심화(心火)가 불타올라 이른바 홧병으로 죽어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오시자 영가가 나타나 대중을 괴롭혔다. 밤이 되면 대중의 신발을 다른 장소로 옮겨놓고, 변소에서 볼일을 마치면 어디선가 나타나 뒷물할 물병을 건네주곤 했다. 깜깜한 곳에서 형체도 없는데 물병만 왔다갔다 한다면 아무리 담력있는 스님이라 할지라도 혼비백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바람에 대중들은 밤마다 공포에 떨어야 했다. 영가는 함께 정진하던 대중을 배려해서 신발도 옮겨주고 뒷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하는데 산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마침내 멀리 절강지방으로 떠났던 문준선사가 돌아오자 대중들이 전후사정을 아뢰었다. 그날 밤 선사는 일부러 변소에 갔다. 그 때 벽에 걸린 등불이 갑자기 꺼져버렸다. 똥을 누기도 전에 오시자가 와서 물병을 건네주었다. 선사는 담담하게 물병을 받아 볼일을 마치고 나서 그 물로 천천히 뒷물을 하였다. 그리고는 물병을 다시 가져가도록 불렀다. 오시자는, 나타나자마자 기겁을 하는 다른 대중들과 달리 자신의 호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선사가 고마웠을 것이다. 산중에 대한 원망스런 마음까지 잊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그야말로 영가법문인 셈이다.
“자네가 당시에 지객실에 있다가 장작불꽃 휘젓는 것을 보고는 깨달았다는 오시자인가? 참선하고 도를 배우는 일이란 오로지 생명의 본원이 가는 곳이 어딘가를 알기 위함이다. 그러나 네가 장경각에서 어떤 선객의 짚신을 옮겨놓는 그것이 어찌 당시 네가 깨달은 그것이겠는가? 밤마다 변소에서 뒷물할 물병을 건네주는 것이 어찌 네가 깨달은 그것이겠느냐? 무슨 까닭에 갈 곳을 모르며 어쩌자고 여기에서 이렇게 대중을 괴롭히느냐? 내가 내일 대중들에게 권해 너를 위해 경전을 읽고 돈을 모아 공양거리를 마련, 천도해 줄 터이니 너는 특별히 생사를 벗어나기를 구하고 이곳에서 더 이상 머물지 마라.”
이튿날 대중들이 독경과 법문을 통하여 오시자 영가를 천도하고 나니 예전처럼 아무 일이 없게 되었다.
선가에서는 스승의 역할과 중요성을 참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문답점검을 통하여 인가를 해주고 또 그것에 의해 법을 이어가는 제도에 의거한 독특한 가풍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의 인가없이 깨쳤다고 하는 놈들은 모조리 천마외도(天魔外道)라고 불러도 아무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스승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을 도리어 인정하지 않고서 ‘자기가 깨쳤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스승을 부정하는 경우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하긴 억울할 것이다. 각고의 노력끝에 뭔가 잡혔는데 그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배신감 바로 그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면서 여기저기 제방의 선지식이라는 선지식은 다 찾아다니면서 인가가 아니라 동의를 구하러 다니게 된다. 이쯤되면 깨달음 그 자체가 병이 된다. 이를 ‘대오선(待悟禪)’이라고 하여 큰 병통의 하나로 분류해놓고 있다.
200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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