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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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끄달리지 말고 뜻을 가지고 행하라!
모든 게 둘 아닌 도리를 알라

봄이 오니깐 활동하시기가 좀 유하죠, 아주 추울 때보다는.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마음에도 봄이 와야 살기에 좀 유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진리를 배우는 데 세 가지의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진리에 순응해야 하고, 둘째는 부처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셋째는 시대에 따라야 한다는 얘깁니다. 이 세 가지가 어긋날 때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과 같아서 불제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왜 이 정신세계의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한번 숙고해보도록 합시다. 우리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갖가지로 생활에 얽매입니다. 그러나 만물들은 생물들이나 동물 식물이든, 새들이든지, 어떤 곤충이든지, 개든 고양이든 모두가 자기 분수를 안다 이겁니다. 돼지는 자기가 돼지인 줄 알기 때문에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새도 그렇고, 개도 그렇고 모든 게 다 자기 분수를 알기 때문에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오직 한 군데에다 몰두하고 말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바를 틀림없이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건이 주어지면 개는 개로서 사는 방식을 허탈하게 보내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네 인간처럼 아주 악순환을 겪고 얽히고설킨 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집착과 관습에 의해서 그냥 얽매이고 살지는 않죠.
어떤 큰스님이, 사대 선지식들이, 또는 부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했다고 그러면 거기에 끄달려서 아예 한 발짝도 떼놓지 못하죠. 부처님께서도 ‘말에 끄달리지 말라, 뜻을 봐라. 뜻을 따라야지 말을 따르면 안 되느니라. 그 말을 들어서 뜻을 가지고 행해라.’ 이런 말씀하셨죠. 사람은 그렇게 얽매이고 지내는데 동물들이나 식물들은 아주 편리하게 얽매이지 않고 산다 이겁니다. 그것은 어떠한 점 때문이냐 하면 자기 분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은 자기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분수를 모르고 남의 말만 듣고 얽매이고 집착에, 욕심에 분수를 모르고 끄달리는 그러한 일들이 허다 많습니다. 아니, 모두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우리가 자기 다리가 긴지 짧은지 그걸 모른다면 개천을 건너뛴다 하더라도 아마 개천 중간에 빠질 겁니다. 그러나 자기 다리가 짧은 줄을 안다면 뛰지를 않겠죠. 넓은 데는 뛰지 않고 자기가 뛸 수 있는 만큼만 뛰겠죠.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안 그래요. 개천이 넓으나 좁으나 막론해놓고 그냥 넘어갈 생각을 하거든요.
이 공부하는 자체도 그래요. 우리가 분수를 안다면 나부터 발견하려고 애를 써야지, 말을 많이 들어서 첨단을 넘어서려고 기어오르는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그건 자기 자리도 모르는 그런 위치가 되죠. 자기 내면의 자기가 철저하게 그렇게 해나감으로써 스스로 자기 자생중생들은 제도가 된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그것을 귀담아 듣지를 않는 모양 같습니다. 어떡하면 빨리빨리 알아질까, 어떡하면 빨리빨리 깨달을까 하지만 내 자생중생들부터 한마음으로 돌아갈 줄 알아야 내가 한마음으로 돌아갈 줄 알게 되고, 자생중생들이 튼튼하고 건강해야 내가 건강하고, 또는 자생중생들이 둘 아니게 돌아갈 줄 알아야 내가 둘 아니게 돌아갈 줄 알고, 그러니만큼 모든 것은 자생중생들이 남이 아니라 바로 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를 제도를 해야 내가 제도를 받고 자생중생들이 제도를 받아야 내가 깨달음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런 겁니다. 하물며 물에서 사는 생물들도 각층의 차원을 가지고 각층의 모습을 가지고 이렇게 살아나갑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그 모두가 주고받고 이렇게 서로가 공식하면서 공생으로서 공용을 하고 돌아갑니다. 그런 동시에 자기가 놀고 있는 그 집이 엄연히 있어서 테두리를 질서정연하게 찾고 또 질서정연하게 살고 있습니다. 미꾸라지는 미꾸라지 노는 데서 놀고, 게는 게대로 게 노는 데서 놀고, 각계각층이 자기 노는 데서 논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방생을 한다고 하더라도 제 집 찾아가느라고 허덕이다가 죽고 하는 걸 보면, 난 그 생각이 가끔 나요. 해방이 되고 나서 차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오다가 다 그냥 떨어져서 죽는데 머리통이 깨져서 죽고, 다리가 부러져서 걷질 못하고 쓰러지고 이러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떤 생각이 나느냐 하면, 고기를 방생한다고 풀어놨을 때 제 집 찾아가느라고 그렇게 애를 쓰는 것과 같았어요. 얼마나 치욕입니까, 그게? 자기네들은 무심코 그냥 잡아다가 또 넣고 또 잡아서 가둬놨다가 또 풀어놓고 이러는데, 그거는 오히려 자기 인생을 자기가 그렇게 망친 거와 같습니다.
