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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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에 얹혀 있는 가정/이우상(대진대 문창과 교수·본지 논설위원)
가정은 행복의 최소단위다. 화평과 위안의 추상적 공간이 고향이라면 맨살로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곳이 가정이다. 참혹한 전란 속에서도 가정은 가족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였다. 그러나 세월의 비정함을 증명하려는 듯 가정이 위태롭다. 요즘 벌어지는 가정 폭력 사태는 날마다 아슬아슬하다.
세상에 알려지고 있는 제목만도 숨이 컥컥 막힐 지경이다. 애 못 낳는다며 며느리 때린 시아버지, 새벽 세 시에 문을 늦게 열었다며 열 살 난 아들을 마구 폭행한 아버지,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가장 살해한 모녀, 강도로 위장해 남편 청부 살해, 남편의 폭력 피해 도망치던 아내 옥상에서 추락사 등, 경우의 수를 나열하듯 사건의 유형과 방법이 파다하다. 그 잔혹극의 무대는 가정이고 등장인물은 가족이다.
급기야 얼마 전, 상습적으로 가정 폭력을 휘둘러온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를 넥타이로 목 졸라 숨지게 한 열 네 살 여중생 사건 소식을 접하기에 이르렀다. 귀와 눈을 막고 싶다. 숨이 멎을 지경이다. 가정 폭력의 원인과 대책이 숨 가쁘게 쏟아져 나오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허무함에 사지가 축 늘어진다. 관계의 단절이니 소통의 부재니 하며 현란한 어휘로 치장하는 문학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가정 폭력은 수많은 사례와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지만 여전히 낯선 체험이다. 그것을 예방하려는 법과 제도의 미비함에 피상적 책임이 있다. 그러나 법과 제도가 아무리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한들 낯선 체험을 막을 수 있겠는가. 가정 폭력의 정당방위를 인정하고 강자 중심의 사법관행을 개선한다고 무너진 인륜과 사라진 생명이 부활할까.
법과 제도는 정치의 몫이다. 인간의 심성을 조절하고 순화하는 것은 종교의 몫이다. 정치와 종교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니, 무명을 일깨우는 목탁이니 하는 공허한 구호에만 충실한 것은 아닌가.
모든 사건 사고는 감성의 산물이다. 특히 가정 폭력은 충동적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는 습관 때문이다. 촌수의 거리를 규정할 수 없는 부부, 부모 자식간에 저질러지는 야만적 횡포다. 충동을 자제하는 힘과 인내를 한 뼘만 기른다면 순간적 최면 상태를 억제할 수 있다. 부처의 자비라는 거창한 관념적 명제를 가르치기에는 그들의 가슴이 이미 너무 팍팍하다. 그저 하루 한 번이라도, 울컥하는 격분이 치솟을 때, ‘휴~ 관세음보살’이라고 한 마디만 읊어보자. 한 박자만 늦추면 악귀 같던 상대의 얼굴이 달리 보인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보인다.
의무와 권리, 이기와 이타가 오롯이 뭉쳐진 곳이 가정이다. 세상을 만드는 기초 세포조직이 가정이다. 핏발선 가해자 역시 천륜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분노와 억울함 없는 자가 어디 있을까. 멧돼지가 자라나는 이빨을 마모시키려고 고목 둥치에 부지런히 이빨을 갈아대듯이 참고 삭이며 사는 것이 세상이다.
세상에 널린 것이 총칼이다. 마지막 안식처인 가정만은 칼날 위에서 내려놓자. 공포와 불안의 기운을 걷어내자. 숨 한 번 만 더 쉬고 가족을 바라보자. 그들은 적이 아니라 눈물겨운 동반자다.
며칠 전, 속상한 일이 있어 술을 과하게하고 밤늦게 귀가했다. 이유 없이 현관문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으나 들숨 크게 쉬며, 참고 들어가 잠든 딸애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편한 자세로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머리가 띵하고 얼얼한 중에 또 다른 생각이 겹친다.
십여 년간 아비의 주정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아비를 죽인, 딸애와 동갑내기인 강릉 여중생 이양은 지금 차디찬 교도소에 있다.
아! 관세음보살!
2005-05-04
 
 
   
   
2024.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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