어떠한 것이 진짜 방생인지도 모르면서, 실천도 못하면서 그림자로만 왔다 갔다 하고 남의 말만 듣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갈대와 같이 쓸리는 마음은 부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입니다. 얼마나 질서정연하게 제자리를 찾아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 모릅니다. 제자리를 찾아서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냥 잡아먹히고 그대로 추방을 당하고 이렇게 하니깐 말입니다. 그런 하의 동물이나 생명들이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자기 자리를 자기가 알고 자기 분수를 자기가 알고, 자기가 새면 새라는 걸 알고 미꾸라지는 자기가 미꾸라지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 죽는 데 대해서 조금도 애타게 고(苦)라고 생각을 안 한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해서 진화가 되고, 진화돼서 인간으로까지 이렇게 올 수 있는 길이 터진 겁니다.
그러면 그런 대로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는 걸 가만히 보십시다. 여러분은 애고가 많으니, 병고가 많으니 온통 야단들인데 난 병고다 애고다 고통이다 이런 생각 안 합니다. 고통을 받아보신 분들이 낙(樂)을 알 수가 있는 거지, 고통을 모르면 남의 고통도 모르고, 또 사람이 발전을 해서 진화돼서 창조력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고통과 즐거움은 동시에 평등한 겁니다. 그래서 항상 재료로 알라고 그러죠. 여러분이 아무리 빠져나갈래도 빠져나갈 수 없는 그런 이치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알아야 될 일인데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그걸 말을 어떻게 해야 여러분한테 잘 비벼서, 비빔밥을 해서 맛있게 해서 먹게끔 하고 나중엔 소화를 잘 시키고, 나중에는 대변을 잘 눠서 속이 시원하게 해줄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곰곰이 생각해도 때로는 표현이 부실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걸 생각해보십시다. 영화를 찍는데 미리미리 대사를 준비하고 촬영하면서 영화를 찍지요? 인간들도 자기가 살아나가는 데에 자동적으로 촬영이 되고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그걸 가지고, 우리가 이 생활을 해나가는 영화를 돌린다 이겁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영화 제작이 되고, 또는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따라서 대사와 모든 것이 그렇게 정신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영화를 할 때에 국민이 ‘이거는 잘못됐다.’ 하고 말을 하면 좀 고치기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대부분 80%, 90%는 고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벌써 그렇게 역할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한 것대로. 그래서 자기가 한 것대로 방영을 해주는 겁니다. 아주 요만큼도 빈틈없는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태양계가 모든 행성을 이끌고 다니되 태양이 잘나서만이 아니고 행성들이 잘나서만도 아니에요. 서로 주고 서로 받고 이렇게 공용하는 겁니다. 공식이 없다면 공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성이 아니라면은 우리가 움죽거릴 수가 없고 살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람이 아주 이 도리를 확실히 안다면 한 치도 어긋날 게 없고, 진리에 순응하고 부처님의 뜻을 따르고 우리 생활도 시대에 따라서 용어가 변천되고 바뀌고 하는 대로 발전이 돼서 아마 시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나갈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말을 해야만이 아주 적절하게 여러분이 생각을 하실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튼 정신세계의 이 마음공부를 안 한다면 절대 안 된다는 거! 우리가 이 테두리 안에서, 이 지구 안에서 벗어나면 벗어나는 대로 정신계와 통해야 한다는 거를 추려서 말씀드립니다. 그 마음과 마음이 저 우주의 근본과 직결이 돼 있다고 그랬죠. 이 세상 살아나가는 건 가설이 돼 있다고요.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그렇게 가지고 나온 거죠. 이 세상에 나왔다 하면 내가 나온 게 바로 화두요, 앉고 서고 생활하는 게 그대로 참선이요, 모든 살림살이하는 것이 바로 자기이기 때문에, 붙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자기이기 때문에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다 이겁니다. 직결이 돼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말하고 행하고 그런 거를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린 왜 이렇게 정신계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려면 정신세계와 통해야 우리가 정신세계로 발전을 하게 되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원자가 발전을 해서, 은하계라든가 태양계라든가, 만약에 거기의 지배자가 된다면 수명은 더 길어지고 각계각층 중생들을 다 건지게 되고 살리게 되는 거죠. 그런 반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 나가 다 내가 되지 않는 생명들이 하나도 없고, 나 아닌 게 하나도 없느니라.’ 한 뜻이 뭔 줄 아십니까? 만약에 이렇게 여러분이 잘 아시는 태양계의 지배자라면, 모든 행성, 혹성을 이끌어가고 있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마음의 줄에, 염주알이 한 줄에 꿰여서 돌아가듯이 다 돌아갑니다. 진리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인간의 한마음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서로가 주고받고 공생 공용 공체 공식 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내 몸뚱이 속의 자생중생들을 제도해가지고 내가 깨우쳐가지고 통해서 보면, 모든 게 나 아님이 없고, 모든 게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모든 게 내 삶 아님이 없고 그렇죠. 이 도리를 완전히 터득해야만이 태양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으며,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태양계의 지배자가 된다 하더라도 딴 행성 혹성의 모든 것을 듣고 보고 알고 행할 줄 알아야, 또 그 오신통에서 벗어나야 누진이 된다고 그랬죠? 누진은 한마음의 한 클럽입니다, 전체가. 우주에 관한 건이나 이 진리에 관한, 이 세상살이 만사에 관한 건이나 모든 게 한데 귀합된 지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몸을 가지고 열반계에 이르러야 된다, 구족해야 된다.’ 이런 뜻은 뭐냐 하면 앉은 자리에서 모두 커버할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응해줄 줄 알고 모든 걸 그렇게 해야만 되고 또 앉은 자리에서 자기 원자에서 입자로서 수만 개로 자기가 화해서 모든 다른 혹성이라든가 다른 위성이라든가 모든 생명들에게, 모든 인간 생명들에게 모두 응해줄 줄 알아야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한 우물에서 산다면 우물의 이치만 알지 연못의 이치도 모르고 바다의 이치도 모른다 이 소립니다. 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광대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보세요. 닭이나 개나 이런 거 본다면 닭도 그렇고 새도 그렇고, 우리 인간은 태로 형성돼서 열 달이 돼야 이렇게 낳죠? 그런데 닭이나 그런 거 보면 금방금방 낳습니다. 금방금방 낳아요. 금방금방 또 죽어요. 어쨌든가 죽게 돼 있죠. 그런데 사람은 누가 육신을 건드려서 죽게 만드는 게 아니라, 스스로 정신을 뺏기고 죽죠. 정신이 빠지면 송장이 되니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래서 정신이라고 그랬죠. 이것이 자기 영원한 뿌리 자체가 죽는 게 아니라 혼이 빠지면 육신은 송장이 돼버리죠.
얼른 쉽게 말해서 종(種)이라고 할 거 없이 씨라고 그럽시다. 씨만 남는 거죠. 그래서 그 씨가 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씨가 잡종이냐, 선종이냐 이게 나오는 겁니다. 잡종은 유전자의 종수가 그렇게 많은가 하면, 선종의 종자도 또 그와 같이 많습니다. 그래서 정신 하나의 원자에서 한생각이 나가는 것이 입자라고 한다면, 한생각의 입자가 그렇게 이 우주 전체를 덮고도 남음이 있다 이 소립니다. 이게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아마 여러분이 진짜 실감하고 진짜 알아야 되겠죠. 덮어놓고 50%의 물질세계만 끌어잡아 다니는 그 습관 욕심 관습, 이게 관습에 얽매여서 모두 헤어나질 못해요. 우리 중들도 그래요. 어떤 부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하셨다 이러면 그 언어조차 어기지 않고 할 양으로들 애를 쓰거든요, 시대는 변천하는데. 시대는 발전이 돼서, 예를 들어서 항상 내가 그렇게 말하지만, 달구지다 하면 지금 비행기라고 그래야 맞습니다. 먼 데 가는 짐을 나르려면 비행기 아니면 못 나릅니다. 그런데 지금도 달구지라는 말을 해야만 옳겠습니까? 시대가 변천하고 발전이 되고, 그렇게 되는 대로 용어는, 뜻은 따르되 용어는 바꿔져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야 자라나가는 사람들한테 전체의, 즉 말하자면 천체의 양식을 먹일 수가 있죠. 이 산하대지의 모든 일체 만물 만생이 거름이 잘 돼야 잘 살 수 있듯이, 천체의 양식을 먹고 자랄 수가 있고, 지혜롭게 물리가 터져서 잘 자랄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우리가 그러한 마음을 맞추지 않는다면, 직결돼 있는 맞춤에 어긋나면 밝게 지혜가 생기질 않아요. 우리가 만날 보면서도요, 이 불 들어오는 것도 갖다 맞추었기 때문에 불이 들어오는 거지 갖다 맞추지 않는다면 불이 안 들어옵니다. 세상과 모두 가설이 돼 있는 이치와 직결이 돼 있는 이치가, 갖다가 삼합이 딱 맞아야 불이 들어올 수 있고, 삼합이 딱 맞아야 생산을 할 수가 있고, 삼합이 딱 맞아야 잉태도 할 수 있는 겁니다. 부부가 없이 잉태할 수 있습니까? 또 자기 영혼이 없이 잉태할 수 있습니까?
이 모두가, 이거는 꼭 영화 속에서 우리가 배역과 대사를 가지고 나오는 것과 같이, 전부 살아나가는 이 자체가 무대 위입니다, 무대! 지금 무대에서 영화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영화를 하는 대로 위로 직결이 돼 있으니까 여기서 녹음이 되는 대로, 입력이 되는 대럀œ, 그 입력되는 대로 위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입력되는 대로 올라가니까 올라가는 데서 그 입력이 올라간 대로 잘 검토해서 뽑는 거죠, 예를 들어서 얘기하자면. 그렇지, ‘자기네들이 깨달았다, 자기네가 잘한다, 자기네가 했다.’ 이런 건 있을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도 자기가 한 사이가 없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부처라고 한 예도 없고, 자기가 깨달았다고 한 예도 없고, 했다고 한 예도 없고, 이 세상에 나왔다고 한 예도 없고,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 예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나와 같이 이 세상에, 지금 세상에 났기 때문에 이 직결된 뜻으로써 부처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 진리에 순응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서로 교환하면서, 이렇게 돌아가는 이 자체가 진짜로 배움이라 생각됩니다. 그저 우리 중들이 목탁이나 치고 염불이나 하고 그러는 게 아니란 얘깁니다. 그러되 그거를 아니 해도 아니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거를 아니 해도. 손은 다섯 개 손가락이 있어야 정상인데, 새끼손가락 하나 없으면 이게 정상이 못 되죠. 안팎이 다 동등하게 진행이 돼야 되겠죠.
그럼으로써 부처님께서도 ‘나의 고깃덩어리를 믿지 마라. 예를 들어서, 너를 먼저 알게 되면 나 자체도 알게 되니, 이 고깃덩어리를 믿지 말아라, 그냥 따르라. 세 가지가 종합해서 맞는다면 그냥 따르라. 잘 보고 듣고 이 세 가지에 어긋난다면 따르지 말라.’
지금 가만히 보세요. 덮어놓고 종교라 이름만 붙여놓으면 그냥, 뭐 아우성을 치고, 손을 들고 손뼉을 치고 미친 사람들처럼 이렇게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절대로 부처님께서는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 세상에 부모의 혈육을 받고 나와서, 뜻을 받고 나와서, 고상하고 누(累)가 되지 않게, 자기가 누가 되면 전체가 누가 되니까 누가 되지 않게 살아나가는 것이 아주 고상한 제일 가는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점잖고 고상하고 알뜰하고 진실하고 선명하게 살아도, 이 모습을 가지고는 얼마 살 수가 없는 건데….
여러분이 지금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시고 이 몸이 있을 때에, 이 몸이 있어야 상대도 있는 거니까 공부가 되는 거지 몸이 없으면 상대가 없기 때문에 부딪침도 없고, 보는 거 듣는 것도 부딪침이 없어서 공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을 때 여러분이 다른 데다 정신 팔지 마시고 오직 한 생을 점프해서라도, 내가 한 생을 버리고라도, 한 생을 점프해서 내가 탈피하겠다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피안의 세계가 바로 탈피의, 그 얽히지 않는 탈피의 세계라고 봅니다. 우리가 그냥 살아나가는 데 가정의 안유나 원하고, 나의 애고나 없애기 위해서 다니지 마십시오.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보지 않는다면 되돌아 나올 수가 없고,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남의 고통이라는 걸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귀합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고통이라는 걸 무섭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거는 공부할 수 있는 재료구나, 너무나 감사하구나!’ 하고 거기다 놓을 때에 그냥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아지듯 녹아지는 것입니다.
죽는 게 뭐 그렇게 원통합니까?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듯이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가 곤충인 줄 알고, 자기가 새인 줄 알고, 자기가 뱀인 줄 알고, 자기가 개인 줄 알고, 자기가 소인 줄 알고, 돼지인 줄 알기 때문에 우리 인간처럼 고통을 받지 않는다 이 소립니다. 도끼로 머리를 때려서 죽이고, 매달아놓고 태우고 이래도 자기는 즐겁게 생각을 한답니다. 왜냐? 그 모습을 하나하나 벗겨나가니까 말입니다. 자기가 어떠한 건 줄 안다면 벗겨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고양이가 엉뚱하게 사람 짓을 한다고 해서 사람의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고양이 모습을 가졌기 때문에 그대로 고양이 대접밖에는 받을 수가 없죠. 그러니깐 고양이가 고양인 줄 알아야만이 그 고양이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일을 크게 거스르지 않고 말입니다.
그렇게 알기 때문에 개나 고양이나 말도 그렇고, 모든 것이 때에 따라서는 주인을 살리는 수가 많습니다. 내가 주인의 그 모습과 행을 전부 배워 가는데, 배워가고 있는데 내 스승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만약에 개가 어느 집안에서 살아나갈 때에, 사람이 행동하는 거 사람이 말하는 거, 사람의 정신 두뇌에서 나오는 그 모든 전체를 자기가 배워가지고 나간다면 자기 스승 중에도 스승이다 이겁니다. 그 도리를 아는 개라면 반드시 주인을 스승으로 알고 주인으로 알고, 절대적으로 알고 자기 생명을 버려서라도 구합니다.
그와 같이 오계의 첫째, ‘생명을 죽이지 말라.’ 이랬죠? 그런데 두 가지가 있죠. 배운 사람은 생명을 죽여도 살생이 되지 않고, 이 마음공부 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였다 이런다면 살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기 때문에. 이 마음공부를 잘 해서 나가는 사람들이 어떠한 관계상 용도에 따라서 부모가 돌아가시게 됐거나, 어떤 사람이 허기가 져서 뭐를 잡아서 먹는다 하더라도 금방 그 순간 생명을 죽일 때 벌써 그 모습을, 무명을 벗기고 자기 속에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게 바로 거기다 맡겨 놓으면 그냥 사람으로서 화하게 생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살생이 되지 않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은 그대로 너, 나니깐 그냥 살생이 되는 거죠. 그래서 다 깨달아서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도 공해서 없는 도리를 알아야만이 너는 네가 있고 뚜렷하게 나는 내가 있고, 이런 뚜렷한 법칙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두 몰라서 덮어놓고 그저 비구니는 비구니대로 비구니니깐 업신여기는데, 비구니 비구를 누가 낳았습니까? 모든 비구니 비구 또는 사부대중이 다 자궁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 씨는 줬다 하더라도 이 산하대지의 밭이 다 만물만생을 다 길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시해요? 어떻게 돌부리 하나라도 무시할 수가 있겠습니까? 풀 한 포긴들 어떻게 무시할 수가 있겠습니까? 곤충 하나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우리들의 분자니까. 이 도리를 역력히 아신다면 심성과학에서 천체물리학으로 이렇게 돌아가면서 잘 파악하고 공부를 해서 이 세상을 벗어나고, 이 세상에서 건지고 저 세상에서 건지고, 이 세상 저 세상이 따로 없이 아마 건질 겁니다.
우리는 조금도 빈틈없이 저 갈고리에 걸려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고기가 바다를 벗어나서 살 수가 없듯이, 우리가 지구를 벗어나서 살 수 없듯이,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당신과 둘이 아닌 까닭에 나는 한 사이도 없고, 어떤 거를 집어서 나라고 할 수 없으니 나는 한 사이도 없다고 했겠지요. 허나,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그 길을 일러주시지 않았다면 반드시 우리가 지금도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게다 이겁니다. 역력히 지금도 그분의 마음은, 진리와 그분의 마음과 세상과 전부 일체 만물만생과도 더불어 같이 마음을 한마음으로 돌렸기 때문에, 지금도 진리는 여여하듯 부처님의 그 뜻과 말씀은 여여하다 이겁니다.
어디 가서 스승을 또 찾겠습니까? 팔만대장경이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고, 바로 부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을 써놨고,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 그것을 잘 파악한다면, 바로 팔만대장경을 한 꺼풀 두 꺼풀만 제껴서 조목조목 본다면 다 터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만 그냥 따라서 원숭이처럼, 그 말씀하는 것만 따라서 외운다고 그래서 부처님이 이뻐할 리 없습니다, 절대로! ‘종자가 내 종자가 둘이 아니게 돼라.’ 한 것이지, 허허! 그리고 ‘모든 게 둘이 아닌 도리를 알라.’ 이런 것이지, 그 말씀을 그렇게 달달달달 외워서 이렇게 해서 공부하란 말씀은 안 하셨을 겁니다.
그러곤 그 말씀을 달달달달 외우고 “나는 금강경 화엄경 이거를 몇 독씩이나 하고 이거를 잘 안다. 내가 이만큼 알았으면 됐지 뭐 걸릴 게 있느냐!” 이러겠지만, 천만의 말씀! 화엄경이 이 세상 돌아가는…. 아니, 여러분! 이런 소리 들었겠죠? 화투가 십이 개월까지 있죠? 그것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아니, 이 세상 열두 달 돌아가는 거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 돌아가는 게 그대로 화엄경이에요. 그래서 예전에 어떤 스님이 하도 정월에 심심하니깐, 그거를 한판 하자고 그래서 한판 하고 난 뒤에 “아이구, 화엄경을 디굴디굴 굴렸더니 속이 다 후련하네.”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것도 과언이 아니죠. 하여튼 어떠한 거든지 거리낌없이 우리가 점프해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아량과 지혜 물리가 터져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러 말을 안 하더라도 이렇게 그냥 거듬거듬, 자세히 얘기는 안 했어도 여러분 알아들으시겠죠? 뭐, 도리천이니 이렇게 말씀하신 그 뜻이 우리가 이 세상을 벗어나서 또 그런 지배자가 되고 지배자가 됨으로써…. 우리가 이 지상에 산신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사왕천을 말하는 겁니다. 이 모두가 우리가 모습으로 다니면서 한다면 그게 될 수 있겠습니까? 모습은 한계가 있는 거니까. 이 모든 것이 표현하자면, 나는 공부를 여러분과 같이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이름을 잘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냥 짐작하고 아는 걸로만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보이지 않는 데서 만약에 원자에다가 입자들을 그냥 수없이 이 우주 공간에 있는 걸 다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 이름만 다르지 뜻은 다 똑같아요. 다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다 내놔서 활동을 해도 줄지 않는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여러분도 될 수 있으면 처음에는 절대적으로 여기 여기만, 여기 자생중생들이 모인 이 세계만 믿고 모든 걸 ‘주인공의 뿌리에서 뿌리가 가닥가닥 헤아릴 수 없이 있는 이 자체 여기서 모든 게 나오는구나! 여기로 모든 게 드는구나! 나고 드는 게 거기구나! 그러니까 너만이…!’ 이렇게 해서 다 거기다 놓고 자생중생들이 ‘아, 이거 마음의 선장에 의해서 모두가 돌아가는구나!’ 하고 다 알았을 때, 그때는 털구멍을 통해서 보이지 않게 이 원자에서 입자가 나가듯 다 이렇게 나가서 조절하고 다 이렇게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같이 돌아갈 수가 있죠. 예를 들자면 미국에 아들이 사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곳까지 가서 자꾸 도와줄 수도 없고 이럭할 때는, 여기서 딱 내 마음에서 탁 나가면 벌써 여기서, 그걸 이름을 하자면 입자로서 그 활동을 하게 돼 있죠.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내가 그래요. 허허.
그러니까 입자로서 거기 가서, 입자라도 원자가 될 수 있고, 원자 속에서 입자가 나오고, 나온 그 입자가 바로 원자가 될 수 있는 거니깐요. 일할 땐 원자가 되는 거죠, 그 속에 둘이 아니게 가니까. 그래서 순간순간 찰나찰나 원자에서 입자가 돼서 나가서 그쪽에 가서는 원자가 되고, 원자가 돼서 그쪽에서 그 뜻을 알았으면 ‘아, 야! 이거.’ 그러면 또 전화를 해주고 아, 이러면 자연적으로 공부가, 느끼고 체험하고 이렇게 되면 자연적 알게 되는 거죠. 그리고 가정을 이끌어나가는 데 여의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죠.
그러니 여러분이 정신계의 이 공부를, 마음공부를 아니 하신다면 앞으로 살기가 극난히 어렵다. 왜냐? 앞으로 물질세계의 발전은 고도로 진전이 되겠으나 물질세계의 공부를 하려면 이 정신세계의 공부가 없이는 물질세계도 광대하게 발전이 될 수가 없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너무 많이 해드리면 또 엇갈려서 이러실 테니까 다시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재현해보시고 생각해보시고, 느끼고 이렇게 숭상하시도록 빕니다, 빌어요!
여러분은 배우신 분들이 돼서 나보다도 더 아주 영리하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말을 해도 그걸 지금 시대에 공부한 거기에 탁 물리를 맞춰서 ‘아! 그 말씀이 이런 거로구나!’ 하고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시겠죠? 왜, 왜 그렇게 흐릿합니까? 다 모자라는 게 있죠. 여러분은 정신계의 그 뜻을 잘 모르시겠지만, 정신계의 뜻을 안다 하더라도 지금 시대에 돌아가는 그 이름을 잘 모르고, 전부 이름을, 영어로다가도 해놓은 게 있고 이러기 때문에 나도 까막눈이죠, 사실은요. 그러니까 피차에 모르는 걸 서로 배우면서, 서로 도반으로서 이렇게 살아가면서 충전합시다. 그럼 질문할 사람 있으면 질문들 하세요.
(다음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79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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